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귀소환(鬼嘯環)
백수 도장은 멀어지는 심협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안색은 더없이 창백해 보였다.
“도…… 도장. 심협을…… 쫓을까요?”
아직 미련이 남은 것인지, 오동이 조용히 물었다.
“쫓아? 자네, 저 많은 소뢰부를 당해낼 수 있겠는가? 허!”
백수 도장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오동을 바라보며 면박을 줬다.
오동은 말문이 막히자 계면쩍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소뢰부를 저리 아낌없이 사용할 줄이야. 실로 대단하구나!”
“돈으로 거둔 성과일 뿐이지요.”
제원의 감탄에 연리는 코웃음을 쳤다.
“돈이 많은 것도 능력이지. 더구나 꼭 돈과 부적 덕이었다고만 볼 수도 없어. 저 사람의 표홀한 신법과 물 위를 걷는 술법만 해도 보통이 아니지. 어쨌거나 이곳의 임무는 이미 종결되었으니, 이만 돌아갈까?”
제원은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돌아섰다.
그러는 동안, 구양삼걸은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는데, 그들이 향하는 방향은 홍엽진 쪽은 아니었다.
여수하를 떠난 심협은 우선 홍엽진으로 가서 손 영감에게 귀신을 제거했음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손 영감은 극진히 모시겠다며 붙잡았으나, 심협은 정중히 거절하고 건업성으로 향했다.
혹시 모를 일이 생기지 않도록, 심협은 홍엽진을 나오자마자 사월보를 이용해 빠르게 달려나갔다.
그런데 얼마 달리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쳤다.
“헛!”
이번만큼은 심협도 크게 놀라, 발에 하얀 달그림자가 방출되었다. 그러자 심협의 몸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여러 개의 잔영을 이끌며 비스듬히 비켜 나갔다.
다음 순간, 칠팔 장 밖에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심협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는 낙뢰부가 한 장 들려 있었다. 그러나 막 부적을 사용하려던 그는 가까스로 멈췄다.
그 자리에는 백면서생이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구혼마면 선배셨군요.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심협은 들고 있던 낙뢰부를 내려놓으며 그답지 않게 투덜거렸다. 그만큼 놀랐던 것이다.
“어쩐지 벽곡기의 귀신과 직접 맞붙더라니. 과연 비장의 한 수가 있었군. 자네의 보법이 보통이 아닐세그려. 하하하!”
구혼마면은 심협이 손에 든 낙뢰부를 힐끗 보며 껄껄 웃었다.
“선배께서 먼저 와 계셨군요. 이 지역의 귀신을 쫓으러 오신 겁니까?”
심협은 헛웃음을 지으며, 낙뢰부를 눈 하나 깜짝 않고 챙겨 넣었다.
“이건 본래 내 임무였지. 허나 자네가 대신 수고를 해주었으니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었네.”
“선배님 대신 수고할 수 있다면야 제게는 영광이지요. 그런데 선배님, 근래 건업성 부근에 귀신이 자주 출몰하는 이유가 뭡니까?
구혼마면이 여유를 부리자, 심협은 따라서 미소를 짓다가 화제를 돌렸다.
“연유는 나도 잘 모르겠네. 다만 이미 이 사실을 보고했으니, 위에서 조사하는 중이지. 지금 당장 중요한 일은 이 귀신들을 쫓거나 없앰으로써 건업성의 안정을 지키는 일이네. 심협, 나를 도울 생각이 있느냐?”
구혼마면은 심협의 눈을 바라보며 돌연 엄숙해진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귀신을 물리치는 것은 백성과 건업성을 이롭게 하는 일이니, 물론 힘이 되어드리길 원합니다. 하지만 소뢰부는 아무리 많이 써봐야 잡귀신이나 죽일 수 있을 뿐인데…… 그런 잡귀신들이야 선배께서 손만 휘둘러도 물리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쓸모가 있을까요?”
“이놈 보게! 내 눈을 속이려는 게냐? 방금 네놈이 들고 있던 그 부적! 그게 소뢰부가 아니라는 걸 내 모를 줄 알았더냐?”
구혼마면은 심협을 노려보며 말했으나, 진짜로 화를 내는 기색은 아니었다.
심협은 멋쩍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방금 그 부적은 높은 경지의 뇌부(雷符)겠지? 번개의 힘으로 귀신을 상대할 수 있으니, 그 부적이면 충분히 도움이 될 게다.”
