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53화 (153/1,214)
  • 153화. 사찰 안의 고탑(古塔)

    심협은 천왕전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천왕전 안에는 부서진 불상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좌우로 사대천왕이 있어야 할 곳에는 무너진 돌과 기와뿐이었다. 바닥에는 먼지가 가득했고, 지붕과 벽에는 거미줄도 많았다. 폐허가 된 지 오래인 듯했다.

    심협은 대전 안을 한 바퀴 돌아봤지만, 이상한 점은 찾지 못했다. 그는 뒤돌아 종루(鍾樓)로 들어갔고, 천왕전 주변의 건축물 안팎을 모두 조사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물론 귀신도 나타나지 않았다.

    심협은 곧장 광장 옆 복도를 따라 계속 사찰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심협은 나름 잘 보존된 대웅전에 들어섰다. 표정은 침착했으나, 마음속으로는 의구심이 일었다.

    ‘이제 사찰의 중심 지역은 거의 다 돌아봤건만, 귀신은커녕 귀기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니!’

    뿐만 아니라, 어디에도 전투의 흔적이 없었다. 바로 어제 임씨와 두씨 집안 객경들이 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귀신이 구혼마면이 온 것을 알아차리고 숨어버린 걸까? 하지만 구혼마면도 이미 예측하고 있었으니, 그리 쉽게 발각되지는 않겠지.’

    심협은 속으로 이런저런 추측을 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됐다. 생각만 해서 무엇 하겠는가? 나는 내 할 일만 잘하면 되는 게야. 귀신이 나타날 것인지는 하늘에 맡겨야겠지.’

    심협은 그렇게 생각하며, 대웅전을 돌아 사찰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아직 법당(法堂)과 경당(經堂) 선방(禪房) 등의 건축물들이 남아 있었다.

    그때, 앞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두 명의 승려가 달려오고 있었다. 한 명은 방금 문을 열었던 젊은 승려였고, 다른 사람은 마흔 전후로 보였다.

    “서, 선사님! 살려주십시오!”

    두 사람은 잔뜩 겁을 먹은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오? 어째서 아직도 떠나지 않았소?”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 그런데 저 앞의 잿빛 탑을 지날 때, 안에서 여자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데 소승의 사형 한 분이 저희가 아무리 만류해도 탑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아마 선사께서 말씀하신 그 귀신에 홀리신 모양입니다. 부디 선사께서 귀신을 물리치고 사형을 구해주십시오.”

    젊은 승려는 이야기하며, 양손을 합장하고 예를 갖추었다.

    “선사님, 부탁드립니다.”

    중년 승려도 허리를 굽혔는데, 그는 매우 침착해 보였다.

    “그리로 안내하시오!”

    심협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사께서는 저희를 따라오시지요.”

    두 승려는 심협의 대답에 안도한 듯 한숨을 쉬며 앞에서 길을 안내했다.

    세 사람은 금세 사찰의 가장 깊에 곳에 있는 마당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3층짜리 잿빛 탑이 서 있었다.

    “바로 이곳입니다.”

    젊은 승려가 잿빛 탑을 가리키며 말했다.

    윗부분이 절반 가까이 무너졌고, 벽 여기저기 칠이 벗겨져 있다는 것 외에 탑에는 특이한 점은 없었다. 몸체는 약간 기울어 있는 것 같았다.

    심협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지만, 여자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잿빛 탑만이 고고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심협은 탑을 살펴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선사님, 저희도 함께 가겠습니다.”

    두 승려가 따라나섰다.

    “두렵지 않으시오?”

    심협은 두 사람을 곁눈으로 보며 물었다.

    “물론 두렵습니다. 하지만 사형께서 안에 계시는데, 어찌 선사님 혼자 위험에 빠지게 하겠습니까?”

    “뜻대로 하시오.”

    젊은 승려의 말에 심협도 그들을 말리지 않고 탑으로 들어갔다.

    탑 안은 대전과 상태가 비슷했다. 곳곳에 먼지가 쌓여 있고, 불상 두 개는 바닥에 떨어진 채였다. 그중 하나는 부서져 있었고, 다른 하나는 넘어져 있었다.

    심협은 사방을 둘러보다가 계단으로 향했다.

    끼이익!

    소름끼치는 소리에 바짝 긴장하면서도 심협은 2층으로 올라갔다.

    2층도 1층과 비슷했다. 조각상이 두 개 있었는데, 1층의 불상들보다 잘 보존된 채로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별다른 점은 없었다.

