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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131화 (131/1,214)
  • 131화. 하룻밤의 악몽

    얼마 후, 안개 벽 반대편 언덕 지역 허공에 빛이 번득였고, 사람 머리만 한 녹색 빛이 허공에서 떠올랐다. 그 빛은 빠르게 확장되며 아래로 떨어져 순식간에 녹색 빛을 경계로 하는 원형의 녹색 법진이 바닥에 생겨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심협과 마을 사람들이 나타났다.

    심협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창백해진 얼굴로 비틀거리더니 주저앉았다. 제아무리 법진의 도움을 받았다 해도, 무려 스무 명을 데리고 이동하자니 법력의 소모가 매우 컸던 것이다.

    한편, 마을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흥분과 감격에 겨워 있다가 심협이 바닥에 주저앉자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심 선사, 왜 그러십니까?”

    “은공, 괜찮으십니까?”

    “이번 생애에 다시 바깥세상을 보게 될 줄이야……. 모두 심 선사님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감격했다. 어떤 이는 심협을 부축했고, 어떤 이는 너무 기뻐 눈물을 흘렸다. 20여 명이 각자 떠들어대니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는 괜찮소. 잠시 쉬면 회복될 거요. 다들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시오. 모든 사람이 모인 뒤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심협은 사람들을 안심시키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운공을 시작했다.

    지금 마을 사람들에게 심협의 말은 곧 법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를 에워싸고는 말없이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반 시진 정도 지나 법력이 모두 회복되자 심협은 다시 일어나 장수촌으로 돌아갔다.

    안개 벽 안쪽의 사람들은 모두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심협이 돌아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심협은 이후로도 바삐 움직여 하루 종일 열 번을 오간 후에야 모든 사람들을 안개 벽 밖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장수촌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본 사람들은 흥분과 감동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진관보를 비롯한 아이들은 호기심에 떠들썩해져 있었다.

    “심 도우,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오?”

    유일하게 침착한 마 파파가 물었다.

    “마땅한 곳을 찾아두었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심협이 앞장서고 마을 사람들이 뒤를 따랐다.

    * * *

    어두워진 후에야 장수촌 일행은 산을 따라 지어진 황폐한 마을에 이르렀다. 마을 한편에는 맑은 계곡이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집들은 오래되어 무너진 곳도 많았다. 마을 밖 농경지도 돌보는 사람이 없는 듯 잡초가 무성했다.

    “이곳은 쌍사촌(雙沙村)입니다. 10여 년 전에 마적이 들이닥쳐 마을 사람들이 거의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이렇게 폐허가 되었다는군요.”

    심협은 마을 사람들에게 마을의 내력을 설명해 주었다.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은 분부를 받기도 전에 바삐 움직여 집들을 정리하고 청소하기 시작했다. 약속한 것도 아닌데 마을에서 가장 좋은 집부터 찾아 정리했고, 그곳은 심협의 거처가 되었다.

    연달아 을목선둔을 시전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었던 심협은 거절하지 않고 들어가 깊은 잠에 빠졌다.

    * * *

    심협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날이 밝은 후였다. 간밤에 푹 잤더니 정신적인 피로도 모두 풀린 상태였다.

    문을 열고 나가 보니 아직 날이 밝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장수촌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누구도 힘든 내색조차 없었다. 아니, 오히려 오랜 세월 찾아볼 수 없었던 웃음이 가득했다.

    이 광경을 보고 있자니 심정이 복잡했다.

    심협의 원래 삶인 현실 세상은 천 년 전으로, 이런 끔찍한 일을 겪기 전이었다. 조정은 강성하고 부유했으며, 사람들은 각자 생업에 종사하며 평안히 살아갔다. 그러니 그가 장수촌 사람들의 심정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란 종종 잃고 난 후에야 그것이 행복이었음을 알고 그리워하며 그 소중함을 깨닫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가 장수촌 사람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그들이 바깥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는 모두 그들에게 달린 문제였다.