구혼마면이 결론 짓듯 말했다.
“저, 선배…… 사실대로 고하자면, 말씀하신 대로 이 낙뢰부는 위력이 상당합니다. 허나 제게는 고작 두 장이 전부라…… 선배님을 돕기는 어렵겠습니다.”
심협은 자신이 낙뢰부를 만들 줄 안다는 사실은 숨긴 채 길게 탄식했다.
“맹랑한 놈. 나와 흥정을 하려는 게냐? 좋아, 넘어가주지. 말해보아라. 내게 원하는 것이 있느냐?”
구혼마면은 무슨 꿍꿍이인지 안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심협은 ‘역시 들켰군’ 하는 표정으로 웃더니,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선배님께서는 저승에 몸담고 계시는 분이니, 분명 많은 보물을 가지고 계시겠지요. 그중 아무거나 하나만 주시면 됩니다. 이 후배는 그리 탐욕스러운 사람 아니니까요.”
심협은 다시금 씩 웃었다. 그 능글맞은 모습에 구혼마면은 끌 하고 혀를 차더니, 어디선가 손바닥만 한 검은 고리를 꺼내 던져주었다.
“약은 놈, 조금도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는구나! 내 보아하니 네놈에게 부적 몇 장 말고는 마땅한 부기 하나 없는 것 같던데, 이 귀소환(鬼嘯環)을 주마.”
심협이 급히 받아 들어 보니, 이 고리는 무엇으로 만든 것인지 그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무게는 상당했다. 받아 든 손에 재빨리 힘을 주지 않았더라면 떨어뜨릴 뻔했을 정도였다.
심협은 검은 고리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매우 고풍스러운 형태에 검은 빛을 발산했고, 자잘한 부적 문양이 새겨져 있었으나 부적은 보이지 않았다.
“귀소환은 내 여러 해 전에 우연히 얻은 부기다. 사실 부기라는 말은 적절치 않지. 정확히 말하자면, 반법기라 해야 할 게야.”
“반법기요?”
심협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법기가 무엇인지 아느냐?”
“금제를 담고 있는 부기라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구혼마면의 물음에 심협은 꿈속에서 마 파파가 알려준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렇다. 법기와 부기는 본질적으로 큰 차이는 없지. 그러나 부기는 재료의 수준이 떨어져 금제의 힘을 받아들일 수 없어. 하여, 부적을 붙여 그 힘으로 적을 상대하는 게지. 이 귀소환은 원래 법기를 만들고도 남을 만한, 벽곡기 귀신의 귀골(鬼骨)로 만든 것이야. 만든 자가 그대로 부적 문양을 새겨 넣었으니, 반법기가 된 셈이지.”
“그런 게 가능할 줄이야…… 반법기라니!”
심협은 구혼마면의 설명을 듣고는 충격을 받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무기 제작의 길은 실로 신비롭지. 네가 모르는 일이 훨씬 많을 게야. 아무튼 귀소환은 부적 문양이 새겨져 있는 관계로, 법기처럼 법력을 주입하여 사용하면 되네. 위력 또한 보통의 부기보다 한참 뛰어나지.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당연히 부기보다 법력이 많이 소모되네. 한번 시도해보게.”
기뻐하던 심협은 구혼마면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는 귀소환을 쥐고 법력을 주입시켰다.
귀소환의 표면에 검은 빛이 한 겹 일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심협은 이를 악물고는 더 많은 법력을 주입해보았다. 그제야 귀소환의 검은 빛이 더 밝아지더니, 그 무거운 귀소환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위잉!
기이한 소리가 울리더니, 귀소환의 검은 빛이 모여 검고 어슴푸레한 귀신의 머리를 이루었다. 크기가 거의 세숫대야만 했다.
심협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저 앞의 큰 단풍나무 방향을 향해 귀소환을 휘두르며 외쳤다.
“공격!”
그 순간, 귀신 머리가 입을 쩍 벌렸다.
“캬오오오!”
고막을 찢어발길 듯 날카로운 울음소리에 검고 어슴푸레한 음파(音波)가 귀신의 입에서 발사되었다.
이 음파는 형태가 없었지만, 날카로운 기운을 내뿜었다. 이에 음파가 지나는 곳마다 땅에는 깊은 흔적이 생겨났다.
