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백소운과의 재회
심협이 녹보당 안으로 들어서자, 굵고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백소운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주인장, 뛰어난 자는 세상일을 잘 파악하는 법이라지 않소. 둘째 도련님 뒤에는 명성이 자자한 건업성 백가가 있소. 그분과 연이 닿고 싶어도 방법을 찾지 못하는 여인이 부지기수인데, 이리 호의를 몰라봐서야 되겠소?”
이어서 젊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소운이었다.
“마 영감, 내 이리 여러 번 직접 찾아왔는데도 내 성의도 알아보지 못하겠소? 내 정말 수수 낭자를 마음에 두고 있건만, 어찌 이러는 게요?”
“백 공자께서는 지체 높은 집안의 자제이시니 저희가 어찌 넘볼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제 딸은 아직 혼인할 나이가 되지 않았으니, 무리하게 요구하지 마십시오. 혹시 백 대공자께서 아시게 되면 어쩌시려는 겝니까?”
주인장은 애원하듯 말했다.
“내 형님을 들먹여 나를 겁박할 생각 마시오! 형은 이미 건업성을 떠났소. 이번에는 누가 내 일에 간섭하나 한번 봐야겠군.”
백소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심협은 문턱을 넘어섰다.
“둘째 공자님, 형이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리도 급히 오셨소? 참으로 정이 남다르십니다!”
심협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마치 친구에게 인사하듯 말을 건네고는 주위를 훑어보았다. 주인장은 계산대 뒤에서 얼굴을 붉힌 채 딸을 보호하고 있었고, 그의 딸은 눈물을 머금은 채 가련하게 떨고 있었다.
계산대 앞에는 태사의(太師椅) 두 개가 놓여 있었는데, 백소운은 그중 하나에 앉아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옆에는 원령포를 입은 건장한 체격의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얼굴이 퍽 험상궂었다.
네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심협에게로 향했다.
“또 네놈이냐?”
백소운은 대놓고 싫은 티를 냈고, 옆에 앉아 있던 남자 역시 표정이 점점 흉악해져갔다.
주인장은 마치 구세주라도 보듯 심협을 돌아봤다. 그의 딸인 마수수(馬秀秀) 역시 눈빛을 빛내며 심협을 바라봤다가, 곧 눈빛이 흐려졌다.
“이리 행동하고 다니는 것을 부친께서 아실까 두렵지도 않소?”
심협은 목소리를 내리깔며 물었다.
“부친께서는 공사가 다망하신데, 어찌 이리 사소한 일까지 간여하시겠는가?”
백소운은 눈빛이 조금 흔들렸으나, 이내 내뱉듯 대꾸했다.
“그럼 그대의 형은?”
심협이 다시 물었다.
“형이 알면 또 뭐? 당분간 돌아오지도 못할 텐데……. 나중에 형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내가 조카라도 만들어놨을지도 모를 일이지. 하하하!”
백소운은 주인장 뒤로 숨은 마수수를 보며 씩 웃었다. 짓궂은 장난을 치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백소천 이놈은 동생 놈을 어떻게 가르친 거지? 전혀 달라진 게 없잖아!”
심협은 백소운의 뻔뻔한 태도에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 순간, 백소운이 의자 손잡이를 치며 벌떡 일어나더니 거칠게 화를 냈다.
“네, 네놈이 감히! 감히 네놈이 나의 형님을 모욕하는 것이냐?”
백소운의 반응에 심협은 잠시 당황했다. 백소운이 백소천을 저리도 생각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네놈이 형님과 친분이 좀 있다고 해서 내 일에 함부로 참견할 수 있다고 여기지 마라! 난 우리 형님외의 누구 말도 듣지 않아! 형님과의 친분으로 겨우 객경(客卿)이 된 주제에……. 그것도 말단 객경이라지? 그런 주제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 마라!”
백소운은 화가 누그러지지 않았는지 심협의 얼굴에 손가락질을 하며 마구 퍼부어댔다.
“맞소, 나는 백소천과 친분이 있지. 그걸 다행으로 아시오. 덕분에 좋게 말로 타이르는 거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 두들겨 패서 문밖으로 쫓아냈을 게요.”
심협의 목소리도 차가워졌다.
“말단 객경에 고작 연기 5층밖에 안 되는 주제에 감히 둘째 도련님께 이리도 방만하게 굴다니! 제대로 손을 보아 주지 않으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겠구나!”
