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여덟 번째 객경(客卿)
“심협, 그리 말해주니 내 매우 기쁘다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네.”
백소천은 진심으로 기쁜 듯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연유가 있는 것이오?”
심협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일전에 집안 어르신께서 나를 화생사(化生寺)에 입문시키고자 연락을 하셨는데, 얼마 전에 화생사에서 답이 왔네. 내 며칠 후면 건업성을 떠나야 하네.”
백소천은 창밖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생사?”
익숙한 이름이었다. 방촌산의 장서각에서 보았던 서적들에서 화생사에 대한 기록도 본 기억이 떠올랐다. 온통 찬사만 기록되어 있었다.
“들어본 적이 있는 곳인가?”
“조금 들어본 적이 있소. 그곳은 큰 수선(修仙) 종파 아니오? 백형의 자질이라면 그곳에서 분명 큰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오.”
심협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말했다.
“화생사에 입문하면 나는 더 이상 소모산 계파 사람이라고 할 수 없겠지. 그러니 순양보전의 계승과 춘추관 재건은 함께할 수 없는 걸세.”
백소천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훌륭한 종파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분명 순양보전보다 더욱 고명한 공법을 익힐 수 있을 것이오. 그럼 며칠 후에 백 형이 건업성을 떠날 때 나도 춘화현으로 돌아가야겠소.”
“자네가 춘화현으로 돌아가는 건 그리 좋은 선택 같지가 않네.”
“어째서요?”
백소천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심협은 내심 당황했다.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놈들이 완전히 물러갔다고 보장할 수는 없네. 정말 물러갔다 해도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지 않나?”
“내가 춘화현으로 돌아간다면 요괴들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는 거요?”
심협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최악의 상황도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나? 건업성이야 우리 백가가 자리 잡고 있으니 저들이 감히 여기서 일을 벌이지는 못하겠지. 그러나 춘화현에서는…… 저들이 거리낄 것이 없지 않나?”
백소천의 목소리는 진중했기에 심협도 그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사실은 지금 건업성뿐만 아니라 대당의 많은 지역이 불안정하네. 마겁일에 대한 소문도 더욱 번지고 있어. 난세가 펼쳐질 기미가 보이는 게지. 우리 집안에서 내가 빨리 성장하길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네. 심협,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최대한 빨리 힘을 키우는 것이네. 자네 스스로를 지킬 힘부터 키워야 해.”
백소천이 탄식하듯 말을 이었다.
“백 형 말이 맞소. 하지만 백 형이 건업성을 떠나면, 나는 홀로 여기서 허송세월하는 것 아니겠소?”
심협의 마음은 무거웠다. 사실 마겁일 이후의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 걱정은 할 것 없네. 내 떠나기 전에 아버지께 자네를 우리 집안의 객경(客卿)으로 청할 것을 말씀드리려 하네. 그러면 자네는 계속 백부에서 수련도 할 수 있고, 선옥으로 보수를 받을 수도 있어.”
백소천의 제안에 심협은 화들짝 놀랐다.
“그건 좀 곤란하지 않겠소? 내 고작 연기 중기의 수사일 뿐인데, 어찌 객경이 될 자격이 있겠소?”
“그건…… 우리 집안의 객경 중 대부분이 연기 후기의 수사라네. 연기 중기의 수사도 없는 것도 아니야. 그러니 곤란할 건 없네.”
백소천의 답에 심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백 형, 사실 내 줄곧 궁금했는데…… 백가가 건업성 제일 퇴마세가라면 그 힘이 어느 정도 되는 거요? 춘추관과 비교해서 얼마나 더 강하오?”
“춘추관보다야 조금 더 강하기는 하네. 집안 큰 어르신이 응혼기 수사이시고, 아버지와 셋째 할아버지는 각각 벽곡 후기와 벽곡 중기 수사이시지. 그리고 호수 아래 밀실에 계시는 다섯째 할머니 또한 벽곡 중기 수사시라네.”
응혼기 수사 한 명에 벽곡기 수사 셋이라니, 백가의 역량에 심협은 감탄했다.
“객경 중 한 분은 벽곡 초기 수사이시고, 나머지 여섯 명은 모두 연기기 수사라네. 연기 6층부터 9층까지 두루 있지. 자네가 객경이 된다면, 우리 집안의 여덟 번째 객경이 되는 게야. 어떤가? 해볼 만하지 않은가?”
