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39화 (139/1,214)

139화. 순양보전의 계승

다음 날, 해 질 무렵.

심협은 하루의 수행을 마친 후, 구혼마면과 약속한 정자에 이르렀다. 아직 구혼마면이 오기 전이었다.

구혼마면은 한참 후에야 도착했는데, 여전히 백면서생의 모습이었다.

“시간을 잘 지켰군.”

구혼마면은 심협을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제게 시키실 일이 무엇인지 이제는 말씀해 주시겠지요?”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말게. 무슨 위험한 요괴 물리치고 그런 일은 아니니까. 그저 성황신(城隍神) 사당에 잠입해 향 세 개만 가져오면 되네.”

구혼마면은 걱정 말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성황신 사당에서 향을 훔치라는 말씀입니까?”

심협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물었다.

“말을 이상하게 하는군. 훔치는 게 아니라 가져오는 것이네! 향불의 기운이 스며든 오래된 향 세 개만 가져오게.”

구혼마면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심협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구혼마면을 바라봤다.

“사실대로 말하면, 내 어제 수살과 싸우면서 내상을 입었네. 하지만 아직 건업성에 남아 저승에서 명받은 일을 해야 하니 당분간은 요양할 수도 없지. 그러니 급한 대로 우선 성황 어르신의 향불로 치료할 수밖에…….”

구혼마면은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그런 것이었군요. 그런데 왜 선배님께서 직접 가시지 않고……?”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내 의아해져 다시 물었다.

“헛소리 말게! 나는 저승에서 오지 않았는가! 게다가 성황 어르신은 나보다 더 높은 분이니, 내 아무래도 직접 가기는 어렵단 말일세.”

구혼마면이 버럭 화를 냈으나, 심협은 여전히 주저했다.

“걱정 말게. 자네는 이승 사람이니, 향 세 개쯤 가져오는 것도 성황 어르신에게는 별일 아니네. 마음에 걸리면 앞으로 열심히 향을 올리고 기도하면 될 것 아닌가? 이 일만 잘 처리해 준다면, 내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하겠네.”

심협이 망설이자, 구혼마면이 다급하게 재촉했다.

‘사례’라는 단어에 심협은 마음이 흔들렸다. 머릿속에는 선옥과 법기, 두 단어가 떠올랐다. 지금 그가 가장 원하는 사례는 바로 이 두 가지였다.

“좋습니다. 제가 도와드리지요.”

심협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게. 제사상의 향 통에서 가장 짙은 색을 띠고 있는 오래된 향이어야 하네. 절대 잘못 가져와서는 안 돼!”

구혼마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신신당부했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시지요.”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길을 나섰다.

건업성의 성황신 사당은 제법 넓었고, 드나드는 사람도 많았다. 당연히 향불도 항상 잔뜩 켜져 있었다.

심협이 사당에 이르렀을 때는 날이 완전히 저문 후로, 사당을 관리하는 노인이 막 문을 닫으려는 중이었다. 심협은 재빨리 다가가 성황신에게 향불을 올리기 위해 멀리서 왔다며,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사정했다. 무척 간절해 보였는지, 사당 관리인은 심협을 들여보내 주었다.

심협은 품에서 은자 열 냥을 꺼내 공덕함에 넣었다. 그 정도로 큰돈을 바치는 사람은 흔치 않았기에 사당 관리인은 밝게 웃으며 얼른 향을 꺼내주었다.

“직접 향을 꺼내야만 비로소 성의를 보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심협은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고, 사당 관리인은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여기고는 심협이 직접 향을 꺼내도록 내버려두고 물러갔다.

심협은 향 통을 뒤적거려 색이 짙은 오래된 향 세 개를 골라 조용히 소매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다시 색이 선명한 향 세 개를 골라 향불을 올렸다.

향을 올릴 때, 그는 소원을 비는 대신 성황신에게 죄를 고하며 선처를 빌었다.

* * *

“맞네, 맞아. 바로 이것일세.”