백소운이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 있던 사내가 말했다.
“오 도우, 말씀 한번 잘하셨소.”
백소운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오 도우? 실례지만 오청진(吳靑塵) 도우 되시오? 아니면 오동(吳童) 도우이시오?”
심협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백가의 객경 중 오 씨가 두 명인데, 오청진은 연기 8층, 오동은 연기 6층에 이른 자였다.
“오동이다!”
건장한 사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이름을 밝히자, 심협은 상대가 연기 6층의 오동임을 알고는 내심 조금은 안심했다.
“손을 보아주신다니, 당치 않습니다. 오 도우와 나 모두 이유 없이 겨룰 수는 없지요. 대신 이건 어떻습니까? 내기를 하는 것이지요.”
심협이 아래턱을 매만지며 신중한 목소리로 말하자 오동이 아닌 백소운이 불쑥 끼어들었다.
“내기? 무슨 내기?”
“내가 오 도우와 겨루어 이긴다면, 둘째 공자께서는 다시는 주인장 부녀를 귀찮게 하지 않는 것이오.”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리 해주지. 하지만 네가 이길 확률은 삼 할에도 미치지 못할 텐데?”
그 말에 오동이 고개를 번쩍 들며 한 음절씩 또박또박 말했다.
“둘째 도련님, 저놈의 승산은 일 할도 되지 않습니다!”
상황이 이리 돌아가자 다급해진 것은 주인장 부녀였다.
“심 공자, 이러지 마십시오. 저희 부녀를 위해 주신 것은 감사하나, 그리 충동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심 공자, 싸우지 마십시오.”
마수수 역시 걱정스러운 듯 만류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것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심협은 말없이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두 사람에게 고개를 저었다.
“심가야, 이 대결은 내가 아니라 네가 먼저 하자고 한 것이다. 그러니 만일 네놈이 다치더라도 절대 집안사람들에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 형님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백소운이 후환을 없애려는 듯 덧붙였다.
“나 심협은 졌다고 못나게 구는 자가 아니니 그런 걱정은 마시오. 그대야말로 약속이나 잘 지키면 되오. 자, 우리 나가서 겨루는 것이 어떻소? 영업에 피해를 줄 수는 없지 않소?”
심협은 말을 마치자마자 대답도 가다리지 않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오동과 백소운은 서로 마주 보더니 씩 웃고는 바로 따라 나갔다.
문밖에 이른 백소운은 입구에 쓰러져 있는 두 호종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인장 부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가게 밖으로 나왔다.
행인 하나 없는 길가에 심협과 오동이 마주 섰다.
오동은 눈썹을 잔뜩 치켜세운 채 경멸하듯 심협을 노려보며 한 손을 뻗었다. 심협을 향한 손가락이 굽어 있는 것이, 대놓고 도발하는 자세였다.
심협은 개의치 않고 미소를 지으며 소매 안에 한 손을 숨긴 채 소뢰부 한 장을 가볍게 쥐었다.
오동은 심협이 먼저 공격하려는 뜻이 없어 보이자 양팔을 맹렬히 떨쳤다. 그러자 체내의 법력이 발산되어 몸 주위에 황색 빛 한 겹이 형성되어 마치 갑옷을 입은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오동이 두 걸음을 내딛자 이미 심협의 앞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주먹을 정면으로 내리찍고 있었는데, 놀랄 만큼 빠른 속도였다. 이대로 얼굴을 가격당한다면 최소한 중상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까지도 아무런 반응도 없던 심협은 오동의 주먹이 얼굴에서 채 반 척도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다가온 순간 몸을 뒤로 젖혔다.
쉬익!
오동의 주먹은 위세가 맹렬하여 바람만으로도 심협의 귀밑머리 몇 가닥이 끊어져 버렸다.
“잘한다!”
이 광경에 백소운은 바로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이놈, 심가야! 안 그래도 연기 5층밖에 안 되는 주제에 선옥으로 보수를 받는 꼴이 아니꼬웠는데, 스스로 목을 들이밀다니, 제정신이 아니로구나!”
오동은 심협에게만 들릴 만한 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심협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객경으로서 수준에 비해 좋은 대우를 받는 것만으로도 이미 여러 사람의 눈엣가시가 되었다는 것을…….
