소설리스트

대몽주-155화 (155/1,214)

155화. 모든 것을 걸다

백부 내원(內院)의 한 서재.

짙푸른 장포를 입은 백학성이 책상 뒤에 앉아 진지하게 백강풍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잔뜩 찌푸린 그의 미간에는 갈수록 주름이 깊어졌다.

“가주, 우리 백가에서 완수한 임무량은 본래 임가와 두가를 훌쩍 넘어섰네. 허나 최근 임가에서 거금을 들여 어디선가 높은 값에 독립수련자들을 몇 명 데려온 것 같더군. 그들이 임가를 돕는 바람에 임가와의 격차가 크게 줄어들었네.”

“임가를 쉽게 봐서는 안 됩니다. 요 몇 년 동안 임가와 두가는 암암리에 내통해왔지요. 이번에도 두 집안이 결탁했을까 걱정입니다. 두가에서 공덕점(*功德点, 임무를 수행하고 관부로부터 받는 점수) 일부를 임가에게 넘겨 그들이 정식으로 동맹을 맺는 것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때 가서 우리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백학성은 깊은 생각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의 말이 타당하네. 나 역시 그 걱정을 하고 있었지. 두가의 객경(客卿)들이 임가의 일을 대신 해준 것뿐이라고 주장하면 그들의 공덕점이 통째로 임가의 주머니에 들어가 우리를 추월하게 될 테지. 분명 그럴 가능성이 있네.”

“셋째 숙부님, 우리도 보수를 높여 집안 객경들이 최대한 더 많은 임무를 수행하게 해야겠습니다. 또한, 무화문(霧化門)의 강 도장에게 서신을 보내 무화문 장로들의 도움을 청해보겠습니다.”

백학성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착귀방의 임무는 이미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 남은 시간이 많지 않네. 먼 곳의 물이 당장의 갈증을 해소해주지는 못하지. 걱정이군그래.”

백강풍은 그렇게 대꾸하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백학성이 그를 멈춰 세웠다.

“임가와 두가에서 성 남쪽 교외 장풍곡(藏風谷) 임무에 간 사람이 있답니까?”

“그 임무는 모든 임무 중 가장 어렵고 위험하네. 공덕점도 가장 높지. 남은 큰 임무들의 포상을 모두 합친 것과 거의 비슷할걸세. 임가와 두가도 욕심이야 나겠지만, 감히 그런 위험을 감수하진 않겠지.”

백강풍의 대답에 백학성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그 임무만 완수할 수만 있다면…… 그 두 집안의 공덕점을 더해도 우리를 뛰어넘진 못하겠지요?”

“물론일세. 가주, 설마…… 그 임무를 받을 생각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백가가 임가에게 질 수는 없습니다.”

백강풍의 머뭇거림 앞에서도 백학성은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가주, 장풍곡은 상황이 복잡하네. 그 임무는 완수하기 그리 쉽지 않을 게야. 그리 되면 손해가 클 터인데…….”

“이번에 관부에서 착귀방을 내붙인 것은 첫째, 근래 날이 갈수록 불안해지는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요, 둘째, 성안 각 가문의 실정을 살피기 위함입니다. 우승한 가문의 이득은 결코 겉으로 드러난 이득에 그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손해를 두려워할 때가 아닙니다. 성공하면 그 이상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백학성이 만류를 일축하자, 백강풍은 내심 감탄했다.

“역시, 가주는 참으로 주도면밀하군.”

백학성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말을 받았다.

“숙부님 말씀도 일리가 있긴 합니다. 분명 위험하지요. 그러니 계획을 잘 세워 손해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을 파견하면 좋을지요?”

백학성의 물음에 백강풍은 잠시 생각한 뒤 이름 몇 개를 댔다. 그때마다 백학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리고 심협을 데려가는 것이 좋겠네.”

마지막으로 백강풍이 한 마디 덧붙였다.