구혼마면은 심협에게 향 세 개를 받아들고는 귀한 보물이라도 얻은 듯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말을 마치자마자 향들을 코앞에 대고 깊이 들이마셨다. 그러자 세 개의 향 모두 윗부분에 불이 붙더니, 구혼마면이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빠르게 타들어갔다.

머지않아 향들은 구혼마면의 콧속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갔고, 재가 되어 흩날렸다. 구혼마면의 얼굴에는 붉고 매끄러운 광택이 일었고, 표정도 한결 편안해 보였다.

“혹시 신선들이 향불을 취하면 다 이렇게 되는 겁니까?”

심협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지켜다가 궁금한 듯 불쑥 물었다.

“맡긴 일은 아주 잘했네. 내 보답하기로 했지? 이걸 받게나.”

구혼마면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느긋하게 소매를 뒤적여 길이 삼 촌 정도의 검은 족자를 꺼내 건넸다.

‘선옥이 아니군.’

심협은 다소 아쉬웠으나, 어쩌면 저 족자가 법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반신반의하며 족자를 펼쳐보았다. 눈앞에 펼쳐진 검은 비단에는 삐뚤빼뚤한 붉은 전서체 글씨가 적혀 있었는데, 이를 본 심협은 무척 실망했다.

“통령 계약?”

구혼마면이 말한 사례라는 게 법기도, 선옥도 아닌 통령 계약이라니.

심협은 통령역요의 술법을 익혔으니 통령 계약이 낯설지 않았다. 더욱이 지금의 그에게는 통령 계약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왜? 마음에 들지 않는가?”

구혼마면은 심협의 표정을 보며 의외라는 듯 갸웃하더니, 이내 언짢아져서 물었다.

“아, 아닙니다. 그저 조금 의외라서 그렇습니다.”

심협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놈아, 보는 눈이 없구나. 이것은 보통 통령 계약이 아니다. 네가 이 계약을 맺으면 앞으로 위기가 닥쳤을 때 나를 소환하여 도움을 청할 수 있단 말이다!”

구혼마면이 부릅뜬 눈으로 심협을 보려보며 호통을 쳤다.

“언제, 어디서든 말입니까?”

심협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지금 자신의 경지로는 구혼마면의 실력을 가늠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응혼기 이상이라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만일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분명 엄청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기뻐하기도 전에 구혼마면이 찬물을 끼얹었다.

“그렇긴 하지. 단, 이 계약은 일회성이네. 그러니 함부로 낭비하지 말게나.”

“한 번 밖에 사용할 수 없다니…….”

심협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승의 통령 계약을 아무나 맺을 수 있는 줄 아느냐? 원래 저승의 규율대로라면 인연이 있는 일부 수선자(修仙者)만이, 그나마도 저승의 임무를 해낸 후에나 이 통령 계약을 맺을 자격과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네!”

활짝 웃던 심협이 다시 실망하는 모습을 본 구혼마면은 또다시 호통을 쳤다.

“저승의 임무라는 게 어떤 것입니까?”

심협은 흥미가 생겨 물었다.

“왜? 자네도 저승 임무를 받고 싶은가? 지금 자네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네.”

“이왕 말 나온 김에 조금 더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은 제 실력이 부족하다 해도 언젠가는 가능할지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심협이 다소 퉁명스레 대꾸하자 구혼마면은 멋쩍게 웃었다.

“좋아, 그럼 자네의 식견을 좀 늘려주지. 보통은 저승의 힘으로 행할 수 있는 임무인 만큼 무척 까다롭지. 그러니 수련이 응혼기에 미치지 못한 자가 맡는다면 그건 죽겠다는 말과 같네. 하지만 일단 임무를 수행하고 나면 상상도 하기 힘든 이득이 있지. 이 통령 계약도 그중 하나라네.”

구혼마면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고, 무언가를 더 물으려는 심협에게 손을 내저었다. 더 묻지 말라는 뜻이었다.

“됐네. 이번에 내 전례 없이 자네에게 통령 계약을 준 것은, 자네가 나를 도와 수살을 멸하고, 내게 향을 가져다준 은혜 때문이네. 더 많은 것을 알려줘 봐야 아무 의미도 없지.”

