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45화 (145/1,214)
  • 145화. 새로운 내기

    백소운은 순간 싸늘하게 변한 눈으로 임벽추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 눈빛과 기세에 놀란 임벽추는 애써 침착한 척 내뱉었다.

    “네, 네놈이 오늘 비둔부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내기에 진 것이니 선옥 다섯 개를 주던가, 아니며 나를 큰형이라고 불러라. 내 집안 동생들에게 줄곧 잘해줬으니 네게도 잘해주지.”

    “큰형? 네놈 주제에 내 큰형 자리가 가당키나 하겠느냐?”

    백소운은 임벽추의 말에 더욱 분노하여 말했다.

    “백소운, 이제 와서 발뺌할 셈이냐? 이건 너와 임벽추의 내기가 아니었더냐! 약속대로 비둔부를 내놓으면 임벽추가 패배를 인정할 것 아닌가!”

    두안이 웃으며 거들었다. 그냥 듣기에는 옳은 말 같았지만, 사실은 은근히 임벽추 편을 들어, 백소운에게 패배를 인정하도록 몰아세우는 말이었다.

    백소운은 두안을 노려보았으나, 속으로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저런 머저리 같은 놈들의 말에 자극을 받아 섣불리 내기를 한 대가가 너무 컸다.

    백소운이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그때, 누군가가 근처 건물 지붕 위에서 뛰어내려, 주변에 있던 호종들이 대응하기도 전에 백소운 옆에 섰다.

    호종들은 크게 놀라 급히 그자를 둘러싸면서 임벽추와 두안을 보호하려 했다.

    백소운이 돌아보니, 푸른 옷을 입은 수려한 용모의 청년, 심협이 서 있었다.

    “겁낼 것 없네. 우리 집안의 객경(客卿)이네.”

    백소운은 어쩐지 마음이 놓여, 임벽추 등에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백 공자, 너무 빨리 가시는 바람에 바로 따라오지 못했습니다.”

    심협은 의아해하는 백소운에게 눈짓을 해보이고는 웃으며 말했다. 사실 그는 백소운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뒤를 따라나섰고, 이후의 일을 모두 지켜보았다.

    “내 그저 바람 좀 쐬러 나온 것이네. 마침 돌아가려던 참이었지.”

    백소운은 의아해하면서도 얼버무리듯 말했다.

    “백소운, 대충 넘어가려는 것이냐? 내기할 때의 맹세는 없었던 일로 하려는 게야? 그래, 뭐 너희 집 객경이 너를 따라왔다니 네놈을 어찌할 수는 없겠지.”

    임벽추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비꼬듯 말했다.

    “선옥이 아까우면 그저 형님이라고 부르면 될 것 아닌가? 하하하!”

    두안이 옆에서 거들었다.

    심협은 백소운이 화를 내려 하자, 성큼 나아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걱정할 것 없소. 저들이 놀고 싶어 하는 듯하니, 그리 해줍시다.”

    백소운은 실로 의아했으나, 무슨 뜻인지 묻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심협을 보니 안심이 됐다. 문득 예전 일이 떠올라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저희 공자께서 선옥 따위를 아까워하시겠소? 오히려 이런 소소한 내기가 재미없다 여기신 것뿐이오. 차라리 판을 더 키운다면 모를까…….”

    심협이 말끝을 흐리자 임벽추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판을 키운다니, 무슨 말이오? 설마 더 큰 것을 걸고 내기를 하자는 거요?”

    옆에서 지켜보던 두안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제 보니 허장성세로 내기를 없던 일로 만들 속셈인 모양이군? 어림도 없지! 그래, 어느 정도로 판을 키우자는 거요?”

    심협은 슬쩍 미소를 짓더니 두 손가락을 펼치며 말했다.

    “선옥 스무 개 어떻소? 아니면 진 쪽이 상대를 만날 때마다 큰형님으로 부르는 거요. 과연 받아들일 수 있겠소?”

    정작 그 말에 가장 크게 놀란 것은 백소운이었다. 선옥 다섯 개는 어떻게든 가능하겠지만, 스무 개는 자신으로서는 절대 마련할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시, 심 대…….”

    백소운은 심협을 말리려다가 입을 닫았다. 임벽추와 두안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던 것이다. 다만 당황한 표정까지 완벽히 숨기지는 못했다.

    “선옥 스무 개?”

    임벽추도 놀란 듯했다.

    “그렇소. 물론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저희도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심협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임벽추가 버럭 화를 냈다.

