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천랑(天狼)
심협은 신식으로 재빨리 비술을 다 읽어보고는 크게 기뻐했다.
이 을목선둔은 진정한 둔술(遁術, 몸을 감추는 법술)로, 서천호가 번개의 힘으로 몸을 숨기는 것과 비슷했다. 이는 완성하고 나면 주변 초목의 힘을 빌려 순식간에 이동도 가능한, 매우 신묘한 법술이었다.
본래 심협은 수선(修仙)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지만, 방촌산에서 여러 서적을 본 이후로는 지식이 조금 늘었다.
둔술도 법술처럼 분류가 가능한데, 주로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 오행(五行)으로 분류한다. 둔술은 시전하는 사람이 순식간에 다른 환경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해주는 만큼 매우 실용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강력한 적을 만나 위기에 처했을 때는 목숨을 구할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을목선둔은 목(木) 속성 둔술이라 초목의 기운이 농후한 곳에서 가장 효과가 크다. 사막이나 바다 속에서도 시전할 수는 있으나 효과는 크게 떨어진다.
이외에도 요괴 또는 타고난 자질이 남다른 수사라면 특수한 둔술을 시전할 수 있다. 서천호가 사용한 둔술이 이 경우였다.
심협은 흥분을 억누르며 눈을 감고 을목선둔을 깨닫기 위해 집중했다.
을목선둔의 법결은 내용이 무척 복잡해 답수결이나 피수결(避水訣)보다 깨닫기가 훨씬 어려웠다. 대신 을목선둔은 깨달음만 얻으면 수련 수준과 무관하게 시전이 가능하다. 이런 점은 통령역요 술법과 비슷했다.
하지만 수련 수준이 높을수록 순간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더 길어진다.
잠시 후, 심협은 두 눈을 뜨고는 한 손을 가슴 앞에서 결인하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발아래에 하얀 빛이 일더니 달 모양 빛 그림자가 다시 나타났다. 동시에 사방의 허공에 녹색 빛이 떠올라 심협을 향해 솟구쳤다.
녹색 빛은 점점 더 많이 모여들었고, 이내 심협의 몸 절반 정도를 에워쌌다. 이제 심협의 몸은 약간 투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심협은 어느 순간 주문 외는 것을 멈추고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자 그를 감싼 녹색 빛이 번득였고, 다음 순간 심협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때, 심협의 사지는 반투명한 녹색으로 변해 있었다. 또한 구름처럼 흩날리고 있었는데, 조금도 힘이 들지 않았다. 그의 시야는 무수히 많은 녹색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사방에서 거대한 힘이 몸을 잡아 끌어 앞으로 빠르게 밀려갔다.
하지만 이러한 상태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심협의 몸은 금세 가라앉았고, 두 발이 이내 땅에 닿았다. 시야에 가득했던 녹색 빛도 모두 흩어져 사라지면서 시야도 차차 원래대로 돌아갔다.
심협은 놀라 사방을 둘러봤는데, 그곳은 낯선 동굴이었다. 저 앞으로 우뚝 솟은 거대한 산봉우리가 보였으니, 바로 방촌산이었다.
하지만 방촌산은 무척 크기 때문에 지금 심협은 자신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장수촌 근처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심협은 방향을 가늠해 산기슭을 따라 걸었다. 그러는 동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사월보를 수련하던 곳에서 3리(*1리는 약 400미터)는 넘게 온 것 같군.”
을목선둔을 시험해본 것뿐인데 그 전송 거리가 상상을 한참 뛰어넘어 서천호의 둔술 따위는 비교조차 되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방촌산의 무성한 초목 덕이기도 했다.
“다만 서천호의 둔술은 거의 순식간에 시전할 수 있으니, 이는 을목선둔이 미치지 못하는 점이지. 일장일단이 있는 게로군.”
심협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는 다시 을목선둔을 운공했다.
이내 발아래 녹색 빛이 일더니 금세 몸 전체를 감쌌다. 이어서 몸이 한번 번득였고, 그는 또다시 사라졌다.
* * *
심협의 눈에 녹색 빛이 번득였다가 다시 시야가 정상으로 회복됐을 때, 그는 어느 공터에 이르러 있었다. 주변에는 안개가 가득했고, 저 앞으로는 무수히 많은 안개가 땅 위에서 뭉쳐 있었다. 방촌산을 담장처럼 에워싸고 있는 안개 벽이분명했다.
