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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154화 (154/1,214)
  • 154화. 당사자는 따로 있다

    심협은 길게 숨을 내쉬고는 하얀 손수건을 주워 살펴봤다.

    그 무렵, 구혼마면은 손을 결인하여 휘둘렀다. 그러자 구혼필은 빠르게 원래 크기로 돌아가 그의 손에 떨어졌다.

    구혼마면은 그제야 뒤돌아 미소를 지으며 심협을 바라보았다.

    “녀석, 정말 잘해주었다!”

    “선배님께서 제때 와주셔서 다행입니다. 조금만 늦으셨다면 저를 다시는 볼 수 없었을 겁니다.”

    심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어서다가 통증을 느끼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특히 오른 다리에서는 얼음장 같은 한기가 느껴졌다.

    “저 목매달아 죽은 귀신은 네가 사찰에 들어섰을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어. 그러다가 자네가 이 탑에 이르러서야 손을 쓴 게지. 만일 저놈이 내 존재를 조금이라도 느꼈다면, 바로 몸을 숨기고 도망쳤을 테니, 내 이리 할 수밖에 없었다.”

    구혼마면은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심협의 오른쪽 다리를 향해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의 장심에서 검은 빛이 한 겹 일었다.

    심협은 저 끔찍한 귀신이 줄곧 자신을 따라다녔다는 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만약 탑의 2층 바닥이 낡아빠진 것을 미리 봐두지 않았더라면, 제때에 그 바닥을 뚫고 아래로 떨어지지 못했더라면, 구혼마면이 구하러 오기도 전에 죽고 말았을 것이다. 아니, 탑에 들어오기 전에 귀신이 기습했다면, 자신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 심협은 기이한 꿈속에서 귀신이나 요괴와 수차례 겨뤄본 경험이 있으니, 수선자(修仙者)로서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실 세계에서는 이토록 격렬하고 험한 경험이 처음이었다. 춘추관에서 도망쳐 나올 때보다도 훨씬 위험한 순간이었다.

    ‘다 내 수련 수준이 너무 낮고 실력이 부족한 탓이다!’

    심협이 자책하고 있을 때, 오른쪽 다리에 깃들어 있던 한기가 무형의 힘에 의해 조금씩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마비 증세도 함께 사라지면서 조금씩 감각이 살아났다.

    한참 후, 구혼마면은 뻗었던 손과 검은 빛을 거두었다.

    심협은 조심스레 다리를 움직여 보았는데, 불편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심협은 감사를 표하고는 비단 손수건을 옥합에 담에 챙겼다.

    탑 바닥의 서리가 빠르게 녹으면서 강시 승려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일어났으나,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선배님, 저 두 승려는 어찌 된 것입니까? 저는 저들에게서 음기를 조금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음심시(陰心尸)다. 귀신이 사람을 죽인 후에 음기를 심장에 주입한 게지. 그렇게 되면 이 시체는 음기를 일으키기 전까지는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음기를 일으키면 바로 강시로 변하지. 대신 음심시는 체내에 음기가 적고, 그다지 강하지는 않아.”

    구혼마면은 수중의 구혼필을 휘둘러 허공을 연달아 두 번 찍었다.

    펑! 펑!

    가벼운 폭발음과 동시에 두 승려는 가슴에 구멍이 뚫리면서 심장이 터져나갔고, 그대로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구혼마면과 심협은 곧장 사찰을 빠져나갔다.

    “고생 많았다. 우선 돌아가 푹 쉬어라. 필요하면 내 다시 부르지.”

    유공교에 선 구혼마면은 그렇게 말하고는 모습을 감추었다. 뭔가 바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또 오늘처럼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라면, 내 생각 좀 해봐야겠소.”

    심협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돌아섰다.

    하지만 곧 선옥 서른 개를 얻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좀 전의 모험도 모두 가치 있는 것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심협은 동쪽으로 쏜살같이 내달려 금세 백부로 돌아왔다.

    때는 자시(*子時, 현대의 밤 11시 ~ 새벽 1시)가 막 지난 시각이었다. 너무도 피로했던 심협은 일단 거처로 돌아가 좀 쉬고, 날이 밝으면 임무 완료를 보고하기로 했다.

    거처에 도착한 심협은 잠시 쉬었다가, 나무통에 들어가 눈을 감고 무명공법을 운공하며 회복에 전념했다.

    * * *

    아침 일찍 일어난 심협은 기력이 충만해진 것을 느끼며 장방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임무 완수를 보고하러 온 사람은 무척 적었다. 갈수록 어려운 임무만 남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이들도 대부분은 구경꾼에 불과했다.

    “자네들, 소식 들었나? 어젯밤에 임씨와 두씨 집안에서 사람을 모아 유공교로 향했다네. 이번에는 두 집안에서 벽곡기 수사(修士)들이 사람을 인솔했다지. 심지어 두씨 집안의 남빙수 제원도 갔다네. 그런데 어떻게 됐는지 아나?”

    사람들 중 약삭빠르게 보이는 청년 하나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순식간에 사람들을 모여들었다.

    “이번에는 그 귀신을 죽였겠지?”

    “아닐걸! 들어보니 그 사찰의 귀신은 매우 교활하다더군. 많은 사람이 몰려오면 아예 숨었다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에게만 손을 쓴다고 하더군!”

    “두 집안에서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이번에는 대비하지 않았겠나?”

    “흐흐, 맞아. 귀신은 제거됐네. 그런데 그 귀신을 죽인 자는 따로 있다더군.”

