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44화 (144/1,214)
  • 144화. 둘째 도련님의 내기

    백강풍의 거처. 심협과 백강풍이 나이를 잊은 벗이라도 된 것처럼 돌 탁자에 마주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주전자가 있었다.

    이들은 부적술에 대한 깨달음을 논하는 중이었다.

    “천하의 뇌법(雷法) 정종(正宗)은 모두 장천사(張天師)에게 기원을 두고 있지요. 이 소뢰부가 뇌(雷) 속성 부적이기는 하나 오뢰정법(五雷正法)에 들지 못하니, 정통이 아닌 방계(傍系)에 속합니다. 그러니 제아무리 좋은 부적지와 부적용 먹으로 쓴다 해도 위력은 그리 강해지지 않지요.”

    심협은 앞에 놓인 소뢰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부적의 위력이 부족하기는 하나, 보통의 재료로도 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쓰기 쉽다는 장점이 있네. 그러니 여간한 귀신을 상대하는 데 좋지. 소뢰부 쓰는 법을 알려준 것만으로도 내 매우 고마워하고 있네.”

    백강풍이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께서 가르쳐주신 청심부(淸心符)야말로 귀신이나 요괴에게 당해 길을 헤매게 되는 날이 오면 제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게다가 선배께서 저를 위해 수련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셨으니,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심협이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하자 백강풍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뭘……. 그나저나 소천이 그놈이 자네의 반만큼만 성실하면 좋겠네. 내 지난날 그놈을 너무 풀어주었어.”

    “선배님의 말씀에 제가 다 뜨끔해집니다. 제가 만일 백 형과 같은 자질을 지녔다면 이리 열심히 수련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여태껏 수련 경지가 오르지 않는 일도 없었겠지요.”

    심협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조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내 자네의 심성을 높이 산다네. 본심을 잘 지키고, 외부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면, 자네는 언젠가 큰 인물이 될 것이야.”

    백강풍의 표정은 무척 진지했다.

    둘이 더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불청객이 나타났다. 무슨 일인지, 백소운이 들어온 것이다. 그는 품에 자단목으로 된 목합을 안고 있었다.

    “셋째 할아버지를 뵈옵니다. 어, 심 대형도 계셨군요?”

    백소운은 심협을 보고는 의외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 말에 더욱 놀란 것은 백강풍이었다.

    “운아, 너 괜찮은 게냐? 내 여태껏 네가 소천이 외의 다른 사람을 형이라 칭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는데, 어쩐 일이더냐?”

    백강풍이 농을 건네자 백소운은 장난스럽게 웃을 뿐, 답은 하지 않았다.

    “네 형보다도 자유분방한 놈이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백강풍은 타박하듯 말하면서도 손짓으로 백소운을 자신의 옆에 앉게 했다.

    백소운은 바로 뛰어오더니, 짐짓 아부하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물론 셋째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뵈러 왔지요. 오는 김에 운무산에서 난 찻잎도 가지고 왔습니다.”

    백강풍은 백소운이 가지고 온 목합을 받아 열더니 검푸른 찻잎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고는 표정이 달라졌다.

    “정말 좋은 차로구나! 걱정이로군. 네놈이 이리 신경을 쓴 것을 보아하니 어려운 일을 부탁하려는 게 분명하지 않느냐. 허허허.”

    백강풍은 찻잎을 내려놓고 웃으며 말했다.

    “역시 셋째 할아버지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 손자를 손바닥 위에 두고 계시는군요!”

    백소운은 과장되게 놀라는 척을 했다. 옆에서 그 과장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협으로서는 실로 눈 뜨고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할 말이 있으면 얼른 해보아라. 네놈이 찻잎을 가지고 온 정성을 봐서라도 내 어지간한 일이라면 수수방관하지는 않으마.”

    백강풍은 백소운의 아부를 견디기 힘든 듯 그렇게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제가 며칠 전 임벽추(林璧秋), 두안(杜安) 두 사람과 내기를 했는데, 그들에게 우리 집안의 비둔…….”

    백소운은 말을 하다 말고 심협을 바라봤다.

    “심협은 우리 집안의 객경(客卿)이니 그냥 말해도 된다.”

    백강풍이 덤덤하게 말하자 백소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냉큼 입을 열었다.