    심협은 방문을 닫고 침상으로 돌아와 앉아,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어차피 현실로 돌아가는 방법을 모르니 보상국 곳곳을 유람하며 견문을 넓힐 계획이었다. 하지만 최근 많은 일을 경험하면서, 심협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지금까지의 경험들로 미루어, 꿈속의 수련 수준이나 보물 등은 현실로 가지고 갈 수 없다. 그러나 꿈속에서 얻은 지식이나 깨달음, 경험 등은 가지고 갈 수 있지. 이를 잘 이용하면, 자질이 떨어지는 현실 세계의 나도 분명 큰 성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저 유람을 하기 보다는 차라리 최대한 수련에 매진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각종 경험을 쌓고 깨달음을 얻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심협은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황정경을 운공했다. 더 높은 경지로의 진입을 시도하지 않고, 황정경 연기기 단계의 수련을 자세히 살피고 깨달음을 반복적으로 시도해 보았다.

    그때, 그의 거처로 다가오던 마 파파가 대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심 선사께서는 안에 계시오?”

    그녀는 근처에서 집을 수리하고 있던 마을 사람에게 물었다.

    “네, 선사께서는 좀 전에 나와서 한번 둘러보시고는 다시 들어가셨습니다.”

    마을 사람의 대답에 마 파파는 속으로 안도했다. 그녀는 혹시라도 심협이 떠났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어디 가서 다른 일하지 말고 여기를 지키다가 심 선사께서 무슨 분부라도 하시면 바로 내게 와서 알려야 하오.”

    마 파파는 그렇게 당부하고는 떠나갔다.

    * * *

    장수촌 사람들이 쌍사촌에 자리를 잡은 지도 반년이 흘렀다.

    그 사이 쌍사촌은 완전히 탈바꿈했다. 곳곳에 무너져 있던 집들은 모두 수리를 마쳤고, 길도 다시 내 청석을 깔았으며, 마을을 둘러싼 견고한 울타리를 세웠다. 주위의 버려진 농경지도 다시 개간해 농작물을 심었다. 곳곳에 활기가 넘쳤다.

    마을의 가장 큰 집. 그곳에는 심협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의 몸은 금빛으로 에워싸인 채였는데, 그 두께가 몇 척이나 됐다. 그 안에는 세 마리의 용과 세 마리의 코끼리 환영이 빠르게 노닐고 있었다.

    심협이 양손을 빠르게 결인하자 몸 주위의 금색 빛이 돌연 강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갑자기 불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것이 마치 심장 박동 같았다.

    금색 빛은 그렇게 36회를 움직였고, 돌연 폭발하여 금빛 물결이 되어 사방으로 튀었다. 이 물결이 닿은 벽들은 두부처럼 무너져 내렸다.

    콰르릉!

    순식간에 집 전체가 무너졌으나, 사방으로 튄 파편들은 심협을 감싼 금빛 때문에 몇 척 앞에서 튕겨나갔다.

    근처에 있던 마을 사람들은 멀리서 이 모습을 바라봤는데, 두 눈에는 경외의 빛이 가득했다. 이들에게 심협은 초월적인 존재, 심지어 오랫동안 말로만 듣던 방촌산의 선인들보다 더 위대한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다.

    심협이 잠시 눈을 감고 있으니, 몸에 일었던 금색 빛이 서서히 거두어졌다.

    그가 지금 발산하는 기운은 예전보다 한참 더 거대해진 상태였다. 황정경이 정진되어 출규(出竅) 중기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심협은 두 눈을 뜨며 미소를 지었다. 단순히 수련이 정진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그는 그동안 수련에 그리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았다. 그의 절대적 자질로 반년 동안 수련에 매진했다면 고작 출규기 중기에 머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주로 연기기부터 벽곡기까지의 깨달음을 다시 자세하게 익히는 데 힘썼다. 또한 자질이 떨어지는 사람의 관점에서 수련의 관문 문제를 생각해보려 했다. 덕분에 원하는 만큼 깨달음을 얻었으니, 현실로 돌아간다면 수련하기 훨씬 수월할 것이다.

    눈을 뜬 심협은 주변이 엉망이 된 것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영락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그녀가 사용하고 있는 보법은 바로 사월보였다.

