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52화 (152/1,214)
  • 152화. 황량한 사찰

    심협은 백옥합을 석합에 집어넣은 후, 다시 수련을 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허리춤에서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구혼마면이 전해준 전령법패(傳令法牌)가 발동한 것이다.

    ‘이렇게 빨리 오다니! 보아하니 건업성의 귀신들을 소탕하기 전까지는 안심하고 수련할 수도 없겠구나!’

    심협은 속으로 불평했으나, 재빨리 법패를 살펴보았다.

    법패에 새겨진 부적 문양은 먹처럼 검게 변해 있었고, 작고 하얀 글씨가 한 줄 떠 있었다.

    - 밤이 되면 유공교(柳公橋)로 속히 올 것

    “유공교라면…… 성 서쪽이로군.”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유공교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이전 왕조의 대유(大儒) 유공선생(柳公先生) 이름을 따서 지은 다리였다. 이전에 백소천과 함께 건업성 곳곳을 유람할 때에 지난 적이 있었는데, 무척 인상 깊었던 곳이었다.

    ‘임무 게시판에서 유공교를 본 것 같은데…….’

    심협은 바로 장방으로 가서 확인하기로 했다.

    석양이 질 무렵이라 임무를 수행하러 나간 객경들은 거의 돌아오지 않은 때였다. 장방에는 두세 명의 객경과 구경하러 나온 백가 자제들뿐이었다.

    심협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임무 게시판을 빠르게 훑었다.

    “역시!”

    게시판에는 유공교 근처 황량한 사찰에 밤마다 귀신이 출몰하여 행인을 여럿 다치게 했다는 내용의 임무가 있었다. 포상은 무려 선옥 서른 개였다. 이는 가장 포상이 후한 임무 중 하나인 만큼 무척 힘들고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구혼마면 선배가 처리하려는 게 이 귀신일 게야. 내 구혼마면 선배를 도우면 이 임무를 수행해 포상까지 받을 수 있겠어!’

    심협이 그런 생각으로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 얘기 들었나? 어제 임씨 집안과 두씨 집안에서 열 명 정도가 유공교 임무를 수행하러 갔다더군. 그런데 귀신과 제대로 붙기도 전에 몇 명은 그대로 죽었고, 나머지는 중상을 입고 겨우 도망쳤대.”

    이 말에 흠칫 놀란 심협은 방금 말한 사람을 찾아내 물었다.

    “그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왜? 설마…… 그 임무를 맡으려는 건 아니겠지?”

    심협의 질문에 객경 하나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불쾌한 듯 물었다. 그 말투와 표정에 심협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떠나갔다.

    “요행으로 홍엽진 임무를 완수했다고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심협이 떠나가자, 이 객경은 짜증난다는 듯 투덜댔다.

    “꼭 그리 말할 건 없지. 내 보기에는 실력도 있는 것 같던데?”

    누군가가 그렇게 대꾸했고, 그때부터 장방에 모인 사람들은 심협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대부분은 그를 무시하는 말이었다.

    한편, 오감이 발달한 심협은 그 말을 모두 들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거처로 돌아갔다.

    때는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심협은 법패를 꺼내 살펴보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법력을 주입해 보았다. 그러나 법배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이번에는 구구통보결을 운공해 보았지만, 여전히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법패는 특수한 방법으로만 사용할 수 있나 보군.”

    심협은 입맛을 다시며 법패를 챙겨 넣었다. 그러고는 석합에 보관하고 있던 부적을 모두 꺼내 세어보았다.

    이번 귀신은 분명 벅찬 상대일 것이다. 구혼마면이 선봉을 맡기는 하겠지만, 준비는 충분히 해둬야 했다.

    그간 소뢰부를 제법 많이 써두었음에도 홍엽진 임무에서 거의 절반을 써버려 남은 것은 40여 장뿐이었다. 그 외에 구귀부 다섯 장과 낙뢰부 두 장이 있었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부적을 좀 더 써야겠구나.”

    심협은 부적들을 꺼내기 쉽도록 소매에 챙겨 넣었다. 이어서 거처를 나선 후, 백부의 대문으로 향하는 대신 담을 넘었다. 그러고는 성 서편으로 빠르게 내달려 금세 작은 강가에 이르렀다.