백소천의 뜻을 알아들은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위해 이리도 세심하게 계획해 주었는데 어찌 따르지 않겠소? 내 그 정도로 사리분별 못 하는 놈은 아니오.”
“잘 생각했네. 춘추관을 재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돈만 필요한 게 아니라 막강한 실력이 있어야 가능하지. 자네 어깨의 짐이 무겁네 그려.”
심협이 동의하자, 백소천은 마음이 놓이는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원래는 백형과 함께 이 짐을 나눌 생각이었소만, 결국 나 혼자 다 짊어지게 되었구려.”
심협은 짐짓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다.
“하하! 내 미안하게 됐군. 이번에 헤어지면 언제 또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 가세! 내가 살 테니, 오늘은 취할 때까지 마셔보세.”
백소천은 껄껄 웃더니, 심협을 다짜고짜 밖으로 끌고 나갔다.
* * *
며칠 뒤, 백소천은 집안 장로 한 명의 호송을 받으며 건업성을 떠났다.
심협은 곧바로 백학성의 부름을 받고 후원 서재에 이르렀다.
“선배님을 뵈옵니다.”
서재에 들어선 심협은 예를 갖추었다.
“자네는 소천이의 절친한 친구이니 나를 백부라 부르면 되네. 하하하! 자, 앉아서 이야기하지.”
백학성은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는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심협도 밝게 웃으며 백학성의 맞은편에 공손한 태도로 앉았다.
“상의할 일이 있어 자네를 불렀네.”
백학성이 말을 이어갔다.
“선배께서는 분부만 하십시오.”
심협은 호칭을 바로 바꾸지 않고 답했다.
“우리 집안이 최근 몇 년간 세력을 확장하느라 외부 수사들을 객경으로 모시고 있지. 자네가 우리 집안의 객경으로 들어올 생각이 있는지 모르겠네.”
백학성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백가의 객경이 될 수 있다면 영광입니다. 다만 제 수련이 낮아 감당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심협은 바로 대답했다.
“그것이라면 걱정 말게. 내 자네를 우리 집안 객경으로 청하는 것은 자네의 현재가 아닌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높이 샀기 때문이네. 소천이와 삼장로(三長老)께서도 자네를 높이 평가하고, 나 또한 자네의 성품이 마음에 드네. 그래서 객경으로 청하고자 하는 게야.”
백소천이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께서 저를 그리 높이 평가해 주시다니, 실로 영광입니다. 백가의 객경이 되어 백가를 위해 힘쓰고자 합니다.”
심협은 바로 일어나 포권을 했다.
“하하! 좋네, 좋아. 이제 앉아서 이야기하지.”
백학성은 얼른 심협을 앉도록 했다.
“감사합니다, 가주.”
심협이 그렇게 호칭을 바꾸자, 백학성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이제 우리 집안 객경이 되었으니 미리 이야기하겠네. 지금 자네의 수련 경지가 높지 못하니 보수는 다른 객경과 동일하게 줄 수는 없네. 삼 개월마다 선옥 한 개가 지급될 게야. 자네에게는 간단한 요괴나 귀신을 물리치는 것이 임무로 주어질 텐데, 임무를 수행하면 그때마다 상응하는 보수가 있을 걸세.”
“알겠습니다.”
심협은 덤덤하게, 그러면서도 공손하게 대답했다.
“좋아, 내일 사람을 시켜 객경(客卿) 영패를 보내주겠네. 그리고 삼 개월치 보수도 함께 보내지.”
백학성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주, 저는 언제부터 임무를 수행하게 됩니까?”
“급할 것 없네. 임무가 주어지면, 자네에게 통보될 것이야.”
심협의 질문에 백학성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심협은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 후,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 * *
잠시 후, 서재 내실에서 백강풍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주, 우리 규율대로라면, 연기 7층 이상의 수사만이 삼 개월마다 선옥 하나를 받을 수 있지. 한데 수련과 자질이 모두 부족한 심협을 객경으로 받아주는 것만 해도 전례 없는 일인데, 보수까지 선옥으로 지급하려는 이유가 뭔가?”
백강풍이 의아한 듯 물었다.
“괜찮습니다. 우리에게는 전혀 부담스러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젊은이에게 기회를 주는 셈 치지요. 그리고 이는 소천이가 화생사 입문에 내건 유일한 조건이었습니다.”
백학성이 웃으며 말하자 백강풍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가주가 좋은 뜻으로 그리 한 것일 테니 반대하지는 않겠네. 그러나 우리 자제들과 다른 객경들은 불만을 가질 터. 심협이 난처하게 될 것이네.”