안개 벽은 여전히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마치 천연의 요새가 앞을 가로막고, 외부 세계와 이곳을 단절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더 앞으로 가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여기 머리를 처박을 뻔했구나!”
심협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법결 내용대로라면, 을목선둔은 수사가 스스로를 초목의 기운과 잠시 융합시켜 아무런 방해 없이 둔행(遁行)하도록 한다는데, 이 안개도 뚫을 수 있을까?”
안개 벽을 바라보던 심협의 머릿속에 돌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안개 속에서는 방향을 분간할 수 없으니 길을 잃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을목선둔을 익혔으니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저승 가는 길로 통하는 구멍이 떠올랐다. 그 구멍이 아직도 그 자리에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지난 몇 년간 방촌산을 나갈 방법을 찾았으나, 수련에 몰두하느라 그 일은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심협은 지금 출규기(出竅期)에 이르렀으니 이전에 들어왔던 구멍을 통해 저승길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란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가공할 흑산노요를 상대할 수 있을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우선 을목선둔으로 안개 벽을 뚫을 수 있을지, 그것부터 알아봐야겠구나. 이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봐야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심협은 바로 둔술을 시전하는 대신 우선 안개 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동시에 신식을 그 안으로 들여보내 안개 벽 너머의 상황을 살폈다.
그런데 신식은 안개 벽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무형의 힘에 제지당해 더는 들어가지 못했다.
심협은 신(神)과 기(氣)를 집중하여 신식의 힘을 더욱 키워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러나 안개 벽 안의 제지 역시 점점 강해졌다.
신식은 30여 장을 더 뻗은 후로는 조금도 더 나아갈 수가 없었고, 앞에도 안개가 잔뜩 있어 도대체 얼마나 깊은지 알 수도 없었다.
심협은 미간을 찌푸렸다. 을목선둔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리를 리(里)로 계산해보니 시도해볼 만은 했으나, 안개 벽 안의 금제가 을목선둔에도 제약을 가할지는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참. 이리 많은 것을 따져봐야 무엇하겠는가? 성공할 수 있을지는 시도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을…….”
심협은 찌푸렸던 미간을 다시 펴고는 을목선둔을 운공했다. 그의 두 발에 녹색 빛이 일어 곧 몸 전체를 감쌌다. 이어서 그가 한 걸음 내딛자 녹색 빛이 번득였고, 이내 심협의 모습은 그곳에서 사라졌다.
심협은 또다시 몸이 반투명한 상태가 되고 녹색 빛으로 가득한 세상을 누비는 기묘한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앞으로 나아가기가 무척 힘들었다. 하얀 안개가 눈앞에 나타나 을목선둔을 시전하기 어렵도록 방해한 것이다. 마치 거미줄이 휘감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심협은 차게 코웃음 치고는 체내의 법력을 전부 운공하였다. 그러자 몸 위로 녹색 빛이 번득이더니 순식간에 하얀 안개를 뚫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하얀 안개는 너무도 많아, 한 겹을 뚫으면 또 한 겹이 나타났다. 또한 안개들을 뚫고 나갈 때마다 법력이 적잖이 소모됐다. 출규기(出竅期) 수사답게 법력이 심후하여 큰 지장은 없었지만, 벽곡기 수준이었다면 진즉 법력이 부족해졌을 터였다.
법력이 2할 정도 소모되었을 때, 눈앞의 하얀 안개가 갑자기 사라졌다. 거의 동시에 심협은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고, 나아가는 속도도 크게 증가했다.
다음 순간, 그의 시야가 크게 어그러졌다가 다시 뚜렷해졌다.
그곳은 언덕 위였다. 사방으로 이어진 언덕 어디에서도 녹지는 찾아보기 힘든, 자못 황량한 곳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안개 벽은 뒤로 1리 정도에 위로는 하늘까지 솟아 있었다. 좌우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펼쳐져 있어 장수촌에서 보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늘 또한 푸르러 장수촌의 어두운 하늘과는 전혀 달랐다. 하얀 구름 몇 점이 떠 있고, 서쪽으로 기운 태양이 근처 하늘을 옅은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정말 나왔단 말인가!”
심협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깊이 들이켰다.
공기는 안개 벽 안보다 훨씬 신선했다.
예전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파란 하늘과 사방의 황량한 언덕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심협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사방을 자세히 살폈다.