“심협……. 저도 들었습니다. 요즘 그의 활약이 대단하다지요? 허나 분명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돕고 있을 겁니다. 그 자신의 수련 경지는 떨어지는 편이니 장풍곡에 들어간다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백학성이 주저하며 말했다.

“그의 배후에 있는 자가 도와준다면 아주 큰 힘이 될 걸세. 또한 심협이 선두에 서서 귀신과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일만 없다면, 그에게는 천부적인 부적술과 기이한 신법(*身法: 경공이나 보법에 있어 몸을 쓰는 법)이 있으니 제 한 몸 보호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네.”

백강풍은 이미 생각한 바가 있는 듯 막힘없이 설명했고, 백학성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대로라면, 그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임무에 동참할 것을 제안해봄직 하군요. 만일을 위해, 이번 임무는 실행 전까지는 비밀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서재 밖에서 돌연 우렛소리가 울리더니 성의 절반은 뒤덮을 것 같은 뇌우가 하늘을 찢고 퍼부었다.

* * *

처소 안. 심협은 하늘의 먹구름 사이로 간간이 번쩍이는 백색광을 보고 있었다. 마치 부지런한 늙은 농부가 황금빛으로 물든 들판을 바라보듯, 그의 눈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얼마 전 완수한 임무 덕분에 그는 선옥을 적잖이 벌어 또다시 녹보당에서 부적과 영재를 잔뜩 샀다. 하지만 하늘이 돕지 않아 뇌우가 내리지 않은 탓에 여태 낙뢰부를 만들 수 없었다. 그 기간 동안 그로서는 끊임없이 다른 부적들을 시험해볼 뿐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또다시 20여 장이나 되는 자운지를 써버리고 나서야 비행부 하나를 성공적으로 그려냈는데, 때문에 며칠 동안이나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 자운지에 그린 비행부는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까.

그런데 오늘, 드디어 한바탕 뇌우가 쏟아질 듯하자, 심협은 바로 청상지와 붓, 부적용 먹을 꺼내 낙뢰부를 그리기 시작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날이 어두워질 무렵, 뇌우는 잦아들었다. 줄곧 분주하던 심협의 부적 그리기 작업도 그제야 멈췄다.

72장의 청상지 중 60여 장을 쓴 결과, 두 장의 낙뢰부를 그리는 데 성공했다. 그것만으로도 예전에 비해 성공률은 적잖이 높아진 셈이었다.

심협은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지만, 마음만은 더없이 뿌듯했다.

이틀 뒤 이른 아침. 가부좌를 튼 채 숨을 고르던 중, 심협은 돌연 구혼마면의 부름을 받았다. 구혼마면은 그에게 성 남문 밖으로 속히 오라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임무를 수행할 장소와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왜 안 가르쳐주시는 거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래도 구혼마면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떠난 뒤, 백강풍이 그의 처소에 찾아왔다. 그는 심협을 불러 보았으나,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백부의 문을 지키는 호위들에게 전해 듣고서야 심협이 출타했음을 알게 되었다. 백강풍은 내일 정오에 객경 무리를 따라 장풍곡 임무를 수행할 것을 통지하러 왔던 것이다.

* * *

심협은 얼마 후 남쪽 성문을 나섰고, 이내 성 밖에 이르렀다. 성에 들지 못해 길에 줄지어 선 농부와 행상이 적잖았다. 그들은 멜대를 메고 작은 수레를 밀며 도로 양쪽에 좌판을 벌려놓고 온갖 잡화며 채소와 과일 등을 팔았다.

사위를 훑던 심협의 시선은 이내 멀지 않은 길가에 조촐한 초막 하나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백면서생이 이가 나간 검은 도자기 잔을 들고 있었다. 차를 마시는 듯한 모양새였다.

심협은 재빨리 다가가 백면서생을 마주보고 앉았다. 그리고 점소이가 가져다준 찻잔에 차를 따랐다.

하지만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자마자 인상을 팩 찌푸리더니 풉 하고 뱉어냈다. 입안에 곰팡이 같은 냄새와 떫은맛이 감돌아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선배님은 어찌 이런 조악한 차를 드실 수 있는 겁니까?”