    반년 동안 심협은 영락에게 방촌산의 부적 다섯 가지와 사월보, 을목선둔까지 전수했다. 오성(悟性)이 뛰어난 데다가 이전에 수련한 공법도 모두 방촌산에서 전해진 것이다 보니 영락은 수월하게 전수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그녀의 실력도 빠르게 늘어, 이미 혼자서도 여러 번 요괴들을 물리쳤다. 심지어 근처 다른 마을들을 도와주기도 해 그들은 영락을 ‘영 여협(英女俠)’이라 칭송했다.

    영락은 진관보를 포함해 인근 마을에서도 자질이 뛰어난 아이들을 모아 공법을 전수하기 시작했고, 제법 큰 효과를 보고 있었다.

    또한 심협은 황정경의 구결을 영락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영락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 다소 의아한 일이었지만, 황정경은 너무도 현묘하기 때문에 쉽게 전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심협 자신도 원숭이의 몸에 빙의하여 방촌산 조사의 가르침을 직접 듣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터였다.

    심협은 억지로 영락이 깨닫게 만들도록 하기 보다는 다른 공법들을 전수해주었다.

    영락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심협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돌연 눈앞이 어그러지더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 * *

    똑! 똑! 똑!

    새벽, 누군가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심협, 일어났는가?”

    곧이어 다급하게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협은 침상에서 눈을 떴다. 그의 동공이 미세하게 수축됐다가 커졌고, 침상의 장막이 보였다. 심협은 우선 바짝 긴장했다가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

    “……돌아왔구나.”

    심협은 길게 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손으로 침상을 딛고 일어나 앉았다. 이어서 단전 안의 법력 변화를 느껴보았으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역시 모든 것은 예전 그대로였다. 꿈속의 경지는 역시 꿈속의 것이었다.

    문을 두드린 사람은 백소천이었다. 심협은 짧게 대답하고는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왜 침상 위에 나와 있는지 알 수 없는 옥침을 석합에 챙겨 넣고는 일어나 문을 열었다.

    백소천은 심협의 표정이 나른한 표정을 보고는 잠이 덜 깬 듯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그렇게 빨리 자놓고는 어찌 이리 기운이 없는가? 혹시…… 어젯밤에 나 몰래 진회하에서 놀고 온 건 아니겠지?”

    “휴우, 차라리 그런 거라면 좋겠소. 어제 밤새 악몽을 꾸었더니 죽을 맛이오. 방금 백형이 나를 부를 때에도 악귀가 내 목숨을 빼앗으러 온 줄 알았소.”

    심협은 하품을 하며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꿈속에서는 제법 긴 시간을 보냈건만, 어째 현실에서는 고작 하룻밤이 지났단 말인가? 적응하기 힘들군. 그나저나 영락과 진관보,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어쨌든 장수촌은 벗어났으니 잘 살아가겠지? 몇몇 아이들은 수선자가 되었을 거야.’

    “또 무슨 생각에 그리 넋이 나가 있는 겐가?”

    백소천의 말에 심협의 사색은 끊겼다.

    “별것 아니오. 꿈이 너무나 현실 같아서 잠깐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소.”

    심협은 진실과 거짓을 반쯤 섞어 답했다.

    “싱겁긴. 이제 정신 차리고 세수하고 오게나. 아침 식사를 하러 가지. 그리고 내 오늘 자네에게 건업성을 구경시켜 주겠네.”

    백소천은 심협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심협은 원래 온종일 방에 머물며 꿈속에서 배운 공법들을 수련해보고 싶었으나 백소천의 성의를 거절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실제로 식사 후에 백소천을 따라 백부를 나섰다. 깜찍한 녹수도 함께였다.

    반나절 동안 건업성을 돌아보았는데, 백소천보다는 녹수가 주인처럼 손님을 접대했다. 건업성의 맛있는 식당과 재미있는 곳은 모두 꿰고 있어서 두 사람을 인도했던 것이다.

    심협은 번화한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우몽, 우혁 부자가 목숨 걸고 지키던 봉지성이, 뒤이어 방금 떠나온 방촌산과 장수촌도 떠올랐다.

    그는 이미 마겁일(魔劫日)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리 번화하고 화려한 것도 덧없어 보였다. 그저 마겁을 막을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방촌산처럼 기반이 단단한 선가 종문(宗門)에서도 막지 못한 마겁을 자신이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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