    강에는 고풍스러운 돌다리가 있었다. 강가 양측으로는 매우 큰 상록수들이 심어져 있었다. 늦가을이었지만, 여전히 나뭇잎이 무성했다. 덕분에 돌다리는 더욱 어둡고 후미져 보였다.

    하늘에는 달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귀신 때문인지, 날이 어두워진 후로는 백성들도 대부분 집에만 있었다. 그래서 돌다리 근처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밤바람이 스산한 소리를 내며 불어왔다.

    심협은 주위를 자세히 살폈다. 귀신과의 싸움이 시작되면 지형에 익숙한 편이 좋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다시 돌다리로 시선을 옮겼을 때, 그는 흠칫 놀라고야 말았다. 언제부터인가 돌다리에 하얀 인영이 서 있었던 것이다.

    “선배님, 기척이라도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이리 신출귀몰하시니 이 후배가 놀랐지 뭡니까.”

    심협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고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따라와라.”

    구혼마면은 냉랭하게 내뱉고는 바로 뒤돌아 돌다리 맞은편으로 향했다. 심협은 입을 삐죽이며 그를 따라갔다.

    유공교 맞은편 구역은 백성들이 거주하지 않아 자못 황량했다. 그저 허름한 사찰 하나만이 외로이 서 있었는데, 주변에는 사람 키의 반까지 자란 잡초들이 무성했다.

    구혼마면과 심협은 다리를 건너 사찰로 향했다.

    사찰과 삼십여 장 거리에 도착했을 때, 구혼마면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선배님, 우리가 상대할 귀신이 저 사찰에 있습니까?”

    심협이 긴장한 목소리로 묻자, 구혼마면은 뒤도 돌지 않은 채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왜 들어가지 않으십니까? 처리하기 힘든 귀신입니까?”

    심협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사실 그리 걱정하지는 않았다. 진회교에서 본바, 지금의 구혼마면은 비록 천 년 후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벽곡 후기는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승에 몸담고 있는 만큼 귀신을 물리치는 데에 능할 테니, 사찰의 귀신이 응혼기에 이르지만 않았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벽곡기의 귀신일 뿐이네. 다만 영지가 깨었고, 모습을 잘 감추니 상대하기가 어렵지. 내가 근처에 다가가면 분명 숨어서 나오지 않을 것이야. 그래서 자네를 부른 거야.”

    구혼마면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리더니, 깊은 눈으로 심협을 바라봤다.

    “선배님, 설마…… 저를 미끼로 귀신을 유인하려는 겁니까? 그 귀신이 선배님께는 별것 아닐 수 있겠지만, 제게는 다릅니다. 저는 고작 연기기 수사(修士)란 말입니다!”

    심협이 참지 못하고 외쳤다.

    “아직 내 말 안 끝났다! 일단 들어라. 네가 먼저 사찰에 들어가 귀신이 다가오면 이 부적을 사용해라. 잠시 동안은 버틸 수 있을 게야. 그럼 내가 가서 처리하지.”

    구혼마면은 심협을 한 차례 노려보고는 품에서 검은 부적을 꺼내 건넸다.

    부적에는 거미줄 같은 도안이 새겨져 있었고, 담담한 법력의 파동이 발산됐다.

    “어쨌든 저를 미끼로 쓰겠다는 것 아닙니까? 만일 부적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면요? 귀신이 제압당하지 않거나, 선배님이 한 발 늦게 도착하시면요? 그럼 저는 어쩝니까? 호신할 만한 것을 더 주시지 않으면 저는 못 합니다!”

    심협은 검은 부적을 받아들고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러자 구혼마면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저승에 몸담고 있다고 해서 세속의 일을 모를 거라 여기지 마라. 네놈은 관부의 임무를 받고 왔지? 벽곡기 귀신이면 포상도 적지 않을 터! 부귀는 위험 속에서 얻는다는 말은 나도 안다. 그러니 포상을 원한다면 위험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느냐!”

    “아, 그렇지요. 좋습니다. 그럼 선배님, 절대 늦으시면 안 됩니다!”

    구혼마면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다는 데 당황한 심협은 그렇게 얼버무렸다.

    “안심해도 좋다.”

    그 말을 끝으로 구혼마면은 모습을 감추었다.

    심협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가슴 앞에 구귀부를 붙인 뒤, 손에 검은 부적을 꼭 쥐었다. 그리고 다른 손에는 귀소환을 들어 몸 앞을 막은 채 사찰로 향했다.

