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36화 (136/1,214)
  • 136화. 야행(夜行)

    “설마 공자께서는 부적용 종이의 구분법을 모르시는 겁니까?”

    주인장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주인장께서 가르침을 좀 주시겠습니까?”

    심협은 멋쩍어 하면서도 진지하게 부탁했다.

    “그럼 하찮은 지식이나마 알려드리지요. 부적에도 등급과 우열이 구분되듯, 부적용 종이도 그러합니다.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황지(黃紙)입니다. 흔한 만큼 가장 평범하고 등급도 낮지요.”

    주인장은 약간 조소를 섞어 말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소. 황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법력과 천지 영기에 한계가 있어 낮은 등급의 부적만 쓸 수 있지요. 높은 등급의 부적을 억지로 쓰면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타버리지 않소? 그렇다면 청상지는 어떤 점이 더 뛰어난 거요?”

    “심 도우께서는 혹시 청사녹장(靑詞綠章)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소?”

    주인장이 반문하자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들어봤소. 도가에서 재(斋)를 올릴 때 하늘에 축문을 지어 바치는 것 아니오?”

    “그렇습니다. 이 청상지는 청사지(靑詞紙)라고도 하지요.”

    주인장은 수염을 쓰다듬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청사지가 축문을 쓰는 데에 쓰던 부적지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이 부적지는 본래 청사녹장에 쓰려고 만든 것이었습죠. 하늘에 제를 올리고, 천지간 소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청상지에는 제작 과정에 기령향(祈靈香)이라는 영재가 들어가기 때문에, 이 종이로 부적을 쓴다면 천지 영기를 끌어들이기에 용이하고, 부적을 성공적으로 쓸 확률도 더 높아지지요.”

    주인장의 설명에 감탄한 심협은 다시 물었다.

    “그렇구려. 좋은 이야기 감사하오. 그럼 자운지도 설명해 주시겠소?”

    “이 부적지에 ‘자운’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자령강초(紫靈绛草)라는 영재를 주재료로 삼기 때문입니다. 자령강초는 자라는 환경이 매우 척박하여 많이 얻을 수가 없으나, 영기를 받아들이고 저장하는 데에 능하지요. 부적지를 만든 후에도 이 특성을 유지하니, 청사지보다도 더 방대한 힘을 받아들일 수 있고요. 그래서 높은 등급의 부적을 쓸 때 주로 사용합니다.”

    “가르침 잘 받았소. 이 두 가지 부적지는 얼마면 살 수 있소?”

    심협이 조심스레 물었다.

    “청사지는 그리 비싸지 않습니다. 선옥(仙玉) 하나에 열 장이요. 하지만 자운지는 선옥 하나에 한 장입니다.”

    주인장은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선옥으로만 구입할 수 있소? 금이나 은자로는 살 수 없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이 두 가지는 보통의 영재와는 달라 오로지 선옥으로만 구입하실 수 있지요.”

    심협은 물론 선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백소천에게 빌려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높은 등급의 부적을 제작하는 것은 잠시 미뤄둬야 했다.

    “안타깝지만,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부적들은 황지를 사용해도 충분하니 이리 높은 등급의 부적지는 오히려 귀한 물건을 낭비하는 꼴이겠지요.”

    심협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이 부적지들은 어디 안 가고 여기에 있을 것이니, 심 도우께서 부적술의 정수를 익혀 높은 등급의 부적을 쓸 수 있을 때에 다시 오셔도 늦지 않으십니다.”

    주인장도 웃으며 그리 말하고는 목합을 거두었다.

    심협은 어떤 영재들이 있는지 다시 유심히 살폈다. 그중 뇌격목(雷擊木)이라는 것은 순양부검을 만들 때에 쓰기 적합했는데, 이 또한 선옥으로만 구입할 수 있는 것이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백소천은 돈을 털어 부영옥 등을 사주고는 심협과 함께 녹보당을 떠났다.

    “선옥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오?”

    돌아가는 길에서 심협이 물었다.

    “선옥은 금은과는 달리 보통 사람은 접할 수 없지. 하지만 간혹 요괴를 물리쳐주고 선옥으로 사례를 받기도 했네. 어느 종파에서 우리 집안의 사람을 모시려 할 때도 그러는 경우가 있더군.”

    “주인장이 부적을 매입할 수 있다고 했는데, 선옥으로 값을 쳐주기도 하오?”

