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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130화 (130/1,214)
  • 130화. 이동

    “그렇다면 우선 전숙께서 말씀하신 유역성으로 가봐야겠군요. 어떻게 가야 합니까?”

    심협은 전숙을 안심시키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유역성은 우리 마을 서북쪽에 있소. 한 80리 정도 가야 할 걸? 마을 뒤쪽 관도를 따라 서쪽으로 쭉 가다 보면 나올 게요.”

    전숙이 마을 입구를 가리키며 답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심협은 정중하게 공수했다.

    “에이, 그저 아는 거 몇 마디 해준 것뿐인데 고맙긴……. 얼른 가시오. 응취산의 요랑들이 한동안 안 나타나긴 했다지만, 대신 야생 늑대들이 곳곳에 출몰하기 시작했소. 특히 밤에는 매우 위험하지.”

    전숙은 친절하게 당부하고는 다시 땔나무를 메고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전숙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던 심협이 손가락을 굽혔다 튕겼다. 그러자 법력 한 줄기가 날아가 소리 없이 전숙의 오른쪽 다리의 혈해혈(血海血)로 들어갔다.

    그 순간, 전숙은 오른쪽 무릎 근처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오랜 세월 무리하면서 생긴 무릎 통증이 순식간에 거의 나아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숙은 걸음을 멈추고는 두 다리를 움직여보았다. 통증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두 무릎이 따뜻하고 매우 편안했다.

    전숙은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는데, 방금 전까지 그곳에 서 있던 젊은이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이고, 내가 대단한 분을 만난 모양이구나! 멀리서 오신 선사이신가?”

    그는 화들짝 놀라 황망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무렵, 심협은 이미 전라촌 밖에 이르러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망설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천랑이 산을 삼켰다는 말은 그러려니 이해할 수 있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일은 대부분 과장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상한 점은 따로 있었다. 전숙의 말대로라면 분명 요괴가 수시로 마을을 습격하고 있을 텐데도 전라촌처럼 인구도 적고 스스로 지킬 힘이 없는 곳이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이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선사들이 수시로 나서서 지켜준다는 것과 요괴들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것.

    심협은 바로 장수촌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근 다른 마을의 상황도 알아보기로 했다.

    * * *

    심협이 하얀 안개 벽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반나절 동안 알아본 결과, 상황은 거의 전숙의 말대로였다. 요괴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가운데 백성들의 삶은 매우 힘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수백 년 전부터 시작됐다.

    마을 사람들이 묘사한 것으로 판단해볼 때, 이 근처에 출몰하는 요괴들은 대부분 연기기 수준일 것이다.

    심협은 주문을 외며 을목선둔을 시전했다. 그의 몸은 한번 번득이더니 안개 벽 안으로 사라졌다.

    * * *

    잠시 후, 장수촌 근처에 녹색 빛이 번득이더니 심협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장수촌으로 향했다.

    마을 입구의 훼손되었던 울타리는 다시 세워졌지만, 완전히 재건된 것은 아니었다. 대신 입구를 지키는 장정은 배로 늘어 경비가 삼엄해진 상태였다. 그러니 이들은 금세 심협을 발견했다.

    “누구냐?”

    누군가의 외침에 이어 울타리 안에서 활시위 당기는 소리가 들려왔고, 빽빽한 화살이 심협을 향했다.

    “모두 멈춰! 심 선사께서 오셨다. 문을 열어라!”

    심협을 바로 알아본 청우가 급히 외쳤다.

    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활을 풀었다.

    마을 문은 아직 수리가 끝나지 않아 울타리에 걸려 있었기에 장정들이 힘을 합친 끝에 겨우 열 수 있었다.

    “마 파파를 내 거처로 모셔와 주게. 아주 중요한 일일세.”

    심협은 마을로 들어서며 청우에게 말했다. 그리고 청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청우는 급히 마 파파의 거처로 달려갔다.

    심협은 금세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대문을 들어서자 마당의 큰 뽕나무 아래에 누군가 가부좌를 틀고 방석에 앉은 채 눈을 감고 수련하고 있었다. 바로 영락이었다. 그녀를 간호하던 깡마른 소녀는 멀리 떨어져 대기하고 있었다.

