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사월보(斜月步)
마 파파는 한참이나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마치 세상에게 버림받은 듯 처량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고개를 들었고, 어느덧 안색은 평온해진 상태였다.
“실상을 알려주어 감사하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이야기를 하지 말아 주시오.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살아갈 의지를 잃을 게요.”
심협은 마 파파가 금방 마음을 추스르는 모습에 탄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우의 은혜는 갚을 길이 없으니, 이 노인네의 절을 받으시오!”
마 파파는 심협에게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 그리고 영락은 위험한 고비는 넘겼으나,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간호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대신 간호할 사람을 보내주시겠습니까?”
심협은 급히 마 파파를 일으켜 세우며 화제를 돌렸다.
“물론 그리해야지요.”
마 파파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제야 심협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곁채에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황정경울 운공했다. 서천호와의 결투에 이어 영락을 살리느라 심협의 법력은 이미 바닥난 상태였던 것이다.
잠시 후, 법력을 모두 회복한 그는 칠성필을 꺼냈다. 그리고 산에서 가져온 것들을 다시 살펴봤다.
“이제 이 그림의 비밀만 알아내면 되겠구나.”
심협은 허공에 한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하얀 빛이 번득이더니 돌돌 말려 있는 그림 한 폭이 나타났다. 바로 천죽망월도였다.
심협은 그림을 펼치고 자세히 살폈다.
그림에는 하얗고 둥근 달과 비스듬히 선 푸른 대나무들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잠시 후, 시야가 어그러지더니 둥근 달과 대나무들이 갑자기 실재하는 것처럼 변해 눈앞에 나타났다.
환한 달빛 아래로 미풍이 부는 것 같았고, 대나무들은 하나하나 흔들리고 서로 부딪치며 솨아아 하는 소리를 냈다. 땅에는 그림자와 달빛이 교차해 명암(明暗)을 만들어냈는데, 끊임없이 모양이 변화했다.
심협은 보름달과 대나무는 무시한 채 그림자에만 온 시선을 집중했다. 이전에 이 그림을 보았을 때, 변화하는 그림자에 어떤 비밀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무형의 사람이 기묘한 보법(步法)을 수련하는 것만 같았다. 더욱이 지금은 그때보다 수련 수준이 올랐고, 출규기에 진입하면서 혼의 힘이 크게 증가한 덕에 이전에는 알기 어려웠던 부분도 확 트이는 듯했다.
“역시 보법이 맞구나! 과연 백가의 추풍보 보다도 고명할까?”
심협은 흥분한 시선으로 변화하는 달그림자를 따라갔다.
한참 후에야 그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주위의 환상은 모두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때 그는 그림 속의 보법 변화를 모두 기억에 새겨둔 상태였다.
잠시 후, 그는 두 눈을 뜨고 일어나 천죽망월도를 거두고 이내 그림의 보법에 따라 걸어보았다.
이 보법은 역경(易經)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보법의 변화가 역경의 64괘 방위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법의 변화는 매우 기이해, 어떤 때에는 보법대로 걷고 나면 그다음 방위를 밟을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펄쩍 뛰어 다음 보법을 밟아야 했는데, 그렇게 되면 걸음이 매우 어색해졌다. 더욱이 처음 보법을 밟을 때는 너무도 느렸기에 보고 있자면 우스꽝스러울 정도였다.
다행히 심협은 황정경을 수련한 후로 육신이 놀랍도록 민첩해져 있었기에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자연히 보법도 점점 더 빨라졌다.
그는 차차 이 보법에 담긴 현묘함을 깨달아갔고, 보법 중 이상했던 부분에 대해서도 점점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사실 그 부분들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그 신묘함이 남달랐던 것뿐이었다.
게다가 이 보법대로 걸을 때에는 체내의 법력도 함께 이동해 다리의 경맥으로 흘렀다. 자연히 보법은 더욱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심협은 이 신묘한 보법에 완전히 빠져들어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무아지경(無我之境)의 상태가 되었다. 보법은 변화무쌍하게 변환하며 속도가 점점 빨라져 방안에는 그의 모습이 귀신처럼 번득일 뿐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는 거의 선 하나가 되어갔고, 그의 뒤로 남겨진 것은 모호한 잔영들이었다.