    백소천의 말에 심협은 턱을 어루만지며 그렇게 물었다.

    “무슨 소린가? 꿈도 꾸지 말게! 낮은 등급의 부적은 금은으로 값을 쳐줄 수밖에 없을 걸세. 그나마도 공격용 부적이나 돈이 좀 되는 것이지.”

    백소천의 대답은 찬물을 끼얹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나, 심협은 웃었다. 그리고 낙뢰부와 비행부는 모두 높은 등급의 부적이니 선옥으로 값을 쳐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만 지금은 여윳돈이 없으니 좋은 부적지와 재료들을 살 수가 없는 게 아쉬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어느새 진회교를 다시 지나게 되었다.

    심협은 장막을 거두고 밖을 내다봤다. 다리 위에서 구경하던 인파는 모두 돌아간 상태였다. 수난각 후원의 시신도 가족들이 가져간 것 같았다.

    다시 장막을 치려던 심협은 순간 진하수수의 등에서 매우 낯익은 꽃 도안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피안화(彼岸花)!’

    놀란 심협이 더 자세히 보려 했으나, 마차는 이미 다리를 건너 옆길로 들어선 후였다.

    “왜 그러는가?”

    백소천은 심협의 표정을 보고는 물었다.

    “아, 별것 아니오. 진하수수 석상의 모양이 특이해서 조금 자세히 보았소.”

    심협은 짧게 고민했으나,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 석상도 오래되었지. 건업성 강을 따라 많이 있다네. 듣기로는 건업성을 처음 지을 때 진회하에 두 번이나 홍수가 나서 성의 절반 가까이 물에 잠겼다 하더군. 나중에 음양선사(陰陽仙師)가 와서 보고는, 이곳의 수맥이 너무 왕성하여 살기(殺氣)가 날뛰어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던가? 하여, 관부에서 명을 내려, 진하수수를 여럿 만들어 수맥을 누르게 했다네. 그러자 이후로는 진회하가 많이 잠잠해져 다시는 그리 큰 홍수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지.”

    다행히 백소천은 심협의 반응에도 의심하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그 선사는 진정 고명한 분이겠구려.”

    심협은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춘추관에서 벌어진 일은 조사가 어찌 진행되고 있는지 아시오?”

    “아직 별 진전이 없네. 부친께서 약수문를 비롯한 수선(修仙) 종파들에 서신을 보내셨고, 사람까지 보내 함께 조사를 시작하셨지. 그런데 춘추관 전체가 소각되어 증거가 사라진 바람에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는군.”

    백소천은 혀를 차며 말했다.

    “고화령과 왕청송은 어찌 되었소? 그 둘에 대한 소식은 조사해 보았소?”

    “왕청송은 일찍 춘추관에 들어간 데다가 외부 사람과 교류가 적었네. 그 내력을 아는 사람은 아마 사부님과 풍양진인, 사숙조 정도겠지. 그분들 모두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으니 왕청송에 대한 실마리도 찾을 수가 없었네. 고화령은 왕청송이 입문시킨 자이니 더더욱 그렇고…….”

    백소천의 대답에 심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렇다면 춘추관의 그 많은 제자들은 모두 헛되이 죽은 것 아니오?”

    심협은 비록 춘추관 사람들과 그리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춘추관에 위기가 닥쳤을 때 사부와 사숙조 등 모두가 자신에게 보인 신임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순양보전까지 전수받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춘추관의 환난을 제대로 밝힐 수조차 없다니, 분노가 치솟았다.

    “당분간은 조사하기 어려울 것이네. 다른 종파 사람들은 이미 돌아갔고, 우리 집안사람들만 몇 사람 남아서 몰래 감시하고 있지. 단서라도 나온다면 분명 보고가 올라올 게야.”

    백소천은 유감스러운 듯 말했다.

    “우리 집안은…….”

    심협은 잠시 망설이며 말을 꺼냈으나, 이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연락했다가는 가족이 더욱 위험해질 듯해 참고 있었지만, 그들의 안위가 걱정되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춘추관 일은 은폐되어 왔으니 아는 자가 거의 없네. 그러니 보통 사람들은 소식을 전혀 모를 게야. 자네 집안에서는 자네가 아직 춘추관에 있다고 생각하시겠지. 그리고 아버지께서 자네 집안을 몰래 보살피라고 당부하셨으니, 아마 별일 없을 게야.”

    백소천은 웃으며 위로했다.

