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구양삼걸(歐陽三傑)
“저것들이 대형의 실력을 전혀 모르는군. 심 대형, 어째서 저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지 않는 것이오?”
백소운이 분을 삭이지 못하고 투덜댔으나, 심협은 평온했다.
“저들 말도 틀린 것이 없지 않소? 내 실력은 고작 연기 5층에 불과하니 객경들 사이에서 바닥 깔아주는 수준이 맞소. 심지어 오동보다도 낮으니…….”
“수련 수준이 뭐 대수라고! 심 대형의 부적술은 객경들 중 최고일 거요!”
백소운이 열을 올리며 말하자, 심협은 담담히 웃고 말았다. 백소운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만일 심협이 낙뢰부도 아끼지 않고 사용한다면, 벽곡기 수사(修士)는 물론이고 응혼기 수사와도 능히 겨룰 수 있을 터였다.
이 또한 심협이 객경들이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는 이유 중 하나였다. 꿈속에서 출규기의 요괴와도 결전을 치렀고, 지금은 낙뢰부까지 가지고 있다. 그런 만큼 그의 안목과 마음가짐은 다른 객경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쨌든, 심 대형이라도 저들 말대로 홍엽진 임무는 위험하긴 할 거요. 그 임무는 관부에서 반포한 것인데, 관부 사람들은 내용을 함부로 작성하지 않지.”
백소운이 걱정스러운 듯 말하자 그 호의가 고마워 심협은 웃었다.
“걱정할 것 없소. 다 방법이 있어서 그 임무를 맡겠다는 거니까.”
“역시, 내 심 대형이 대책 없이 일을 맡지 않으리라 믿었소!”
백소운은 심협의 자신 있는 표정을 보고는 계획이 있음을 눈치채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맞다! 임벽추 그놈이 얼마 전에 선옥 열다섯 개를 보내왔소. 여기 여덟 개요. 부디 심 대형께서 기쁘게 받아주시오.”
백소운은 퍼뜩 떠오른 듯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심협 앞에 놓았다. 주머니 안에는 선옥이 들어 있었다.
심협은 주머니를 바라보더니, 백소운에게 밀어주며 말했다.
“이 선옥은 그대가 임벽추와 내기를 하여 얻은 것인데 내가 어찌 받겠소?”
하지만 백소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날 심 대형이 나를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내 체면이 땅에 떨어졌을 것이오. 그러니 심 대형은 이 선옥을 받을 자격이 있소. 그래도 받지 않겠다면, 나를 친구로 여기지 않는 것으로 여기겠소!”
“아, 그럼 고맙게 받겠소.”
더 거절하다가는 백소운이 진짜로 화를 낼 것 같아 심협은 그렇게 대답했다.
“심 대형, 나는 이만 가보겠소. 이번에 대비를 잘해서 임무 꼭 성공하길 바라겠소!”
백소운은 작별을 고하고 자리를 떴다.
그를 배웅하고 돌아온 심협은 임무를 되뇌어본 후, 바로 떠날 채비를 했다.
심협은 임무를 완수할 자신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보지도 않았다. 사소한 실수로 일을 망친 사람들의 이야기는 잡서에서 수도 없이 봤으니까.
* * *
홍엽진은 건업성 남쪽 삼십 리쯤 떨어진 곳으로, 최대한 길을 서두르면 한 시진 만에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리 넓지 않아 규모는 춘추관 부근의 토집진과 비슷했으나, 훨씬 번화한 곳이었다. 이름처럼 안팎으로 단풍이 가득했는데, 때마침 늦가을이 한창이라 불꽃처럼 붉은 단풍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큰 강이 홍엽진 옆을 흐르고 있었다. 이 강의 이름은 여수하(麗水河)로 동해로 바로 통하는 강이자 건업성의 주요 수운 통로였다. 매일 수많은 선박이 이곳을 지나는 덕에 홍엽진이 이리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심협이 막 도착했을 때, 홍엽진에서는 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을 의 거리는 한산했고, 길 양측으로 가게들이 열려 있기는 했지만, 손님은 거의 없었다. 가게 주인들도 마음이 무거운 듯한 기색이었다.
마을의 분위기가 칙칙하고 무거웠다. 주인 없는 거리의 개와 고양이들도 신경이 곤두선 듯 다들 바삐 달려가 버렸다.
심협은 행인에게 길을 물어 마을 동편의 저택으로 직행했다. 하지만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럼에도 심협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쾅쾅쾅!