잠시 후, 빠르게 내달리던 그의 모습이 갑자기 멈춰 서자 뒤를 따르던 잔영들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다.
“통쾌하구나!”
심협은 후련한 듯 외쳤다.
이 보법은 이제 막 익히기 시작했는데도 속도가 추풍보와 비슷한 수준까지 이르렀다. 또한 변화가 무쌍해 추풍보에 비해 민첩하게 이리저리 피하는 데 유리할 것이었다.
사실 심협이 이토록 쉽게 수련한 것은 황정경을 수련한 덕이었다. 그의 몸이 강하면서도 유연해진 덕에 보통 사람이라면 하기 어려운 동작도 수월하게 해냈던 것이다.
방이 좁아 마음껏 보법을 펼칠 수가 없었기에 심협은 마당으로 나갔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한밤중이었다.
심협은 신식을 안채로 들여보내 훑어보았다. 영락은 아직 깨어나지는 않았지만, 호흡은 일정한 것이 한결 좋아진 상태였다. 침상 옆에는 깡마른 소녀가 앉아서 영락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있었다. 보법 수련에 빠져들어 있던 심협은 몰랐으나, 마 파파가 영락을 간호하도록 보낸 사람이었다.
신식을 거둬들인 심협은 거처를 벗어나 조용히 마을 밖으로 달려갔다. 입구의 문을 거치지 않고, 마을 뒤를 돌아 수풀에 도착한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환영이 되어 수풀 안을 돌아다녔다. 이곳은 넓고 탁 트여 있어 거리낄 것 없이 보법을 수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심협은 두 다리 안의 법력 운공이 더욱 원활해진 것을 느꼈다. 보법에 대한 깨달음도 더욱 깊어졌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도 훨씬 빨라졌다.
* * *
순식간에 며칠이 지났다.
이른 아침의 옅은 안개 속, 환영 같은 심협의 모습이 수풀 안을 누비고 있었다. 속도는 전보다 두 배는 빨라졌고, 뚜렷한 잔영들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어 마치 여러 사람이 동시에 수풀 안을 달리는 것 같았다.
움직임 자체도 더욱 민첩하고 원활해졌다. 분명 조금 전까지 전력으로 내달리다가도 바로 다음 순간에는 쏜살처럼 뒷걸음으로 달려가기도 했는데, 심지어 잠시의 멈칫거림도 없을 정도였다.
촤라락!
기이한 소리와 함께 어려 잔영이 하나로 합쳐졌다. 그렇게 나타난 심협의 눈에는 놀람과 기쁨이 가득했다. 며칠을 수련하니 이 보법에 제법 정통해졌고, 심지어 완성까지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러한 수련 속도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시간을 두 배를 준다 해도 불가능할 터였다.
그러나 며칠을 잠도 자지 않고 쉬지도 않았으니, 아무리 심협이라고 해도 체력과 법력의 소모가 꽤 컸다. 배에서는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협은 우선 배를 채우기로 했으나,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방촌산으로 향했다. 거대한 석림 부근에서 산양 한 마리를 손으로 때려잡더니 가죽을 벗긴 후 구웠다. 예전 춘추관에서 지낼 때에도 그는 백소천 등과 춘추관의 청빈한 음식을 견디지 못하고 종종 야생 동물을 사냥하여 구워 먹곤 했다.
양고기가 구워지면서 금세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풍겼다. 며칠을 굶은 심협은 순식간에 반 이상을 허겁지겁 먹어치운 후에야 배를 두드리며 트림을 했다. 그러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숨을 고르며 쉬었다.
잠시 후, 법력과 체력이 반 이상 회복되자, 그는 다시 석림으로 들어가 보법을 수련했다. 그의 모습이 석림을 빠르게 누비고 다녔는데, 어떤 때에는 새가 나는 것 같았고, 어떤 때에는 마치 원숭이처럼 이리저리 뛰었다.