심협은 매우 흡족해하는 듯한 구혼마면의 모습에 질린 듯 물었다.

구혼마면은 얼굴 가득 고소하다는 듯한 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이리 될 것을 진즉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이 나간 잔을 심협에게 건네는 그의 얼굴에서는 여유가 느껴졌다.

그 순간, 은은한 주향(酒香)이 곧바로 심협의 콧속으로 밀려들었다. 얼른 한 잔 받아 마시자 입안의 쓴맛이 그제야 좀 가셨다.

“이번에는 어찌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하신 겁니까? 이번 임무를 행할 곳이 성 밖입니까?”

심협은 한숨 돌리고 나서야 물었다

“장풍곡이 어디인지 아느냐?”

구혼마면이 시선을 먼 곳으로 흘끗 던지며 묻자, 심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풍곡이요? 이번 임무는 그쪽입니까?”

“내 알아본 바에 따르면, 최근 건업성에 사악한 기운과 귀신들이 날뛰는 근원이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니 가서 살펴봐야겠지. 만약 정말 귀신이나 요괴 따위가 둥지를 틀고 들어앉았다면, 단번에 제거해버릴 것이고.”

“거긴 너무 위험하지 아습니까?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관부에서 내붙인 착귀방의 첫째 임무가 바로 장풍곡의 음살과 귀신들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허나 시간이 이리 지났는데도 그 임무를 수행하려는 이가 아예 없단 말입니다.”

심협이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으나, 구혼마면은 가볍게 눈을 흘겼다.

“내가 있는데 무얼 그리 걱정하느냐? 아마 이걸로 내가 너를 찾는 것도 마지막이 될 게다.”

“물론 선배님을 믿습니다만……. 하하! 그럼 말씀해보시지요. 제가 어찌 도와드려야 합니까?”

심협은 넋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녀석, 나를 떠본 게냐? 아무튼, 혹시 알고 있느냐? 예전에 장풍곡의 풍(風)자는 풍수(風水)의 풍자가 아니라, 봉망(*鋒鋩: 칼끝, 칼날)의 봉(鋒)자였다.”

구혼마면은 심협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건 저도 압니다. 전에 그 임무를 눈여겨본 터라 지방지(地方志)도 몇 권 들춰 보았지요. 그러다가 전에 그곳이 건업성을 지키는 요충지라 예로부터 전쟁이 일어나면 반드시 점령해야만 하는 땅이었고, 처참한 전투도 수차례 발생했었다지요? 그래서 장봉곡(藏鋒谷)이라 불렸고요. 매번 전쟁을 치를 때마다 시체가 층층이 쌓이고, 흐른 피가 강을 이루었다던가요?”

심협이 우쭐한 목소리로 늘어놓자 구혼마면은 또다시 가볍게 흘겨보고는 혀를 끌 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런 옛 전장 유적에는 이승을 떠도는 혼령들이 아주 많지. 그래서 원살(怨煞)이 강해 불길한 곳에 속했고 말이야. 만약 천지의 맑은 바람이 음험한 기운을 씻어내지 못하고 시간이 오래 지나게 된다면 악귀가 생겨나게 될 게다. 게다가 건업성은 관부에서부터 백성들까지 장풍곡을 난장강(*亂葬崗: 연고 없는 무덤이 마구 널려 있는 공동묘지)으로 삼는 데 익숙해져서 그곳에는 수많은 시신이 대충 묻혀 있지. 그러니 위험이 더욱 커질 수밖에…….”

“그럼 이번 장풍곡의 귀환(*鬼患: 귀신으로 인한 재난)도 그렇게 생겨났다는 겁니까?”

심협이 장난기를 거두고 물었다.