“누구요? 계속 귀찮게 구는 것이……. 안 그래도 힘든데 왜 이리 성가시게 하는 게요?”
대문이 열렸고,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걸어 나오다가 심협을 보고는 당황한 듯 멈칫했다.
“누, 누구시오?”
노인은 심협을 훑어보며 물었다.
“혹시 손 이장님이십니까? 저는 심협이라 합니다. 건업성 백가의 객경이지요. 임무를 받고 왔습니다.”
심협은 객경 영패를 노인 앞에 들어 보였다.
‘보아하니 홍엽진에는 내가 가장 먼저 온 모양이군.’
빨리 일을 해결해버리면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끌지 않을 수 있으리라.
“아이고, 백가의 객경이십니까? 드디어 오셨군요! 저는 성이 손 씨이니, 편하게 손 영감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심 선사, 얼른 들어오시지요! 하하하!”
노인은 기뻐하며 예를 갖추었다.
“이장님, 너무 예의 차리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귀신에 관한 일을 들어보고자 온 것뿐입니다.”
한데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다니, 별일이 다 있군!”
이어서 발소리가 울렸고, 심협이 돌아보니 멀리서부터 푸른 옷을 입은 남자 셋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허리에 걸린 푸른 영패가 시선을 끌었다. 녹색 나무 표기가 있는 녹색 영패. 바로 임씨 집안의 표기였다.
“오, 백가의 객경인가? 처음 보는 얼굴이군!”
세 남자 중 우두머리인 듯한, 왜소하고 추한 남자가 심협을 훑어보며 말했다.
나머지 두 사람 중 한 명은 키가 작고 뚱뚱했으며, 다른 한 명은 곱사등이였다. 이상하리만치 못생긴 세 사람은 얼굴이 서로 닮은 것이, 친형제인 듯했다.
“백가의 객경, 심협입니다.”
심협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심협? 들어본 이름 같은데? 아! 생각났다. 최근 백가에 장손 백소천의 하인 같은 놈 하나가 객경으로 들어갔다더니, 그게 바로 너구나.”
깡마르고 못생긴 사내가 경멸스럽다는 듯 비꼬았다.
“크크크. 바닥이나 깔아주는 놈이 감히 이런 임무를 받겠다고 오다니……. 왜? 살기가 무료해서 죽고 싶어진 게냐? 하하하!”
작고 뚱뚱한 추남도 곁눈으로 심협을 바라보며 무례하게 웃었다.
심협은 불쾌함에 눈을 가늘게 떴다. 백부에서 다른 객경들이 자신을 폄하할 때에도 개의치는 않았지만, 거북한 감정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이들마저 자신을 우습게보다니, 화가 나지 않는다면 보살이리라.
“이놈아, 이번 홍엽진 임무는 우리 구양삼걸(歐陽三傑)이 수행할 것이다.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거든 썩 꺼져라!”
깡마른 추남이 손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우리 큰형이 꺼지라는데, 귀라도 먹은 것이냐?”
심협이 미동도 않자, 곱사등이 추남이 흉악하게 손을 들었다. 그러자 손에서 녹색 빛이 나타나 순식간에 호랑이 앞발의 환영이 되었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심협의 앞까지 다가왔는데, 놀랄 만큼 빠른 속도였다.
환영은 심협의 얼굴을 매섭게 움켜쥐려 했다.
하지만 환영이 떨어지기도 전에, 심협이 좌우로 몸을 흔들었다. 그러자 양발에 하얀 빛이 번득였고, 그의 몸은 네다섯 개의 잔영이 되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세 추남 앞에 이르러 있었다.
“헉!”
심협의 신법이 이리도 빠를 것이라 예상치 못했던 세 사람은 경악했다. 하지만 그들도 보통은 아니었다. 몸 표면에 바로 짙푸른 빛이 일더니 어렴풋한 호랑이 환영을 이루어갔다.
하지만 호랑이 환영이 완전히 형성되기도 전에 심협의 소매에서 번갯빛이 번득였다. 동시에 세 줄기의 하얀 번개가 뻗어 나왔다. 눈이 부시게 하얀 번개들은 그야말로 번개 같은 속도로 세 사람을 향해 하나씩 날아갔다.
콰르릉!
마치 천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세 사람의 몸을 보호하던 호랑이 환영은 눈부신 번갯빛에 그대로 무너져 사라졌다. 그러고도 남은 번갯빛이 계속해서 뻗어오자, 세 추남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때, 심협의 오른손이 번개를 따라 두 배로 커지지면서 허공에 반원을 그렸다. 동시에 매서운 장풍과 함께 심협의 손이 강하게 내리쳤다.