    3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무너진 상태라 올라갈 수 없었다. 올라가봐야 3층은 많이 무너져 있으니 발 디딜 곳도 없을 터였다.

    2층 바닥에는 여기저기 큰 구멍이 몇 개나 나 있었고, 바닥을 밟을 때마다 끼이익 하는 소리가 울렸다.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심협이 3층에 올라가봐야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나를 찾고 있는 것이냐?”

    돌연 뒤에서 바람소리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 심협은 심장이 멈출 듯했고,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번개처럼 뒤돌아 양손을 들었고, 반사적으로 부적을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협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커다란 검푸른 손 두 개가 뒤에서 뻗어와 심협의 어깨를 눌렀다. 동시에 또 다른 검푸른 손 두 개가 그의 허리를 조였다. 바로 두 승려의 것이었다.

    두 승려는 언제부터인가 안색이 검푸른 강시가 되어 있었고, 심협을 물려는 듯 끈적한 황색 액체가 흐르는 입을 크게 벌린 채 다가왔다.

    심협은 무척 놀랐지만, 재빨리 침착함을 되찾았다. 이어서 엄숙해진 표정으로 맹렬히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그의 체내에서 이상한 뼈 소리들이 울렸다.

    그 순간, 심협의 몸이 갑자기 축소되더니 위로 솟구쳤다. 그의 몸은 마치 미끄러운 물고기처럼 강시들의 손에서 벗어나, 1장가량 떨어진 곳에 내려섰다.

    이는 황정경에 나온 축골법(縮骨法)이었다. 현실 세계에서는 황정경을 수련할 수 없었지만, 꿈속에서 이 공법을 대성(大成)한 만큼 간단한 기교는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현실 세계의 육신은 황정경 수련을 거치지 않은 상태라 축골법을 시전한 부담은 컸고, 이에 그는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심협은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강시 승려들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그가 막 귀소환을 들어 그들에게 사용하려 할 때였다. 귓가에 거센 바람 소리가 울렸다.

    심협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양발에 하얀 빛을 크게 일으켰다. 그러자 그의 몸이 돌연 모호하게 변하더니, 순식간에 2장여를 나아갔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그는 고개를 돌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서 있던 곳을 확인하고는 그야말로 심장이 떨어지는 듯 놀라고야 말았다.

    그곳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하얗고 어슴푸레한 사람이 서 있었다. 피부는 검푸른 색이었고, 두 눈은 허옇게 튀어나와 있었다. 핏빛의 긴 혀가 허리까지 늘어진 모습이 보기만 해도 오싹했다.

    긴 혀의 귀신은 두 팔을 구불거리며 앞으로 뻗은 채 서 있었는데, 그 열 손가락에서는 길이가 5촌에 이르는 빛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심협은 식은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었다. 만약 아주 조금만 늦었다면, 지금쯤 자신의 몸에 커다란 구멍이 두 개가 나 있었을 것이다.

    귀신은 공격에 실패하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마치 안개와 같은 모호한 하얀 빛으로 변해 다시 심협을 덮쳐왔다.

    심협은 생각할 틈도 없이 반사적으로 사월보를 시전하여 옆으로 피했다.

    하지만 하얀 빛은 심협을 따라 방향을 틀어, 마치 거머리처럼 바짝 쫓았다. 강시 승려들도 함께 덮쳐오니, 그저 전력을 다해 사월보로 거리를 넓히느라 부적이나 귀소환을 사용할 겨를이 없었다.

    귀신은 심협을 잡으려던 시도가 번번이 실패하자, 돌연 늘어져 있던 혀를 꼿꼿이 세웠다. 귀신의 긴 혀는 심협의 뒤에서 붉은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심협은 온몸의 털이 모두 곤두서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고, 전력을 다해 사월보로 물러섰다. 그러나 결국 오른쪽 다리에 귀신의 혀가 꽂히고 말았다.

    처음에는 다리가 얼음처럼 차가워지는 것 같더니, 곧이어 모든 감각이 사라졌으며, 움직임도 느려졌다.

    심협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빠르게 주변을 살피면서도 왼쪽 다리만으로 힘껏 땅을 디뎠다. 그의 몸이 튕겨나가듯 우측으로 꺾인 순간, 하얀 빛이 번득였고, 귀신이 심협의 머리 위에서 나타났다. 귀신의 두 손이 심협의 머리를 향해 맹렬히 내려왔다.

