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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132화 (132/1,214)
  • 132화. 온전한 순양결(純陽訣)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세 사람은 물건을 잔뜩 들고 돌아왔다.

    “심협, 그리 고지식하게 굴면 못쓰네. 건업성에 왔는데 진회하 기생집에 가는 게 뭐 대수라고 그리 빼는 겐가? 이건 보물 창고에 가서 빈손으로 돌아오는 꼴이 아니고 무어냔 말일세!”

    백부로 돌아올 때까지 백소천은 설득을 거듭했다.

    “가려면 백형 혼자 가시오. 나는 끌어들이지 말고……. 그리고 혹시 백부에 폐관수련에 적당한 정실(靜室)이 있소? 가능하면 좀 쓰게 해주시오.”

    심협은 백소천이 귀찮게 굴자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러자 백소천이 미간을 팩 찌푸렸다가 이내 웃었다.

    “우리 당당한 퇴마세가에 폐관할 정실 하나 없겠는가? 그나저나 자네도 참 미련하네그려. 며칠쯤 쉬어도 좋을 것을, 곧장 수련하려는 겐가?”

    “내 자질은 백형에게 한참 미치지 못하건만, 수행에 태만해서야 쓰겠소?”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됐네, 됐어. 폐관실을 내주면 될 것 아닌가.”

    백소천은 두 손을 흔들며 어린아이처럼 투덜거렸다.

    녹수는 백소천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참지 못하고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백소천은 비록 자유분방하기는 해도 오만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 여태껏 심협처럼 스스럼없이 누군가를 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사실 백소천은 좋게 보거나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또래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심협은 방으로 돌아와 새로 산 물건들을 정리해두고는 백소천을 따라 후원(後院)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백가의 가주인 백학성의 서재를 지나, 그 뒤편의 진짜 후원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제법 큰 호수가 있었다.

    백소천은 익숙한 듯 심협을 데리고 가산으로 가서는 그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요?”

    심협은 가산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백소천은 그런 심협을 보며 씩 웃더니 가산을 몇 차례 두드렸다. 그러자 기계음이 울리기 시작했고, 기관이 작동한 것이다.

    그렇게 한바탕 마찰음이 울린 후에 가산 아래로 검은 동굴이 나타났고, 그 안에서는 서늘한 기운이 새어 나왔다.

    “수련실은 호수 아래에 있네.”

    백소천은 웃으며 말하고는 앞장서서 동굴로 들어갔다.

    돌계단을 백 칸쯤 내려가자 지하 통로에 접어들었다. 벽에 등이 걸려 있어 제법 환한 통로를 수십 장 들어가니 넓은 대청이 나타났다.

    지하 대청의 중앙에는 높이 2척 정도의 원형 석대가 있었는데, 그 위에는 야위었지만 아직 정정해 보이는 백발의 노파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손자 백소천, 다섯째 할머님을 뵈옵니다.”

    백소천은 노파에게 예를 갖춰 공수했다. 심협도 재빨리 그를 따라 예를 갖추었다.

    노파는 두 사람을 살피다가 심협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만 끄덕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머님, 이쪽은 제 절친한 친구입니다. 잠시 저희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종종 이곳에 와서 수련하려 합니다. 제 부친께는 제가 말씀드릴 겁니다.”

    백소천이 얼른 해명하듯 말하자 노파는 또다시 고개만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다.

    심협은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의 벽에는 높이가 사람 키만 한 동굴들이 빽빽했는데, 그 안은 매우 깊어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우리 집 수련 정실들이네. 조금 특별한 곳이라 보통은 우리 집안의 연기기 7층 이상 자제들만 이곳에서 수련할 수 있지. 나머지는 바깥 연무장이나 각자의 방에서 수련해야 하지.”

    백소천이 설명했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수련하는 것은 실례 아니오?”

    심협은 노파의 눈치를 보며 머뭇머뭇 물었다.

    “하하, 괜찮네. 내 우리 집안 장손으로서 이 정도 권한은 있네. 마음에 드는 정실을 골라 수련하게. 나는 조모님을 뵈어야 하니 이만 가보겠네.”

    백소천은 심협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동굴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백소천은 웃으며 그런 심협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돌아갔다.