구혼마면은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심협은 아쉬웠지만, 상대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니 더는 묻지 않았다. 그는 구혼마면에게 통령 계약의 사용 방법을 묻고는 작별을 고했다.

* * *

시간이 흘러 거의 한 달이 지났을 때, 심협은 백부에서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동안 황정경과 순양검결을 몇 차례 더 시도해 보았지만, 여전히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에 심협은 그 두 가지는 접어두고 무명공법의 수련에 전념하였는데, 다행히 무명공법은 진전이 꽤 빨랐다.

지금 그의 수련은 연기 5층까지 이르렀고, 사월보도 점점 능숙해져 갔다.

최근 보름 사이에는 황지에 낙뢰부를 써 보기도 했는데, 모든 재료를 다 사용했음에도 단 한 장도 제대로 써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진즉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심협은 비록 재료가 아깝기는 해도 그리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틈틈이 써둔 소뢰부가 60여 장이나 되니, 소뢰부에 대한 숙련도는 다시 한번 진일보한 것이 틀림없었다.

어느 날 오전, 앞뜰에서 급히 돌아온 백소천이 손에 목합 하나를 들고는 심협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탁자에 목합을 올려두고는 찻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들이켰다.

“내 사람을 보내 자네 집에 편지를 전했었네. 이건 자네 부친의 답장일세.”

그 말에 심협은 급히 목합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은표(銀票)와 금괴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은표는 족히 삼천여 냥, 금괴는 백 냥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은표와 금괴 밑에는 편지가 깔려 있었다.

편지의 글씨는 아버지의 필체였다. 안심하고 건업성에 머물라는 말과 함께 집안 걱정은 할 필요 없다는 내용이었다.

편지 끄트머리가 약간 구겨진 것이, 손가락으로 힘주어 누른 흔적 같았다. 아마도 아들을 걱정하는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편지를 움켜쥔 흔적이리라.

“자식이 멀리 떠나 있으니 아버지는 걱정하실 수밖에…….”

백소천은 심협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어깨를 두드리며 위했다.

“춘화현 상황은 어떠하오?”

심협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안정적일세. 우리 집안에서 이리 오랫동안 사람을 보내 몰래 관찰했는데도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아. 그 요괴들은 정말 물러난 모양이야.”

백소천은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내 오랫동안 백부에 폐를 끼쳤으니, 이제 돌아가 봐야겠소.”

심협은 편지를 챙겨 넣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돌아갈 생각인가?”

“그렇소. 하지만 돌아가기 전에 백형에게 해줄 이야기가 있소.”

백소천은 잠시 말없이 심협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순양보전 이야기인가?”

“역시 백 형도 알고 있었구려.”

심협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님과 사숙조님, 그리고 자네 사이의 비밀 아닌가. 내게 말해줄 필요는 없네.”

백소천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랫동안 이 일이 마음에 걸렸소. 말하지 않으면 내가 편치 않을 것이오. 당시 고화령이 물었을 때에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사실 순양보전은 내게 있소. 백형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예상은 했지. 그런데 백 형은 왜 이 일을 집안 어르신들께 알리지 않았소? 순양보전은 백가에 중요한 것 아니었소?”

심협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묻자 백소천은 피식 웃었다.

“집에 알려서 뭐하겠나? 집안 어르신들과 같이 자네를 구슬려서 얻어낼까? 아니면 협박해서 빼앗을까? 그럴 수는 없지.”

그 말에 심협은 내심 감동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숙조께서 순양보전을 전수해 주실 당시 전제 조건을 정하셨소. 나에게 반드시 춘추관을 계승하라는 것이었지. 또한 순양보전의 공법과 법술은 절대 소모산 계파 이외의 사람에게는 전수하지 말라 하셨소. 백형은 본디 춘추관의 내문제자이니 소모산 계파 사람 아니오? 그러니 내 묻겠소. 순양보전을 계승하여 나와 함께 춘화현으로 가서 춘추관을 다시 세우지 않겠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