오동은 다시 공격해왔다. 이번은 조금 전보다도 빨라져서, 한 걸음에 옆으로 다가오더니 심협의 옆구리를 노리고 아래에서 위로 주먹을 퍼 올렸다.
심협은 팔을 아래로 향하여 공격을 막았다. 두 주먹이 맞부딪혔을 때, 심협은 그 기세를 빌려 몸을 약간 옆으로 돌린 채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났다. 이어서 한 차례 발을 구르고 나서야 겨우 몸을 가눌 수 있었다.
백소운은 심협의 낭패한 모습을 보며 키득거렸다.
하지만 실상 당황한 것은 오동이었다. 이번 주먹질은 수사의 공법을 통해 속도와 각도를 매우 정밀하게 계산한 것이었다. 그러니 심협의 수준으로는 절대 피할 수 없을 거라 여겼고, 단숨에 갈비뼈가 산산조각 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어떻게 이 공격을 무효화하고 살아남았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의문 속에서도 오동은 멈추지 않고 심협을 쫓아가 연달아 주먹을 휘둘렀다. 공격이 반복될수록 주먹은 더 빨라졌고, 더욱 매서워졌다. 주먹 하나하나가 심협의 이마와 등, 겨드랑이 아래 등 급소를 향했다.
심협은 때로는 물러섰고, 때로는 좌우고 움직여 피했다. 공격에 대응하느라 손발이 바빴다. 반격의 기회조차 잡지 못하고 수차례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주인장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탄식하는 중이었고, 마수수는 차마 못 보겠는지 부친 뒤로 완전히 숨어 있었다.
“오 도우, 너무 난폭하게 굴지는 말게. 마 낭자가 놀라지 않나.”
흥미진진하게 싸움을 지켜보던 백소운이 마수수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그때였다. 발아래로 황색 빛이 번득이더니 오동의 몸놀림이 갑자기 더 빨라졌다. 그는 돌연 튀어나와 심협의 미간에 주먹을 휘둘렀다.
이 공격에 심협은 무척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심협이 이미 오동의 공격을 꿰뚫고 있는 상태였다.
심협은 몸을 틀며 머리를 뒤로 기울였다. 그러자 오동의 주먹이 그의 이마에 딱 붙어 조금도 힘을 쓸 수 없게 됐다.
그 순간, 심협은 발끝으로 땅을 찍었다. 마치 뒤로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이 광경에 심협이 중상을 입은 줄 알고 백소운마저 화들짝 놀랐다.
그때였다. 가녀리지만 확고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만 싸우세요!”
동시에 마수수가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양팔을 벌린 채 오동과 심협의 사이를 막고 섰다.
심협은 화들짝 놀라 다시 몸을 가누고 섰다. 그의 몸에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오동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제 그만 싸우세요. 백 공자님의 청혼…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심 공자님을 괴롭히지 말아 주세요.”
마수수는 용기를 낸 듯 백소운을 향해 말했다.
“안 된다!”
주인장은 안색이 굳으며 말했다.
“뭐라고? 원하지 않으면서도 단지 저놈이 다칠까 봐 두려워서 내게 시집을 오겠다고?”
백소운은 잠시 멍해져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그러나 마수수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수 낭자, 그러지 마시오.”
심협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 공자, 이는 제 일이니 공자님을 끌어들일 수는 없습니다.”
마수수는 심협을 돌아보며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지만, 굳건한 의지가 느껴졌다.
“수수, 설마…… 저놈에게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저놈은 우리 집안의 말단 객경(客卿)일 뿐인데?”
백소운의 말에 마수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긍정하지는 않았지만, 부정도 하지 않은 것이다.
“수수 낭자, 정말 이럴 필요 없소. 대결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걱정 마시오. 내 그대가 원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도록 해주겠소.”
심협은 내심 감동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맞아! 내기를 했으니 우선 끝까지 해보고 나서 이야기하지.”
백소운도 말했다.
마수수는 무어라 더 말하려 했지만, 주인장이 옆으로 끌고 나왔다.
“오 도우, 마저 합시다.”
심협은 포권을 하며 말했다.
백소운은 오동을 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절대 지지 말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백소운이 어찌 알겠는가. 오동의 속이 타들어가고 있음을……. 연이은 십여 번의 공격은 모두 명중하지 못했거나, 명중한 듯 보여도 마치 솜을 두들긴 것처럼 힘이 흩어져 버려서 아무 효과도 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