음파는 순식간에 몇 장을 날아가 단풍나무를 맞췄다.
꽝!
굉음이 울렸고, 단풍나무가 크게 떨렸다. 검은 음파가 에워싼 범위 안에 있는 자잘한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모두 부서지듯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굵은 나무 기둥은 비록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껍질에 균열이 일면서 하얀 나무 속살이 드러났다. 그 안에도 여러 줄기의 가는 금이 가 있었다.
단풍나무는 굉음과 함께 흔들리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멈췄다.
이 광경에 심협은 놀랐지만 기뻤다.
귀소환은 이전의 작살 부기와 비교해, 사용하는 데 법력 소모가 몇 배는 컸다. 하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할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보물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력으로 선배님을 도와 건업성의 귀신을 물리치겠습니다.”
심협은 귀소환을 챙겨 넣으며 구혼마면에게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구혼마면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심협에게 던졌다.
급히 받아 보니, 검은색의 작은 패(牌)였다. 무언가의 뼈로 만든 것 같았는데, 하얀 부적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민첩하게 요동치는 빛을 발산해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전령법패(傳令法牌)라네. 지니고 다니게. 내 이것으로 연락할 것이니.”
구혼마면의 설명에 심협은 호기심이 생겼다. 방촌산에서 읽은 서적에 이런 물건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아주 먼 거리에서도 서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워낙 진기한 물건이라 백가나 춘추관에서도 본 적이 없는데, 구혼마면은 척하니 내놓았다. 실로 예상 밖이었다.
“어떻게 사용하는 겁니까?”
심협은 검은 패를 만지작거리다가 물었다.
“그건 알 필요 없네. 자네는 내 소식만 잘 받으면 돼.”
구혼마면의 퉁명스런 대답에 심협은 다소 실망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 관계를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되네. 자네에게 좋을 게 없어. 나를 도와 건업성의 귀신들을 소탕하고 나면, 다른 기연을 만들어주지.”
구혼마면의 진지한 목소리에 심협은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 마음 놓으십시오. 이 후배가 사리 분별은 할 수 있습니다.”
구혼마면은 말없이 고개를 까딱이고는 이내 사라져 버렸다.
심협은 다시 전령법패를 살펴보다가 잘 챙겨 넣고는, 지체 없이 건업성으로 향했다.
귀신이 들끓기 시작한 이후로 건업성은 해가 떨어지면 바로 성문을 닫아, 누구도 출입할 수 없었다. 거리에는 야간 통행금지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높은 담벼락 따위가 심협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어수지술(御水之術)로 물 밧줄을 만들어 가볍게 성벽을 넘어서는 백부로 돌아갔다.
심협은 백부 사람들이 모두 잠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장방에는 등불이 밝혀져 있었고, 임무를 맡은 객경(客卿)이 여럿 모여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절반가량은 울상을 짓고 있었고, 제법 큰 부상을 입은 이도 있었다. 아마도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자들이리라.
심협을 비꼬던 대머리 사내 초려 역시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하는데다가 표정이 어두운 것이, 심히 낭패한 모양새였다.
“초 도우, 유수촌(幽水村) 임무를 수행하러 가지 않았소? 그곳 귀신이 그리 대단했소? 어찌 이렇게 다친 게요?”
풍씨 청년 객경이 접선을 접으며 물었다.
“풍릉(馮陵), 말도 말게. 내 임씨 집안 철산에게 음해를 당했지 뭔가. 내가 악귀와 겨루던 틈을 타 그놈이 중산부(重山符) 부적으로 공격을 했다네. 그 때문에 임무도 빼앗기고, 부상까지 입었지.”
초려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성내지 마시오. 나도 오늘 임씨 집안 놈을 만났는데, 내 그놈들의 임무를 빼앗았소. 또한, 그들을 데리고 놀아줬으니, 그대 대신 복수한 셈 아니겠소?”
풍릉은 접선을 펼쳐 가볍게 흔들며 말했으나, 초려는 기분이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화를 냈다. 풍릉의 말은 초려를 낮춰 자신을 치켜세우는 것이었으니, 화를 낼 만도 했다.
그때, 사람들의 술렁거림이 뚝 그쳤다. 붉은 옷을 입은 절세 미모의 여인, 사우흔이 들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