    “제가 우리 집안 비술인 비둔부의 비범함이 실로 놀랍다고 했건만, 그 두 놈이 저를 믿기는커녕 이런저런 말로 저를 자극하지 뭡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언젠가 비둔부의 위력을 보여주겠노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이놈들이 계속 재촉을 해대는 통에 아버지께 빌리러 갔었는데…… 서재에서 쫓겨났습니다.”

    백소운은 울상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내게 가주를 설득해 비둔부를 빌려달라는 것이냐?”

    백강풍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심하다는 듯 물었다.

    “네, 네. 셋째 할아버지, 저 대신 말씀 좀 해주십…….”

    백소운은 병아리가 모이를 쪼듯 고개를 끄덕여댔지만, 도중에 백강풍의 질책에 말이 끊기고 말았다.

    “미친놈! 비둔부가 무엇인지 네놈이 모른단 말이냐? 조상께서 겨우 세 장만 물려주신 것임을 모르느냔 말이다. 한 장은 네 형이 목숨을 보전하는 데 썼고, 화생사에 가면서 한 장을 가져갔으니, 이제 집안에 남은 것이라고는 한 장뿐이다! 한데 그걸 들고나가서 과시하겠다고? 가주가 네놈의 주둥이를 찢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줄 알거라!”

    백강풍은 크게 노하여 꾸짖었다.

    “셋째 할아버지, 저, 저는 그냥…… 가서 보여주기만 할 것입니다. 보여주기만 하고 다시 가지고 올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제가 미덥지 않으시다면, 숨어서 지켜보셔도 좋습니다. 다만 비둔부를 가져가지 않으면…… 저는 임벽추 그놈을 큰형님으로 모셔야 한단 말입니다.”

    백소운의 목소리는 점점 간절해졌다.

    “네놈이 헛짓거리를 한 것도 모자라서 나더러 숨어서 지켜보라고? 그 미친 짓에 집안까지 끌어들이다니, 제정신인 게냐? 분명 소천이와 동복형제이거늘, 어찌 이리 다른 것이냐!”

    백강풍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소운이 백소천처럼 잘 크지 못한 것이 한스러운 듯했다.

    백소운은 그 말에 표정이 어두워졌고, 목소리도 풀이 죽었다.

    “저라고 어찌 형처럼 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형과 같은 자질을 타고나지 못했으니……. 죄송합니다.”

    그는 그 말을 남기고는 조용히 일어나 떠나갔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풀이 죽어 있는 그 쓸쓸한 뒷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백강풍은 그를 불렀다.

    “소운아…….”

    그러나 백소운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그대로 대문을 나섰다.

    “사실 소운이도 어릴 때 자질이 괜찮았다네. 그런데 한차례 변고가 생겨 음험한 것이 몸에 드는 바람에 수련의 근본이 망가졌지.”

    백강풍은 그 말을 끝으로 한참이나 회상에 잠겼다. 그리고 이 말을 들은 심협의 표정은 다소 미묘했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 * *

    백부 대문 앞. 백소운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아, 평소 자신을 따르는 두 호종도 물러가도록 하고는 혼자 마차에 올라 건업성에서 가장 큰 도박장인 운래방(運來坊)으로 향했다. 그는 도박을 즐기지는 않지만, 가끔 울적할 때면 그곳에 가서 기분을 풀고 오곤 했다.

    그런데 일이 안 풀려도 이렇게 안 풀릴 수가 있는 것일까?

    백소운은 운래방에 도착하여 마차의 장막을 거두었을 때, 저 너머 탁자 앞에 서 있는 청년을 발견했다. 머리에 옥관(玉冠)을 쓰고, 자색 비단 옷을 입은 청년이었다. 외모는 준수했지만, 코끝에 나 있는 검은 사마귀가 그 준수함을 해치고 있었다.

    청년은 양손에 도박패 두 개를 얼굴 바로 앞까지 들고 있었다. 한쪽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는 표정이 흥분으로 가득했다.

    그의 뒤에는 청색 원령포를 입은 둥근 얼굴의 뚱뚱한 청년이 서 있었는데, 이마 언저리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도 얼굴을 가까이 대고는 자색 옷의 청년이 든 패를 보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는 검은 옷을 입은 일고여덟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하나같이 용맹해 보이는 것이, 무공이 뛰어난 호종들이 틀림없었다.

    ‘정말 재수가 없군! 하필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저 두 놈을 여기서 보게 되다니!’