    “무슨 소리! 누가 못하겠다고 했소? 그러나 백소운은 지난번 내기에서 선옥 다섯 개를 주거나 큰형이라 부르기로 했소. 한데 이제 선옥 스무 개를 걸기로 했으니, 선옥을 내놓지 못한다면 단지 나를 큰형이라 부르는 것으로는 부족하지. 여기에 더해 두안을 둘째 형이라 부르시오. 만일 그쪽이 이긴다면, 선옥 스무 개는 나와 두안이 각각 반씩 부담하겠소.”

    그 말에 두안이 눈에 띄게 당황하더니 임벽추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임벽추, 나…… 선옥 열 개는 없는데…….”

    “생각이라는 걸 좀 해! 보면 몰라? 저거 다 우리를 당황시켜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는 거잖아!”

    “그렇군! 백소운이 우리에게 선옥을 주고 싶어 안달이 났는데, 그럼 우리도 받아줘야지.”

    임벽추와 두안은 딴에는 조용히 말했으나, 오감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심협의 귀에는 생생하게 들렸다.

    “자, 이제 조건이 정해졌으니, 어서 비둔부를 보여주시오!”

    임벽추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심 대협, 아버지께 비둔부를 빌려온 거요?”

    백소운은 심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옆으로 다가와 나지막이 물었다. 자신의 부친이 그 귀한 부적을 외부인에게 빌려주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심협은 대답 대신 소매에서 자색 부적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보았소? 이것이 백가의 비둔부요. 내 가주의 명을 받들어, 감히 백가를 우습게 본 자들의 어리석음을 일깨워주고자 가지고 온 것이오!”

    심협은 그렇게 말하더니 백소운에게 양손으로 공손하게 부적을 건넸다.

    “아버지께서…….”

    백소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양손을 떨면서 어색하게 부적을 받아 들었다.

    한편, 임벽추와 두안은 눈에 띄게 긴장한 눈으로 부적을 바라보았다.

    “그, 그대가 비둔부라 하면 비둔부가 되는 거요? 그 부적이 비둔부인지 어찌 증명할 것이오?”

    임벽추가 나름 근엄한 목소리로 질책하듯 외쳤다.

    “두 분도 높은 경지의 부적은 그에 맞는 부적지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계시겠지요? 그렇다면 이 비둔부가 자운지로 만들어졌다는 것도 아실 것 아닙니까. 또한, 부적 문양에 담긴 영기도 알아보실 수 있지 않소?”

    심협은 미리 예상이라도 한 듯 태연하게 답했다.

    “물론 자운지는 알아볼 수 있소. 그 부적이 평범한 부적이 아니라는 것도 알겠고……. 그렇다고 그게 비둔부라는 증거는 아니지 않소?”

    “맞소! 그 부적의 위력을 직접 보여줘야 믿을 수 있소!”

    임벽추가 코웃음을 치자, 두안이 긴장된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건 안 되지! 그랬다가는 부적의 영기도 소모되는데, 그 손실을 너희가 물어낼 수 있겠느냐? 애초에 내기에서도 비둔부를 보여준다고 했지, 직접 사용한다고는 하지 않았음을 잊었느냐!”

    백소운이 바로 반박하자 임벽추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내 결심한 듯 이를 악물고 이야기했다.

    “내 배상하지! 그게 비둔부라는 걸 증명할 수 있다면, 내 선옥 다섯 개를 더 얹어주겠네.”

    “흥! 네놈은 선옥 몇 개 지불하는 것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지만, 나는 이 부적을 쓰는 게 아깝다! 차라리 이쯤에서 내기를 그만두는 게 어떠냐?”

    백소운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는 이 부적이 비둔부라고 철석같이 믿는 것인지, 부적을 사용하는 것만은 피하려 했다.

    심협은 백소운에게 내심 감탄했다. 비록 백소운이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성급한 내기를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의 경중은 따질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백소운이 내놓은 이 절충안이 오히려 임벽추와 두안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고작 객경(客卿)에 불과한 자가 백가의 보물인 비둔부를 가지고 왔다는 것부터가 의심스러운 마당에 백소운이 내기를 없던 일로 치려 하자 저 비둔부는 분명 가짜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왜? 막상 이렇게 되니 겁이 나는 모양이지? 증명해 보이지 못하겠다면 패배를 인정하던가.”

    두안은 좀 전까지의 긴장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헤벌쭉 웃었고, 임벽추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눈빛으로 백소운을 도발하고 있었다.

    최후의 수단이라 여겼던 위협이 통하지 않자 긴장한 백소운을 보며 심협이 웃었다.