“내가 파악한 정황에 따르면, 대략 9개월쯤 전, 장풍곡 전체가 갑자기 잿빛 안개에 뒤덮였고 그 안에서 간간이 괴이한 소리가 들려왔다고 하더구나. 뒤이어 부근의 몇몇 마을 주민들이 빈번하게 실종되기 시작했고 말이야. 관부에서는 일찍이 몇 차례 사람을 보내 정찰했지만, 그들 역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말을 마친 구혼마면이 차를 홀짝이자, 심협은 문득 깨달았다는 듯 탄식했다.

“아! 어째 관부에서 그 임무에 상당히 높은 보수를 내걸었다 했더니, 건업성 수선(修仙) 세력들의 손을 빌려 장풍곡을 소탕하려는 것이로군요.”

“관부의 생각은 중요치 않아. 저승에서 명이 내려왔다. 그곳에 음덕을 거스르는 것들이 있으니 서둘러 처리하라는군. 허나 그곳 상황이 좀 복잡한 터라 네 도움이 좀 필요하다. 그러니 말해보아라. 나를 도울 테냐 말 테냐?”

구혼마면은 검은 도자기 찻잔을 내려놓고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곳에는 분명 귀신이 넘쳐날 테니, 선배님께서 큰놈들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제가 뇌부(雷符)를 사용하여 잡귀신들을 소탕하라는 말씀이시지요?”

심협은 생각이 바뀌어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 네 낙뢰부라면 높은 경지의 귀신을 상대로도 제법 효과를 볼 수 있을 게다.”

구혼마면은 대견하다는 듯 심협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돕겠습니다만…… 단지 저의 수련 수준이 연기 5층에 지나지 않아 법력에 실로 한계가 있습니다. 소뢰부야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지만, 낙뢰부는 기껏해야 한 번 정도가 한계이니, 차짓하면 선배님의 짐이 될까 걱정입니다. 아니면 제가 소뢰부를 좀 더 그려드릴 테니 가져가시는 게 어떠하신지요?”

심협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구혼마면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나는 저승에 몸담은 음신(陰神)의 몸인지라 양기가 극에 달하는 뇌법(雷法)과는 천성적으로 상극이다. 네가 가지 않는다면 뇌부를 내게 빌려준다 한들 소용없음이야.”

구혼마면의 대답에 심협은 약간 머뭇거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혹시 열흘 정도만 말미를 주시겠습니까? 연기 5층의 정점에서 막혀 있으니, 6층으로 돌파하면 낙뢰부도 두어 번 효력을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선배님께도 도움이 되겠지요.”

구혼마면은 바로 대꾸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린 채, 찻잔을 손으로 가볍게 돌렸다. 뭔가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는 갑자기 인상을 한층 찌푸리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좋다! 네놈은 단맛을 보여주지 않으면 고분고분하게 구는 법이 없지. 내게 음영단(陰靈丹)이 하나 있다. 황천수정(黃泉水精)과 피안화 가루 같은 진귀한 영재들을 채집하여 정제한 것으로, 수행자의 수련 경지를 빠른 속도로 끌어올려 주지. 지금 너의 수련 상황으로 본다면, 넉넉잡아 7일 정도면 6층으로 돌파할 수 있을 게다.”

“그런 신묘한 영약도 있단 말입니까?”

심협은 그의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도 믿기 어렵다는 듯이 되물었다.

“네놈이 내 말을 의심하는 게냐?”

구혼마면이 퉁명스레 면박을 주자, 심협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쩐지 구혼마면 앞에서는 진중한 모습을 보이기가 힘들었다.

“헤헤, 듣다 보니 소 잡는 칼로 닭 잡는 느낌이긴 합니다만, 선배님을 돕기로 한 이상, 사양할 수 없지요.”

심협은 헤헤 웃으며, 구혼마면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재빨리 대꾸했다.

“소 잡는 칼로 닭 잡는다? 그 정도가 아니다. 그야말로 포진천물(*暴殄天物: 물건 아까운 줄 모르고 함부로 쓰다)이 따로 없는 셈이지. 됐다. 네놈 편의를 봐준 걸로 치자…….”

구혼마면은 정말로 아까운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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