    수백 장을 걸어가니 저 앞으로 통로의 끝이 보였다. 그곳에는 활짝 열린 밀실 석문이 있었는데, 심협이 그 안으로 들어가자 저절로 닫혔다.

    그 순간, 밀실 사방의 벽에 돌연 짙푸른 빛이 일었다. 이어서 벽과 천장에 독특한 도안이 떠올랐는데, 도안에서는 제법 짙은 천지영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백형이 말한 정실의 특별함이 이것이었나? 이 밀실 안에 법진이 있어서 수련을 도와주는 것이로군!”

    심협은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밀실은 꽤 넓어 너비가 족히 수십 장은 됐고, 무예를 연습하기에도 충분했다.

    그는 밀실 바닥 중앙에 원형 방석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는 그 위에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의 법력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지금 그는 연기기 4층의 수련이 완전히 자리 잡은 상태였다. 예전보다 조금 수준이 높아졌으니, 수련에 매진한다면 조만간 연기기 5층에 진입할 터였다.

    그는 사색을 접고, 양손을 원 모양으로 만들고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꿈속 방촌산에서 배운 황정경의 구결을 되뇌어 보았다.

    술법만 수련하는 무명공법과 달리 황정경은 법력과 육신을 모두 중시한다. 그러니 법력을 수련하는 동시에 몸의 힘도 키우는 것으로, 수련을 완성할 경우 그 효과는 더욱 두드러진다.

    심협은 꿈속에서처럼 하늘이 돕는 듯한 수련 속도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래도 꿈속에서 미리 많은 깨달음을 얻고 정리했으니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심협은 차분하게 한 손을 결인하고 묵묵히 운공을 시작했다. 그는 꿈속에서처럼 대담하게 수련하기보다는 특별히 신경 써서 제일 앞의 두 구절 법결만 운공했다. 당시에 천지영기가 미친 듯이 몰려오던 장면이 생생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그의 수련은 연기기 수준에 불과해 체내에 법맥을 만들어낼 수도 없다. 그러니 만일 한 번에 그리 많은 천지영기가 몰려든다면 그 속도를 제어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황정경의 운공을 시작했음에도 사방에서 영기가 몰려드는 일은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아니, 사방에서 영기가 모여들기는 했으나, 그 속도는 턱없이 느렸다.

    어째서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심협은 운공을 이어갔다.

    하지만 반 시진 후까지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꿈속에서 수련할 때 일어났던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이건 차이가 커도 너무 크잖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실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에 그는 황정경 수련을 접어두고 무명공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양손을 거두었는데, 얼굴은 기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어쩌면 꿈속에서의 경험과 깨달음, 그리고 법진의 도움까지 받고 있기 때문인지, 무명공법의 수련 속도는 많이 빨라져 있었다. 게다가 둘을 비교하자면, 지금 황정경의 수련 속도는 그가 무명공법을 처음 수련할 때보다 훨씬 느렸다.

    “내가 나의 이 망할 자질을 너무 높게 평가하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과연 사월보는 익힐 수 있을 것인가?”

    심협은 탄식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곧장 일어나 스스로를 북돋은 뒤, 꿈속에서 보았던 천죽망월도와 그 그림에 대한 깨달음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떠올렸다. 모든 것이 세세하면서도 또렷했다.

    심협은 체내 법력을 운공해 두 다리의 경맥을 따라 경혈 하나하나에 뻗었다. 두 다리에서 경쾌한 느낌이 들었다.

    “꿈속에서의 힘겨운 수련이 결코 헛된 일은 아니었군!”

    그런 생각에 기뻐하며 심협은 사월보의 보법대로 발을 교차해 몸이 마치 바람에 날리는 대나무처럼 좌우로 흔들리게 했다.

    ‘가자!’

    심협은 속으로 힘차게 외쳤다.

    하지만 몇 걸음 내딛기도 전에 그의 두 다리에 깃든 법력이 돌연 흐트러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쿵!

    심협은 몇 바퀴 굴러 묵직한 소리와 함께 벽에 세게 부딪힌 후에야 주저앉았다.

    그는 그대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멍하니 있었다. 크게 다쳐서가 아니라 의혹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 어디가 잘못된 것인가?

    “아마도…… 너무 조급했던 게 문제인 모양이로구나.”