    영락의 머리 위로 어슴푸레한 푸른빛의 청봉검이 떠 있었다. 검이 서서히 선회했는데, 신묘한 공법을 수련하고 있는 듯했다.

    주위의 천지영기가 영락에게 모여들었고, 그녀의 몸에서는 푸른 빛이 일었다. 온몸에서 청봉검과 같은 삼엄한 기운이 발산되고 있었으니, 그녀가 마치 푸른 빛을 사방으로 발하는 보검이 된 것만 같았다.

    이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심협은 감회가 새로웠다.

    그때, 청봉검에서 돌연 윙 하는 소리가 울리면서 검 끝이 심협을 향했다. 동시에 천지영기의 흡수가 멈추었다.

    곧이어 영락은 몸을 한번 떨더니 두 눈을 떴다.

    “심 대형, 돌아오셨군요.”

    심협을 발견한 영락은 급히 일어섰다.

    “많이 회복된 것 같아 다행이구려.”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모두 심 대형 덕분이지요. 심 대형이 아니었다면 저는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수련이 모두 망가졌을 것입니다. 큰 은혜는 말로 감사를 표하는 것이 아니라던가요? 심 대형께서는 앞으로 시키실 일이 있으면 분부만 하십시오.”

    영락은 심협에게 정중히 예를 표하며 말했다.

    “별일도 아닌데 그럴 것 없소. 아직 부상이 다 낫지 않았으니 무리하지 말고 어서 앉으시오.”

    심협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서 있지도 못할 정도는 아니에요.”

    영락은 미소를 짓고 답하며 손을 결인했다. 그러자 머리 위에 떠 있던 청봉검이 맑은 소리를 울리며 푸른 빛줄기가 되어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이 광경에 심협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몸 안에 넣을 수 있는 법기란 실로 드물기 때문이다.

    “이 청봉검은 마을의 어르신께서 남기신 보물입니다. 장수촌 선사들에게만 전해져야 한다는 마을의 규칙 때문에 대형께 말하지 못했습니다. 부디 개의치 말아주세요.”

    영락은 심협의 시선을 의식하며 해명했다.

    “전혀 개의치 않으니 영 도우도 개의치 말고 우선 앉아서 쉬시오. 이따가 마 파파께서 오시면 내 긴히 할 이야기가 있소.”

    심협은 먼저 가부좌를 틀고는 운공하여 법력을 회복했다.

    영락은 잠시 그런 심협을 바라보다가 따라서 가부좌를 틀었다.

    잠시 후,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심 도우, 이 노인네가 해야 할 일이 있소? 분부만 하시오.”

    마 파파는 청우의 수행을 받으며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말했다.

    “마 파파, 영 도우. 내 이전에 방촌산에 올랐을 때 사월삼성동에 들어갔다가 서적들을 발견했는데, 거기서 을목선둔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심협은 일어나서 마 파파와 영락을 번갈아 보며 그렇게 말했다.

    “을목선둔? 마을 어르신께 듣기로는, 매우 심오한 둔술이라고 하였는데…….”

    마 파파는 다소 놀란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맞습니다. 매우 정묘하더군요. 을목선둔을 완성한 후에 마을 밖 안개 벽을 뚫어보았는데, 조금 어려움은 있었지만, 결국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심협의 말이 떨어지자 그 자리에 있던 네 사람의 눈이 주먹만 해졌다. 청우는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 채 입을 다물지 못했고, 영락과 깡마른 소녀는 손으로 떡 벌어진 입을 가리고 있었다.

    마 파파는 상대적으로 평온했으나, 그녀의 탁한 두 눈에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시, 심 도우…… 그, 그 말이 사실이오?”

    한참 후에야 마 파파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이런 중대한 사안을 제가 어찌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제가 바깥을 살펴본 바, 그곳에도 요괴가 출몰하고 백성들의 삶은 힘겨웠으나 이곳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안개 벽 밖으로 이주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고 싶으니 마을 사람들을 모두 모아 주십시오.”

    심협은 차분하게 말했다.

    영락 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고, 마 파파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벌린 채로 떨기 시작했다.

    “마 파파!”

    영락이 다급히 달려가 마 파파를 부축했다.