    그런데 그때였다. 돌연 심협이 사라지면서, 귀신의 손은 허공을 휘저었다.

    귀신이 튀어나온 두 눈으로 심협이 있던 곳을 보니, 바닥에 큰 구멍이 나 있었고, 심협은 아래층으로 떨어진 것이다.

    “크아아!”

    귀신은 분노의 일갈을 내지르며, 그 구멍으로 몸을 던졌다.

    한편, 탑 1층 바닥으로 추락한 심협은 격렬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크게 기뻐했다. 드디어 약간의 시간을 번 것이다!

    심협은 일어날 틈도 없이 한 손을 천장의 구멍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오른손에 꼭 쥐어진 귀소환에서 검은 빛이 맹렬히 펴져 나가면서 검은 귀신 머리가 빠르게 생성됐다. 곧이어 이 머리는 입을 쩍 벌려 검은 음파를 발산했다.

    막 구멍을 빠져나오던 귀신은 부르르 떨더니, 뒤로 튕겨나갔다. 귀신은 검은 음파에 에워싸여 있었고, 안개 같은 몸은 조금 흩어진 상태였다.

    “끄아아아!”

    귀신은 금세 몸을 가누더니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몸 주위에 실재하는 듯한 하얀 안개가 솟구쳐, 검은 음파와 교차하면서 빛을 발했다. 검은 음파는 하나로 뭉쳐지더니, 빛이 번득인 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동시에 하얀 안개에서 엄청난 한기가 발산되면서, 귀신을 중심으로 잿빛 탑 1층에는 하얀 서리가 일기 시작했다. 심지어 구멍을 통해 1층으로 내려오던 승려 강시들의 몸에도 서리가 한 겹 생겨났고, 그대로 바닥에 처박히더니 미동도 없었다.

    심협은 주위의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느꼈고, 몸이 빠르게 굳어갔다.

    그때, 귀신이 또다시 모호한 하얀 빛이 되어 덮쳐왔다. 두 손에는 차가운 빛이 번득였고, 피처럼 붉고도 긴 혀는 날카로운 검처럼 꼿꼿했다.

    심협은 도망치기에는 늦었음을 직감하고, 다급하게 손에 쥔 검은 부적에 법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에 검은 빛이 번득였다.

    치이익!

    부적은 뜨거운 쇳덩이에 물을 부은 듯한 소리와 함께 스스로 타기 시작했다. 이어서 폭이 몇 장이나 되는 검은 거미줄이 허공에서 나타나, 심협의 앞을 막았다. 귀신은 덮쳐 오던 기세를 멈추지 못해 그대로 거미줄에 부딪혔다.

    거미줄은 곧장 맹렬히 수축돼, 마치 물고기를 담은 그물처럼 귀신을 가두었다.

    “키야악!”

    귀신은 영지가 생겨난 존재답지 않은 괴성을 내지르며 몸부림쳤다. 그러자 그의 몸 주위에서 하얀 안개가 거미줄을 침범하면서 거미줄에도 하얀 서리가 일기 시작했고, 거미줄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구혼마면 선배!”

    심협은 빠르게 물러서며 다급히 외쳤다.

    “내가 왔다!”

    반가운 목소리가 허공에 울리는가 싶더니, 심협의 앞 허공에 빛이 번득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구혼마면이 나타나 손을 당겼다.

    허공에서 나타난 구혼필이 순식간에 몇 배로 커져, 길이가 석 장에 이르는 거대한 붓이 되었다. 구혼마면은 그 붓을 잡아 귀신에게 내던졌다.

    귀신의 튀어나온 두 눈에 공포가 들어찼다. 그 몸 주위의 하얀 안개는 위로 몰려가 두꺼운 하얀 보호막을 이루었다.

    펑!

    구혼필이 하얀 보호막에 떨어지면서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그 두꺼운 보호막이 순식간에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구혼필은 속도가 조금도 줄지 않은 채, 귀신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어 그대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스치고 지나갔다.

    치이익!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고, 귀신은 몸이 폭발하면서 하얀 기운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무언가 하얀 물건이 하나 흩날리며 떨어져 내렸는데, 반 토막 난 비단 손수건이었다.

    마침 심협의 발 옆에 떨어진 손수건에서는 자욱한 음기가 발산되었다. 물귀신의 붉은 소매 조각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짙은 음기였다.

    심협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자신이 수십 장의 소뢰부를 사용해 물리친 물귀신보다 훨씬 강력한 귀신을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처리하다니, 구혼마면의 실력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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