    심협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조하듯 말했다.

    방금 전 법력을 운공할 때, 경혈 사이의 변환과 법력 주입을 모두 공법에 나온 대로 진행했다. 그러니 문제가 없어야 했다. 하지만 막상 보법을 시전할 때, 꿈속에서와 달리 몸이 따라주지 않는 상황에 처했다. 다시 말해, 그의 몸이 생각을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사월보를 익히려면 다시 처음부터 수련을 시작해야만 한단 말인가? 그래도 황정경처럼 수련이 거의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니 조금 천천히 가면 되겠지.”

    심협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말했다.

    이어서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식해(識海) 안에서 다시 천죽망월도를 떠올리고는 신식으로 감상했다.

    이후 그는 매일 날이 밝는 대로 밀실에 가서 수련했다. 황정경은 전혀 진전을 보이지 않았기에 당분간 수련을 미루어둔 채 무명공법 수련에 전념했다.

    사월보는 틈틈이 수련했는데, 꿈속의 깨달음이 너무도 뚜렷해서인지 아니면 그가 이 공법과 잘 맞아서인지, 사월보 수련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순조로웠다. 며칠 전의 실패는 법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법력 운공을 제어하는 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그렇게 10여 일이 지나자 심협은 사월보의 입문 단계에 이를 수 있었다. 이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였다.

    이에 심협은 현실에서는 처음으로 사월보를 시도했고, 드디어 성공했다. 이동 속도와 거리는 꿈속에서와는 차이가 컸으나, 그는 충분히 만족했다.

    어느 날, 심협은 평소처럼 밀실에 도착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하지만 바로 수련을 시작하지 않고, 품속에서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원형 옥패를 꺼내 손바닥에 올렸다. 바로, 춘추관의 사숙조가 그에게 맡긴 순양보전이었다.

    옥패를 보고 있으려니 춘추관에서의 일들이 떠올라 심협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춘추관은 어떻게 됐을까? 사부님은 무사하실까?’

    어쨌거나 가장 도움이 절실했을 때 그를 도운 것은 춘추관과 사부가 아니었던가. 그들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미 한줌 흙으로 돌아갔을 테니 말이다.

    심협은 한참 후에야 상념을 거두었다.

    이내 그의 장심에 파란 빛이 일었고, 옥패는 허공으로 둥둥 떠올랐다. 곧이어, 그는 양손으로 연달아 현묘한 결인을 하며 계속 옥패를 두들겼다. 그러자 옥패에서 하얀 빛이 번득였고, 그 안에서 광막이 튀어나왔다. 광막에는 빽빽한 글자가 가득했으니, 바로 순양보전의 수련 구결이었다.

    심협은 속으로 그 글자들을 읽어 나갔다.

    ‘대개 순양(純陽)의 법이라 함은, 기(氣)를 화하여 정(精)이 되게 하고, 양(陽)을 화하여 강(罡)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영(靈)을 밖에서 받아들이고, 신(神)을 안에 감춰두어…….’

    무려 1만 자에 가까운 공법을 다 읽었을 때, 그는 기가 막혔다.

    예전에 백소천이 순양검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말하기를, 공법 전체는 12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제10층까지 수련을 완성하면 벽곡기 진입을 시도할 수 있다고 했다. 백소천은 또한 순양검결을 제11층까지 수련하고 벽곡기 진입을 시도할 경우, 법력이 두 배로 심후하고 순도가 높아진다고도 했다.

    ‘그리고 제12층까지 수련하고 벽곡기로 진입하면 법력은 세 배로 증가할 수 있어 이후의 수련에 큰 도움이 된다고도 했고…….’

    하지만 마지막 두 층의 공법은 이전 단계보다 몇 배는 수련하기 어려워진다. 백소천이 알기로는 사부와 풍양진인, 배반자 왕사백까지 세 사람 모두 제10층까지 수련하고 벽곡기에 진입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숙조는 순양검결 제11층까지 수련하고 벽곡기로 진입했다고 들었다.

    심협이 당시 제12층까지 수련하고 벽곡기에 진입한 사람이 있는지 물었을 때, 그런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바로 춘추관의 시조뿐이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가 지금 읽은 온전한 순양검결은 제12층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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