그런데 한참을 수련하던 그가 돌연 우뚝 멈춰 섰고, 눈에는 의혹의 빛이 보였다. 좀 전까지는 마치 하늘이 돕는 것처럼 영감이 끊이지 않았으나, 지금은 방에서 수련할 때보다도 수련 정진 속도가 느려진 상태였다.
심협은 턱을 매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
수행의 법결은 이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잠깐의 휴식으로 몸과 정신까지 기력을 되찾은 상태였는데도 상황이 이러하니 의아해졌다.
“내가 아니라 환경이 문제인 건가?”
심협은 무언가 생각난 듯 사방을 둘러보았다.
시선이 닿는 곳은 모두 돌투성이였고, 지면도 암석이었다. 푸른빛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 자못 황량한 곳이었다.
그는 혹시나 싶어 가까운 수풀로 들어가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역시 그런 거였어!”
수풀에서 보법을 조금 시전해보니 다시 이전의 느낌이 돌아와 있었다.
그가 수풀 안을 누비고 다니자 점점 두 발에서 하얀 빛이 번득였다. 지나는 곳마다 하얀 빛들이 일었고, 그 상태로 귀신처럼 빠르게, 거의 순식간에 이리저리 이동했다.
* * *
또다시 닷새가 지났다. 심협의 보법은 점점 더 빨라졌고, 법력은 두 다리의 법맥 안에서 빠르게 운공됐다.
속도가 어느 정도에 이르자 경맥이 작열하기 시작했는데, 심협은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하며 더욱 속도를 내었다.
이때 굉음이 한차례 울렸다!
꽝!
어떤 관문을 통과한 듯 두 다리에서 수많은 기운이 폭발하더니 경맥을 따라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동시에 두 다리에는 하얀 빛이 맹렬히 빛났다.
그 상태로 한 걸음을 내딛자 지면에 비스듬히 기운 달과 같은 하얀 빛 그림자가 떠올랐고, 심협의 몸도 갑자기 매우 가벼워졌다.
달 모양 그림자는 처음에 빛을 내다가 금세 흩어지더니 몽롱한 환영으로 변했다. 그러자 심협의 모습도 함께 모호해지면서 몸 전체가 빛 그림자처럼 번득이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그는 6장 밖에 이르러 있었다.
“괴, 굉장하구나!”
심협은 크게 감탄하며, 몸을 조금 옆으로 돌려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발아래 빛 그림자가 바로 흐트러졌고, 심협 또한 번득이면서 다시 한번 몇 장을 순식간에 이동했다.
“와하하하! 이 보법을 완성하고 나니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것 같구나! 이리도 신묘한 보법에 이름이 없어서는 안 되지. 이 보법을 전력으로 시전하면 비스듬히 기운 달과 같은 빛 그림자가 생기니, 내 사월보(斜月步)라 부르겠다!”
이어서 그는 칠성필의 공간에 천죽망월도를 넣으며 또다시 감탄했다.
“방촌산은 역시 수선(修仙) 대종파답구나. 보법 또한 이리도 현묘하다니.”
그런데 그때, 천죽망월도가 한차례 떨렸고, 그 위로 번득이는 하얀 빛 한 겹이 떠올랐다. 그러자 그 안의 보름달과 대나무 그림자도 모두 번득이기 시작하였고,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 무슨 일이지?”
심협이 당황한 와중에도 자세히 살피려니, 그림에서 돌연 하얀색의 작은 글씨들이 떠올랐다. 이 글자들은 심협의 손을 따라 체내로 들어가더니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헙!”
심협은 머릿속에 큰 충격을 받고 신음했다. 다행히도 하얀 글씨는 많지 않아 이 통증은 금세 가라앉았다.
그 작은 글씨들은 심협의 머릿속에서 잠시 맴돌다가 모여들어 이내 하나의 문장을 이루었다.
신식으로 살펴보니 하나의 비술이었다.
“을목선둔(乙木仙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