펑! 펑! 펑!
세 사람은 마치 광풍에 휩쓸리는 낙엽처럼 뒤로 날아가 매섭게 땅에 꽂혔다.
“크윽!”
“너…….”
깡마른 추남이 일어나려 했지만, 가슴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뼈가 부러진 듯한 통증이었다. 다른 둘도 비슷한 상태였다.
이제 심협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눈에는 경악과 두려움이 스쳤다.
반면, 심협은 태연자약했다. 그러나 사실 속으로는 매우 기뻐하고 있었다.
최근 한 달여 동안, 그는 무명공법과 사월보의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더욱이 꿈속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련의 성과가 더욱 커졌다.
저 세 사람 중 수련 경지로 따지자면 심협보다 낮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속도는 심협보다 한참 뒤처졌다. 여기에 소뢰부까지 사용했으니 승부는 이미 결정된 바였다.
심협은 실전 경험이 너무 부족하여 내심 걱정이었다. 그런데 지금 임씨 집안 객경들을 상대로 실력을 발휘해보니 자신감이 생겼다.
“손 이장님, 최근 귀신이 어디서 일을 벌이는지 아십니까?”
심협은 손을 털며, 넋이 나가 있는 노인에게 물었다. 세 추남에 대해서는 티끌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 네! 물론입죠! 마을 밖 백로탕(白蘆蕩) 일대입니다. 밤만 되면 강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지나는 배를 습격합니다. 이미 여럿이 다치고 피해를 입었습죠. 이제 저녁에는 아무도 배를 몰지 않습니다. 낮 장사도 영향을 크게 받았죠.”
노인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우울한 표정으로 답했다.
심협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녁에만 나타난다, 이겁니까? 이장님, 안심하십시오. 이 일은 저희 백가에서 잘 처리할 것입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심 선사님.”
노인은 멀리서 이제 막 몸을 일으키는 세 추남을 힐긋 곁눈질하고는 심협을 향해 친절하게 공수하며 말했다.
심협은 백로탕의 위치를 묻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
“큰형, 우리도 따라갈까요?”
곱사등이 추남이 나지막이 물었다.
“고작 연기 중기 밖에 안 된 놈의 신법이 이리도 빠르다고? 저놈이 무슨 사악한 수법을 익힌 게 분명해!”
작고 뚱뚱한 추남이 아픈 등을 어루만지며 투덜댔다.
“흥! 이번에 우리가 저놈을 방비하지 못해서 당한 것뿐이지! 다시 붙을 때는 다들 잘 방비하고 있다가 민첩하게 움직여야 한다. 어서 따라가자!”
깡마른 추남은 그렇게 말하며 차갑게 코웃음 쳤다.
마을을 나선 심협은 금세 여수하 근처에 이르렀다.
여수하는 매우 광활했다. 너비가 족히 몇 리는 되었는데, 하류로 갈수록 구불구불했다. 물안개가 자욱하고, 물이 거세게 흘러, 땅을 기어가는 거대한 용처럼 보였다.
끊임없이 흐르는 강을 따라 하류로 걷다 보니 곧 갈대 늪이 나타났다. 너비는 칠팔 리 정도로, 그리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갈대는 이상할 정도로 길고, 빽빽했으며, 누렇게 말라 있었다.
솨아아!
강바람이 불자, 갈대는 마치 물결처럼 요동쳤다.
해가 지면서 강 수면으로 노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배는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귀신 때문에 두려워서 나오지 않는 것이리라.
심협은 사방을 둘러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답수결을 사용해 갈대 늪 안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음기의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심협은 포기하지 않고, 몸에 구귀부를 붙인 채 사방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보아하니 이 귀신이 꽤 깊숙이 숨어 있는 모양이군.’
심협은 그렇게 생각하며 강에서 나왔고, 강가에 마른 곳을 찾아 가부좌를 틀었다. 해가 지기를 조용히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그때, 멀리서부터 발소리가 들려왔다. 곁눈으로 보니, 임씨 집안의 세 객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두머리인 깡마른 추남은 심협과 눈이 마주쳤으나, 말없이 두 형제와 함께 빙 돌아서 지나가더니 갈대 늪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심협 역시 그들에게는 신경 쓰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고 수양했다.
잠시 후, 세 사람이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오더니 심협에게서 약간 떨어진 강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