    백소운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얼른 장막을 다시 내리고, 방향을 돌려 자리를 떴다.

    그런데 그가 장막에서 손을 거두기 직전에 둥근 얼굴의 청년이 그럴 발견했다.

    “어라? 백소운?”

    청년의 목소리가 크지는 않았건만, 백소운은 귓가로 파고드는 그 목소리에 닭살이 돋는 것만 같았다. 그는 얼른 걸음을 재촉했다.

    “뭐? 백소운이라고?”

    자색 비단옷을 입은 청년도 방금 전까지 그렇게 집중하던 도박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패를 내려놓고는 백소운이 사라진 방향으로 서둘러 갔다. 둥근 얼굴의 청년과 호종들이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들이 도박장을 나섰을 때, 백소운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두안, 네가 잘못 본 거 아냐? 정말 백소운이었어?”

    자색 옷의 청년은 이리저리 둘러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임벽추, 내 절대 잘못 본 것이 아니야. 정말 그놈이었어.”

    둥근 얼굴의 청년, 두안이 바로 대답했다.

    “이놈이 며칠째 우리를 피해 다니는 건 분명 내기 때문일 게야. 도망치게 두지 말고 흩어져서 찾아보자고.”

    자색 옷을 입은 청년, 임벽추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뒤에 서 있던 호종들은 바로 대답하더니 흩어져 백소운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리 흩어져 찾을 필요 없네.”

    어디선가 나이 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사람들 틈에서 잿빛 장포를 입은 노인이 걸어 나와 그들 앞에 섰다. 눈은 움푹 꺼져 있었고, 콧대는 높았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마르고 날카로웠으며, 피부는 병이라도 있는 것처럼 창백했다.

    “노응(盧鷹) 장로, 여긴 어찌 오셨소?”

    임벽추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최근 건업성이 태평하지 못하여 도련님의 부친께서 저를 몰래 보내 보호하도록 하셨소. 그 백가 놈을 찾으려면 봉로항(蓬蘆巷) 방향으로 가보시오.”

    노응은 멀리 보이는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알겠소. 노 장로, 고맙소.”

    임벽추는 씩 웃으며 바로 사람들을 이끌고 백소운을 쫓아갔다.

    노응은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군중들 사이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 * *

    봉로항. 백소운은 애꿎은 돌멩이를 걷어차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연 고개를 들어보고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고, 뒤로는 임벽추 등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백소운, 이제야 만나는구나. 요 며칠간 왜 나를 피해 다닌 것이냐?”

    임벽추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너를 피해 다녀? 네놈이 뭐가 두렵다고 내가 피해 다녔다는 것이냐?”

    백소운은 일부러 놀라는 척하며 말했다.

    “너…….”

    임벽추는 순간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

    “백소운! 네놈이 전에 임벽추와 한 내기를 잊은 건 아니겠지? 비둔부를 가지고 와 보여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설마, 비둔부가 없는 거냐? 하하하!”

    두안이 키득거리며 물었다.

    “잊기는 뭘 잊어? 내 분명 네놈들 안목 좀 키워주기로 했지.”

    백소운은 곤란해지자 속으로는 욕을 퍼부으면서도 태연한 척했다.

    “흥! 잊지 않았으면 됐지. 두안, 그때 저놈이 뭐라고 했더라?”

    임벽추는 마치 기억이 나지 않는 척하며 물었다.

    “그때 백소운이 분명 다음에 만날 때 우리에게 비둔부를 보여준다고 했지.”

    두안은 ‘다음에 만날 때’와 ‘보여준다’에 힘을 실어 답했다.

    “지금이 그 ‘다음’인 것 같은데……. 백소운, 비둔부를 가지고 왔겠지? 네 말대로 우리 안목 좀 키워주지 그래?”

    임벽추는 마치 맡겨 놓은 물건이라도 찾듯, 손을 내밀며 말했다.

    백소운은 태연한 척했으나, 머릿속으로는 어찌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바빴다.

    그가 대답이 없자 임벽추는 대놓고 비웃었다.

    “백소운, 너희 집안에 그런 부적은 아예 없는 것 아니냐? 아니면 네놈이 너희 집안에서 뭣도 아니라서 그런 부적은 함부로 가지고 올 수도 없는 건가?”

    이 말은 비수처럼 백소운의 가슴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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