    “정말 감사하오. 그럼 내 집에 편지를 써서 근황을 알려야겠소.”

    “그것도 좋겠네.”

    심협의 말에 백소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백부(白府)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백소천이 사람을 시켜 황지 한 묶음과 주사를 보내주었다. 심협은 밀실로 가서 수련하는 대신 방에서 부적을 쓰기 시작했다.

    꿈속 장수촌에서 높은 수준의 부적을 여럿 접하면서 심협은 부적 제작에 대한 깨달음이 더욱 심오해졌다. 지금은 소뢰부 같은 낮은 등급의 부적은 세 장을 쓰면 한 장은 성공할 정도였다. 게다가 법력의 제어도 점점 익숙해진 덕에 법력 소모도 예전보다 훨씬 적어졌다.

    불과 한 시진 만에 심협은 십여 장의 소뢰부를 완성했다.

    붓을 내려둔 그는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숨을 고르며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잠시 후 심협의 마음은 혼란스러워졌다. 머릿속에 자꾸만 진하수수의 등에서 본 피안화 도안이 떠올라 수련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백소천에게서 빌려온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니, 백부 곳곳에 등불이 켜지면서 붉은 빛이 새어 나왔다.

    심협은 저녁식사를 한 후, 혼자 앞뜰을 거닐다가 대문이 이미 닫힌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편문(*偏門, 정문에 딸린 옆문)은 아직 열려 있었고, 문을 지키는 시종들이 몇몇 서 있었다.

    심협은 잠시 망설이다가 편문으로 다가갔다.

    시종들의 우두머리가 심협을 맞이했다. 백부의 시종들은 진즉 들은 바가 있어 심협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심 공자, 외출하십니까?”

    “아, 잠시 산보나 좀 다녀오려 하오.”

    “날이 저물었으니 너무 멀리는 가지 마십시오. 그리고 가능하면 이 옹화가(雍華街)를 벗어나지 마십시오. 최근 성 안이 그리 평안하지 못합니다.”

    시종은 감히 막지는 못하고, 조심스럽게 당부했다.

    “알겠소. 내 주의하겠소.”

    심협은 포권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몰래 나가볼까 생각했지만, 백부에 얼마나 많은 고수가 숨어 있을지 모르니 허가를 받고 나가기로 한 것이다. 괜한 오해를 살 필요는 없었다.

    심협은 백부에서 멀어지고 주위에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되자 바로 법력을 운공하여 두 다리로 이동시켰다. 그러자 보법이 변하며 매우 빠른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본래 건업성의 대부분 구역에는 야간 통행금지가 없기도 했고, 진회하 근처는 특히 등불이 더욱 밝아 낮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최근 곳곳에서 기이한 일이 연달아 발생하고 수난각의 일도 소문이 퍼질수록 더욱 부풀려진 탓에, 행인은 예전 같지 않았다.

    평소와 전혀 다른 곳이 또 있었다. 바로 진회하 부근의 일부 구역이었다.

    수난각은 영업을 정지한 상태였다. 근처에 있던 상점들도 그 영향을 받아 일찍 문을 닫았고, 문인과 선비들이 좋아하던 뱃놀이도 관부에서 금지령을 내려 당분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심협이 도착했을 때,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각 집마다 내건 붉은 등불과 자잘한 등잔불들만이 길의 일부를 붉게 비추었고, 나머지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는 길 입구에서 수난각 방향을 바라보다가 곧 모퉁이를 돌아 진회교로 향했다. 하지만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긴장감이 들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하는 것이 느껴져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대로 멈춰 서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우측 담장 모퉁이를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왔다. 선비 복장의 사내는 바로 낮에 보았던 백면서생이었다.

    “당신이 수선자(修仙者)인 건 알겠는데, 괜한 일에 끼어들지 말고 떠나쇼.”

    서생은 천천히 다가오면서 나지막이 말했는데, 심협은 그 목소리를 듣고 낯빛이 변했다.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느낌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백면서생은 곁을 스쳐 지나 진회교로 향했다.

    심협이 따라가려고 했지만, 서생이 경고하듯 말했다.

    “남의 충고를 들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텐데……. 젊은 나이에 죽을 길 찾아가는 짓은 하지 마쇼.”

    심협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망설이다가 방향을 틀어 왔던 길로 돌아갔다.

    백면서생은 심협이 떠난 것을 보며 슬쩍 미소를 짓고는 빠른 걸음으로 진회교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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