    “하늘이 굽어 살피셨구나! 우리 마을이 수백 년 만에 마침내…… 마침내 해를 볼 수 있는 날이 왔어!”

    마 파파는 흥분된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다른 세 사람도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심 도우, 이 은혜는 우리 장수촌 사람들이 영원히 기억할 것이오. 정말 이보다 더 감격스러울 수가 없소.”

    마 파파는 앞으로 두 걸음 나오더니, 심협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감사합니다. 심 대형!”

    “감사합니다. 심 선사!”

    영락 등도 절을 올리며 예를 갖추었다.

    “아, 이러지 마십시오. 저 또한 장수촌 사람 아닙니까?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이리 큰 예는 받을 수 없습니다.”

    심협은 급히 다가가 한 손으로 마 파파를 부축했고, 다른 한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자 무형의 힘이 솟아나 영락 등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지체할 수 없으니 어서 사람들에게 전해 주십시오. 짐을 꾸리되, 너무 많은 물건은 챙기지 말라고요. 저는 우선 안개 벽이 있는 곳으로 가 미리 준비를 해두겠습니다.”

    이 말을 남긴 채, 심협은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청우, 소접, 너희는 어서 가서 사람들에게 알리거라!”

    심협이 떠나자, 마 파파는 바로 청우와 깡마른 소녀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기쁘게 대답하고 달려갔다.

    마 파파와 영락도 곧장 어딘가로 향했다.

    한편, 심협은 금세 안개 벽 근처로 돌아와 지세가 평평한 곳을 찾아 칠성필과 방촌산에서 얻은 재료들을 지면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작업은 약 한 시진 후에야 끝났는데, 어느새 반경 10여 장에 이르는 둥근 법진이 생겨나 있었다.

    을목선둔 법결 뒤에 딸려 있던 을목진이라는 법진으로, 용도는 매우 단순했다. 을목선둔의 효과를 확산시켜 진 안에 있는 사람들까지 함께 둔술을 시전할 수 있도록 해주는 법진인 것이다. 물론 그만큼 법력의 소모는 클 수밖에 없다.

    을목진을 다 만든 심협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금세 밤이 지났고, 하늘 한쪽 끝이 점점 밝아왔다.

    두 귀가 미세하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심협은 두 눈을 뜨고 일어나 장수촌을 방향을 바라봤다. 어수선한 발소리에 이어 장수촌 사람들이 크고 작은 봇짐을 멘 채 한 줄로 몰려오고 있었다. 총 187명이었다.

    “심 도우, 우리 마을 사람들 모두 왔소.”

    마 파파는 좌우로 청우와 영락의 부축을 받으며 가장 앞에서 걸어왔다. 나머지 사람들은 10여 장 밖에 멈춰 서 있었다. 모두 심협의 제안을 전해 들은 듯 표정은 흥분과 희망으로 가득했다. 심협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는 경외심과 죄책감 그리고 그보다 더 큰 감격이 담겨 있었다.

    “마 파파, 내 법진을 설치했으니 다른 사람들과 함께 둔술을 시전하여 안개 벽을 뚫고 나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 번에 많아야 스무 명 정도만 이동할 수 있고, 중간에 잠시 회복할 시간도 필요합니다.”

    심협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더욱 흥분해 순식간에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서두르지 마시오! 법진을 망가뜨려서는 안 되오! 청우, 네가 정리하거라.”

    마 파파가 크게 소리쳐 사람들을 제지했고, 명을 받은 청우는 곧장 스무 명을 선정해 우선 법진에 세웠다.

    심협은 숨을 깊이 들이켜고는 법진 안에 섰다. 이어서 그가 주문을 외우자 녹색 빛이 발아래에서 솟았다. 이 빛은 법진 안의 지면에 녹아들었고, 법진 전체가 밝은 녹색 빛을 발산해 법진 안의 모든 사람들을 에워쌌다.

    대기가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소용돌이가 되었다.

    “가자!”

    주문을 끝낸 심협이 결인한 손을 찍자, 법진 전체의 녹색 빛이 맹렬히 빛났다. 그러자 진 안의 사람들이 환영처럼 흐릿해지더니 금세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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