“심협이 정도도 이겨내지 못할 자라면, 스스로 떠나게 하면 그만입니다.”
백학성은 여전히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 * *
다음 날, 백부에는 심협이 객경으로 임명됐다는 소식이 퍼졌다.
심협은 객경 영패와 선옥 하나를 얻었고, 독립된 거처로 이사했다.
그의 거처는 백부 호수 근처의 빽빽한 숲속에 있었다. 외진 곳이라 앞뜰 대문과는 꽤 멀었지만, 호수 밑 정실과는 가까웠다.
하지만 객경의 신분이 된 심협이 다시 정실로 갔을 때, 지하 대청 노파는 그를 제지했다. 심협에게는 아직 그곳에서 수련할 자격이 없다고 했다. 객경으로서 백가에 공을 세우고 가주의 동의를 얻어야만 정실에서 수련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심협은 아쉽긴 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이전에 정실에서 수련할 수 있었던 것도 예외적인 일로, 백소천의 덕을 본 것 아니었던가. 지금 자신의 신분이 달라졌으니, 그에 맞는 변화 또한 받아들여야 했다.
이 점을 깨달은 심협이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 수련을 이어간 지 보름이 됐을 때였다.
건업성에는 장마 끝에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가을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난 심협은 평소처럼 수련하지 않고, 숨겨두었던 석합에서 금괴 하나와 은표 몇 장을 꺼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두 손가락을 뻗어 천천히 동전만 한 원형 옥돌을 집었다. 싱그러운 초목처럼 푸른 옥돌 안에는 순수하고 정묘한 영기(靈氣)가 회전하고 있었다. 이 옥돌은 심협이 객경으로서 처음으로 받은 보수이자 신선의 돈이라 할 수 있는 ‘선옥’이었다.
고서의 기록에 따르면, 선옥은 그 자체로 매우 희귀한 영재다. 천지 영기를 장악하여 생겨나며, 지맥(地脈)에서 배양되는 것이라 지극히 은밀한 지하 옥맥(玉脈)에서만 생겨난다.
채굴한 선옥을 도가에서 정한 모양대로 형태를 다듬었고, 비법으로 정제함으로써 영기를 뭉쳐 흩어지지 않게 해야 비로소 신선의 ‘돈’이 되는 것이다.
심협은 신중한 눈으로 선옥을 자세히 살폈다.
“황지에 쓴 낙뢰부는 결국 한 장도 성공하지 못했지. 오늘 녹보당에 방문해 청상지를 열 장 사와 다시 시도해보겠다.”
그렇게 결심하고 선옥을 챙긴 심협이 석합을 닫으려던 그때, 석합 안에서 무언가 빛이 반사됐다. 그 물건 위에 있던 은표와 <무명천서> 등을 치우자 금박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손에 들고 자세히 살펴보니, 금박에는 부적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제야 심협도 돌연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금박은 만수하에서 <무명천서>를 찾을 때 해골이 담겨 있던 금속 포대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이걸 잊고 있었구나. 나로서는 뭔지 알 수 없으나 녹보당 주인장이라면 알 수도 있겠지.”
심협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석합을 챙겨 녹보당으로 향했다.
* * *
저 멀리 녹보당 문 앞에 낯익은 두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백소운을 따르는 두 호종이 분명했다.
심협은 무언가를 눈치채고는 표정을 굳히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입구에 이르기도 전에 호종들이 손을 뻗어 막아섰다.
“심 장로, 둘째 도련님께서 안에서 일을 보고 계십니다. 다음에 오시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호종들은 심협의 얼굴과 신분도 알고 있었으니 언행을 함부로 하지는 못했다.
“괜찮네. 내 그저 물건을 좀 사러 왔을 뿐이니.”
심협은 입구를 바라보고 말했다.
“저희를 난처하게 하지 마십시오.”
호종 한 사람이 그의 허리에 걸려 있는 객경 영패를 보며 난감한 듯 말했다.
“안심하게. 내 정말 물건을 사러 온 것뿐이니 둘째 공자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네.”
심협이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두 호종은 더는 강하게 제지하지 못하고 서로를 마주 보며 주저했다.
심협은 그 틈에 두 사람 사이로 재빨리 지나가며 한 손을 빠르게 휘둘렀다.
“자, 장로…….”
두 사람은 화들짝 놀랐으나,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