    “백 공자, 한번 보여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쨌든 가주께서 제 손에 부적을 들려 보내셨으니, 이는 공자가 한 번쯤 사용해도 좋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이 부적이 귀하기는 하나, 한 번 사용에 선옥 스물다섯 개라면 그리 손해 보는 것도 아니지요.”

    그 말에 백소운은 잠시 고민하더니 마음을 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그리 합시다. 임벽추, 두안! 눈 똑바로 뜨고 보거라.”

    그때, 심협이 앞으로 나가더니 한 손으로는 비행부를, 다른 한 손으로는 백소운의 손목을 잡으며 짧게 외쳤다.

    “가자!”

    그러자 부적에서 푸른 빛이 솟아나 심협과 백소운을 에워쌌다. 그리고 곧 두 사람은 땅에서 떠오르더니, 마치 신선이 바람을 타고 날 듯 순식간에 저 멀리 빠르게 날아갔다.

    백소운은 자신의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이어서 귓가에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오고 두 눈에는 질풍으로 시야가 흐릿해졌다. 하지만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상쾌함이 느껴졌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건업성이 펼쳐졌다. 저 멀리, 웅장한 성벽도 아득하여 작게 보였다.

    심협은 백소운과 달리 경치를 구경하지 않고, 비행부의 영기 소모와 비행 속도의 변화를 세세히 감지하고 있었다.

    이전에 꿈속에서 비행부를 사용해본 적이 있지만, 그때는 수련이 출규기에 이른 상태였다. 연기기 수사(修士)로서는 처음 사용하는 것인데, 부적의 효과는 별 차이가 없었고, 법력의 소모도 능히 감당할 만한 수준이었다.

    한편, 임벽추 등은 거의 넋이 나간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정말로…… 비둔부를 가지고 왔다니…….”

    두안이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임벽추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무려 열다섯 개의 선옥을 내놓아야 하는데, 그가 아무리 세가의 자제라 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때, 하늘에서 푸른 빛과 함께 심협과 백소운이 두 사람 앞에 내려섰다.

    백소운의 손에는 음식 담는 합이 들려 있었는데, 그 안에는 정교한 떡 여섯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백소운은 웃으며 말했다.

    “너희가 또 속임수를 썼다고 할까 봐, 내 특별히 성 동쪽에 있는 청월재에 가서 그곳에서만 파는 계화꽃떡을 사 왔네. 맛 좀 보겠나?”

    “자네가 이겼네.”

    임벽추는 전혀 발뺌하지 않고 말했다.

    “하하, 알았으면 됐네. 앞으로 나를 큰형이라 부르게.”

    백소운은 모처럼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임벽추는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미약하고 어색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옆이었다.

    “큰…… 큰형.”

    두안은 선옥을 내놓느니 차라리 잠시의 굴욕을 선택한 것이다.

    “하하하! 그래, 둘째 동생. 좋네, 좋아. 임벽추, 네가 두안보다 한 발 늦었으니 셋째가 되어야겠구나. 하하하!”

    백소운은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져 크게 웃으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림없는 소리! 내 지금 선옥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며칠 뒤에 가져다주마!”

    임벽추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백소운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기쁜 표정으로 심협을 바라보았다.

    “심 대형 말이 맞았소. 이 두 녀석의 반응은 대형이 예상한 것 그대로요.”

    심협은 두안과 임벽추의 언행으로 두 사람의 성격을 대략 파악했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백소운의 말에 임벽추와 두안의 시선이 심협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눈빛에는 분노가 가득했는데, 임벽추는 그 기색을 그대로 드러냈고, 두안은 최대한 감추었다.

    “임 공자, 문서로 증거를 남겨 주시지요.”

    심협은 그들의 반응을 개의치 않고, 웃으며 붓과 먹을 꺼내 건넸다.

    그 순간, 임벽추의 눈빛에 더욱 강렬한 분노가 스쳤고, 두안은 원망스럽다는 듯 임벽추를 힐끔거렸다.

    백소운은 그들 몰래 심협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임벽추는 계화꽃떡이 담긴 합을 밑에 받친 채 각서를 쓰고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고 호종들을 이끌고 자리를 떴다.

    “크…… 큰형, 나도 먼저 가보겠소.”

    두안은 백소운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하고는, 뒤돌아 도망치듯 달려갔다.

    백소운은 두 사람이 낙심한 채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더없이 통쾌했다.

    “심 대형, 내 이제 대형에게 완전히 탄복하였소!”

    그는 심협을 돌아보며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심협은 심각한 얼굴로 백소운을 끌고 비행부를 사용해 허공을 날아 멀리 가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심협과 백소운이 떠난 자리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창백한 피부에 잿빛 옷을 입은 노인, 바로 임씨 집안의 노응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