    그리 멀어 보이지 않았지만, 심협은 마치 수십 리 길을 걷듯 세 걸음마다 한 번은 멈춰 섰고, 다섯 걸음 만에 쉬어가며 나아갔다. 눈은 쉴 새 없이 사방을 살폈다. 사찰에 가까워질수록 긴장감도 커졌다. 혹시라도 귀신이 갑자기 나타나 대처하기도 전에, 또한 구혼마면이 도우러 오기도 전에 목숨을 잃을까 두려웠다.

    ‘벽곡기 귀신이라니, 홍엽진의 물귀신과는 차원이 다를 터!’

    벽곡기에 진입하면 연기기 때에 비해 환골탈태 수준의 변화가 일어나니,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더욱이 이 임무의 포상으로 미루어, 이 귀신은 벽곡 초기 정도가 아닐 것이다. 그 정도로는 임씨 집안과 두씨 집안 객경들이 그리 많이 죽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 소뢰부와 귀소환만으로 이 귀신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낙뢰부를 쓴다 해도 명중시키리라는 보장도 없지. 게다가 낙뢰부는 비장의 무기이니 함부로 사용하고 싶지 않다.’

    온갖 생각에 잠긴 채 스무 장 정도를 걸었을 때, 돌연 밤바람이 불어왔다. 사찰 입구의 잡초가 흔들리는 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심협은 급히 손에 든 검은 부적과 귀소환을 동시에 들어 방금 풀들이 흔들린 쪽을 조준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괜히 나 혼자 놀란 건가? 에이, 모르겠다. 어차피 복 아니면 재앙이겠지. 재앙이라도 피할 수 없다면, 한번 부딪혀보자!”

    심협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마음을 다잡고는, 성큼성큼 걸어 금세 사찰 입구에 이르렀다.

    사찰의 대문은 매우 넓었고, 곧 떨어질 듯 낡은 문 두 짝이 비스듬히 걸린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문을 밀었으나, 흔들리기만 할 뿐 열리지는 않았다. 안에서 문을 잠근 모양이었다.

    심협이 다시 힘을 저 문을 밀려는데,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에 누가 오시었소?”

    이 말에 심협은 순간 심장이 멎을 뻔했다. 그러나 이내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귀신이 숨어 있고 많은 이들이 죽은 곳에 어째서 사람이 있단 말인가?

    당황한 심협은 귀소환을 꼭 쥔 채 대답하지 않았다.

    곧 사찰 안에서 발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대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는 이제 갓 약관을 넘긴 듯한, 황색 가사를 입은 승려가 서 있다.

    “시주께서는 이 늦은 밤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승려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심협을 살펴보고 물었다. 심협 또한 젊은 승려를 살폈는데, 귀신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사찰은 진즉 폐허가 되어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최근 이곳에 귀신이 깃들었다고 들었는데, 어찌 이곳에 계신 겝니까? 죽음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귀, 귀신이오? 소승은 어제 막 건업성에 도착하여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소이다!”

    심협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젊은 승려는 기겁했다.

    “저는 건업성 백가의 객경입니다. 관부의 명을 받고 이곳의 귀신을 처리하러 왔지요. 목숨을 보전하시려거든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선사님이셨군요. 그럼 두 분 사형을 모시고 바로 떠나겠습니다!”

    승려는 예를 갖추고는 뒤돌아 안으로 달려갔다.

    심협도 사찰로 들어갔다. 산 사람을 만나서인지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사찰 안으로는 광장 비슷한 공터와 진즉 말라버린 연못이 보였다. 천왕전(天王展)으로 향하는 큰길에는 각종 잡초가 잔뜩 자라 있었고, 양측의 종루(鍾樓)며 고루(鼓樓), 긴 복도 할 것 없이 반 이상은 무너져 있었다. 더 먼 곳은 잘 보이지 않았는데, 어렴풋이 보이는 처마와 건물 모퉁이들로 미루어 제법 넓은 사찰인 듯했다.

    심협은 입구에 잠시 멈춰 섰다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광장 앞에 선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귀신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귀신을 유인해내지? 일부러 소란스럽게 굴어서 주의를 끌어볼까?’

    그러나 심협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알려진 대로라면 영지가 깨어 있고 교활한 귀신이다. 그러니 자신이 함정을 팠다는 것이 발각되면 역습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의 방심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