    약삭빠른 청년이 뜸을 들이듯 돌려 말하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 정말인가?”

    “남빙수가 직접 한 이야기인데 거짓일 리가 있나! 듣자하니 그들이 사찰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귀신이 제거된 후였고, 흔적만 남아 있었다고 하네. 게다가 그들이 보기에는 귀신을 처리한 방법이 매우 깔끔하여, 분명 한 사람의 솜씨인 것 같다더군!”

    약삭빠른 청년이 놀랍지 않느냐는 듯 그렇게 말하자, 실제로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

    “그렇다 그 귀신을 제거한 사람은 벽곡 후기 수사라도 된단 말인가?”

    “그 근방 백 리 안에 벽곡 후기의 수사는 몇 안 될 텐데? 그나마도 다들 이름을 떨친 지 오래된 인물들 아닌가? 그들은 이 임무를 받았을 리가 없고…….”

    사람들이 분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심협이 탁자 앞으로 걸어오더니 소매 안에서 반쪽짜리 하얀 손수건을 꺼내어 올려놓았다.

    이때 탁자 앞에 앉은 백가 집사는 한 명뿐이었는데, 그는 흥미롭다는 듯 약삭빠른 청년의 말을 듣는 중이라 심협을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실례지만, 유공교의 임무를 완수하였소.”

    심협이 낭랑한 목소리로 집사에게 말했다.

    “아, 임무를 완수하셨다고요.”

    아직 청년의 이야기에서 헤어나지 못한 집사는 약간 넋이 빠진 목소리로 답하고는 대충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퍼뜩 정신이 든 듯, 낯빛이 변하며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방금 무어라 하셨소? 유공교 임무?”

    “그렇소.”

    심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는 손에 든 반쪽짜리 손수건을 살펴보고, 다시 고개를 들어 심협을 바라봤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한편, 탁자 근처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심협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자 멀리 있던 사람들도 점점 잡담을 멈추고는 모여들기 시작했다.

    짧지 않은 시간, 깊은 침묵이 장방에 내려앉았다.

    모든 이들은 기이한 눈으로 심협을 바라보았다. 특히, 며칠 전에 심협을 비꼬았던 이들은 더더욱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정말로 심협이 그 어려운 임무를 완수했단 말인가?

    시기도 절묘하게 약삭빠른 청년이 유공교 이야기를 떠들어댄 탓에, 사람들은 그 귀신을 처리한 강자가 누구일지 잔뜩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강자가 바로 심협이라는 사실을 믿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심협이 제출한 반쪽짜리 손수건에서 발산되는 음기가 워낙 짙어, 그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사람을 보내 조사해 봐도 좋소. 확인이 되면 포상은 거처로 가져다주시오.”

    심협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집사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뒤돌아섰다.

    심협이 멀리까지 간 후로도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나고서야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간의 침묵을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듯 장방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한 목소리들로 그득해졌다.

    한편, 심협은 그들의 반응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곧장 녹보당으로 향해 소뢰부를 쓰는 데에 필요한 재료들을 구입한 후에야 거처로 돌아왔다.

    소뢰부는 위력에 한계가 있지만, 재료가 저렴하고, 법력 소모도 크지 않았다. 또한, 수량만 충분하다면 제법 큰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그래서 시간 여유가 생긴 참에 최대한 많이 써둘 생각이었다.

    * * *

    닷새가 지났다.

    그동안 백가 집사가 유공교 임무의 포상을 전달하러 온 것 외에는 찾아오는 이도 없었고, 심협 또한 거처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은 채 수련에 몰두했다. 나름 평온한 나날이라 할 만했다.

    나무통 안. 심협은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채 손으로는 결인을 하고 있었다. 몸 주위에는 파란 빛이 은은하게 번졌는데, 이전보다 더 밝아진 상태였다.

    그러던 중, 심협이 돌연 눈을 번쩍 떴다. 그러더니 품에서 재빨리 전령법패를 꺼냈다. 법패에는 작은 글씨로 한 문장이 써 있었다.

    - 자정 무렵, 오암촌(烏岩村)

    “오암촌도 분명 임무 게시판에서 봤는데…… 또 소득이 생길 모양이군!”

    심협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나무통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모든 부적을 다 챙긴 후, 거처를 나와 백부 대문으로 향했다. 건업성 밖 오암촌으로 향하는 것이다.

    다음 날, 심협은 피로 얼룩진, 오래된 가죽 투구를 들고는 죽을 것처럼 피로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로써 백가는 다시 한번 떠들썩해졌다.

    이후로도 심협은 구혼마면이 호출하면 가서 돕고, 임무가 없을 때에는 거처에서 부적을 쓰거나 수련하며 시간을 보냈다.

    * * *

    심협은 구혼마면의 힘을 빌려, 고작 한 달 만에 예닐곱 건의 임무를 완수했다. 그 대부분은 벽곡기 이상의 귀신을 상대한 것으로, 물리친 귀신이 둘 이상인 경우도 있었다. 비교적 쉬운 임무는 먼저 완수돼 점점 어려운 임무만 남았기 때문이었다.

    심협과 구혼마면의 협력 관계는 비밀스러운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흔적이 발견되었고, 고수가 심협을 돕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고작 연기 중기의 수준으로 어떻게 그런 일들을 해냈겠는가. 그러니 심협도 이에 대해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는 비난받을 일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공식적으로는 심협이 임무를 완수한 것이고, 이로 인해 심협의 명성은 백가는 물론이고 임씨 집안과 두씨 집안까지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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