저 먼 곳에는 나지막하고 완만한 산봉우리들이 솟아 있었다.
심협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장수촌으로 바로 돌아가는 대신 산봉우리 쪽으로 향했다.
단숨에 30여 리를 나아가자 지형은 점점 평탄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활한 벌판이 펼쳐졌다. 그곳에는 개간된 농경지가 제법 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황폐해진 상태였다. 농작물이 심어진 곳은 얼마 되지 않았다.
시선이 닿는 곳에 몇몇 마을도 어렴풋이 보였다. 마을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고즈넉이 피어올랐다.
심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고, 금세 가장 가까운 마을에 도착했다.
장수촌보다 조금 더 큰 마을이었다. 하지만 많이 쇠락한 마을인 듯 대부분의 집들이 비어 있었고, 상당수는 무너져가는 것이 퍽 침울한 분위기였다.
“어느 마을 녀석이냐? 이리도 늦은 시간에 밖에서 돌아다니다니, 야생 늑대가 잡아갈까 두렵지도 않은 게냐?”
누군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잿빛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있었다. 쉰 전후로 보이는 그의 손에는 나무하는 칼이 들려 있었고, 등에는 땔나무를 메고 있었다. 사내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심협을 살펴보고 있었다.
“저는 심협이라 합니다. 그만 길을 잃었군요.”
심협은 중년 남자에게 공수하며 말했다.
“외부에서 왔다고? 젊은 친구가 담도 크구려. 요즘 같은 세상에 먼 길을 다닐 수 있다니.”
중년 남자는 등에 멘 땔나무를 내려놓고, 위아래로 심협을 훑어보며 말했다.
“제가 무예를 좀 익혀 제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요?”
심협이 물었다.
“나는 전(田)씨요. 괜찮다면 나를 전숙(田叔)이라고 부르시오. 이 마을은 전라촌(田羅村)이라오. 전씨와 나(羅)씨만 살고 있거든. 하하하!”
전숙의 껄껄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사교성이 좋은 사람인 듯했다.
“전숙, 전라촌은 꽤나 넓은데 어째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심협이 의아한 듯 물었다.
“이게 다 그 요괴들 때문 아니겠소!”
전숙은 분개한 듯 이를 갈았다.
“이곳에도 요괴들이 설칩니까?”
심협은 다소 긴장하며 물었다.
“요즘 요괴 없는 곳이 어디 있겠소? 서쪽 응취산(鷹嘴山)의 요랑(妖狼)들이며 동쪽 용향령(龍向嶺)의 황서랑정(黃鼠狼精)까지……. 마을로 내려와 가축들을 잡아가고 논밭을 망가뜨리는 것은 그나마 좀 낫지. 사람을 잡아먹기도 한다오! 많은 사람이 유역성(柳驛城)으로 이사했소. 그곳은 선사가 지키고 있어 요괴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니까.”
전숙은 씁쓸한 듯 웃었으나 그 말투에는 부러움이 묻어났다.
“그리 되면 마을에 남은 사람들은 더욱 위험해지는 것 아닙니까? 요괴들이 오면 어떻게 막으십니까?”
“물론 못 막지. 선사들이 주기적으로 나서서 요괴들을 손봐주시지 않았으면 우리는 정말 살아남을 수도 없었을 거요. 뭐, 여전히 툭하면 사람이나 가축이 실종되고 있지만……. 그나저나, 젊은 친구는 어디로 가시오?”
전숙이 고개를 내저으며 물었다.
“저는 장수촌이라는 곳을 찾고 있습니다. 혹시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전숙은 그 말에 순간 놀랐다가, 두려운 표정으로 양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장수촌? 몇 백 년에 천랑(天狼)이 한입에 삼켜버렸다는 마을 아니오! 아이고, 거긴 갈 수 없소.”
“아시는 곳입니까?”
심협은 곧장 되물었다.
“어르신들이 말씀하시기를, 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다 보면 선산(仙山) 아래 마을이 하나 있는데, 수백 년 전에 검은 천랑이 하늘에서 내려와 선산과 마을을 한입에 삼켜버렸다더군. 지금은 하얀 요무(妖霧)가 뒤덮고 있어서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고 하니 절대 그곳으로는 가지 마시오!”
전숙은 두려운 눈빛으로 가볍게 몸까지 떨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