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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125화 (125/1,214)
  • 125화. 내력(來歷)

    “자, 결정하셨소?”

    양두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께서는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실 수 있겠소?”

    마 파파가 양두괴를 돌아보며 답했다.

    “아직도 결정을 못 했단 말이오?”

    양두괴가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그게 아니라…… 다만…….”

    마 파파는 주저하자 곁에서 녹합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인지 속 시원하게 말하란 말이다!”

    마 파파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 방금 사람을 보내봤는데, 언제부터인가 심협이 마을에서 보이지 않소.”

    그 말에 마을 사람들의 안색이 굳었다.

    “내 진작 그놈이 나쁜 놈인 걸 알아봤어. 혼자 도망치다니!”

    “역시 그 보물을 훔치려고 우리 마을에 들어온 거였군!”

    “마 파파, 이거 정말 큰일이오! 어서 저 요괴들에게 말하시오. 그놈이 보물을 훔친 것은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한편, 영락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말없이 보검만을 꼭 쥐고 있었다. 진관보 역시 얼굴이 잔뜩 굳은 채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됐다.

    “하하! 이 망할 할망구야, 시간을 끌고 싶으면 더 고명한 수를 썼어야지. 그런 조잡한 거짓말에 속을 것 같은가?”

    녹합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리도 인내심에 한계가 있소. 놈이 살아 있다면 그놈을 봐야겠고, 죽었다면 시체라도 확인해야겠소. 그렇지 못한다면 장수촌 전체에게 책임을 묻겠소.”

    양두괴가 굳은 얼굴로 싸늘하게 말했다.

    “더 헛소리를 듣고 있을 필요 없소. 놈을 내놓지 않으려고 수작을 부리고 있으니 어서 들어가 찾아봅시다! 너희들, 이 어르신과 같이 마을로 들어가자!”

    녹합이 코웃음 치더니 뒤를 돌아보며 요괴들에게 외쳤다.

    “네!”

    뒤에 있던 여러 요괴들이 곧장 답하며 나섰다. 이들이 살기 어린 표정으로 병기를 휘두르며 마을로 향하니, 심협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을 죽이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멈춰라!”

    영락이 크게 외치며 손을 뒤집어 작은 검(劍) 도안이 새겨진 백옥 부적을 꺼내 들어 자신의 몸에 대고 내려쳤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 피처럼 붉은 빛이 일었고, 온몸에서 기이한 백색 문양이 떠올랐다. 기운이 끓어오르며 수련 수준 또한 치솟아 눈 깜짝할 사이 벽곡 후기에 이르렀다. 손의 보검은 파란 빛을 크게 방출해 그 길이가 무려 1장에 이르게 됐는데, 한기는 오히려 옅어졌다.

    영락은 보검을 가로로 눕혀 크게 휘둘렀다. 기다란 파란 검기가 가장 앞서 달려오던 세 마리 요괴를 한꺼번에 공격했다.

    요괴들은 각자 병기를 휘두르거나 발을 들어 검기를 막았다. 하지만 검기와 닿자마자 세 요괴 모두 꽁꽁 얼었고, 단숨에 숨이 끊어졌다.

    “누구도 마을에 발을 들일 수 없다!”

    영락은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며 보검을 다시 좌우로 떨쳤다. 그러자 대여섯 마리의 요괴가 또다시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얼어버렸다.

    이 광경을 본 요괴들이 두려운 기색을 내비치며 우뚝 멈춰 섰다.

    “우리 장수촌이 작고 약하기는 하나 우습게 봤다가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마 파파는 서릿발 같은 기세로 호통을 쳤다.

    한편, 양두괴는 영락의 보검을 보고 있었는데, 눈빛이 다소 흔들리는 듯했다.

    반면 녹합은 전혀 개의치 않을뿐더러 오히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는 입을 쩍 벌려 맷돌만 한 파란 빛의 포탄을 뱉어냈다. 파란 물이 빛의 포탄을 에워싼 채 번득이며 천둥처럼 거대한 굉음과 함께 영락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영락의 보검에서 파란 빛이 미친 듯이 불어나 거대한 광검(光劍)이 되어 빛의 포탄을 베었다.

    쾅!

    광검과 닿은 순간, 파란 빛의 포탄은 돌연 묵직한 폭발음과 함께 수십 개의 주먹만 한 파란색 광구로 나뉘어 멀리 있는 마을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안 돼!”

    화들짝 놀란 영락이 다급히 보검을 내던졌다. 그러자 검은 허공에 날아올라 칼자루를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거대한 막을 이루어 대부분의 광구들을 막아 얼려버렸다. 하지만 일부는 끝내 마을 사람들에게로 날아들고야 말았다.

    퍼펑!

    광구가 폭발할 때마다 일고여덟 명이 그 영향권에 들었고, 그중 절반은 단숨에 목숨을 잃었다. 나머지 절반도 큰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흐흐, 네 검이 제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나를 막을 수 있겠느냐?”

    사방에 낭자한 피를 본 녹합은 흥분으로 눈이 번들거렸고, 또다시 입을 크게 벌렸다. 입가에 파란 빛이 번득이더니 또 한 번 빛의 포탄이 발사되었다.

    영락의 표정이 찬 서리처럼 변했다. 그녀가 양손을 수레바퀴 모양으로 결인하자 파란 보검이 나타나 빛의 포탄을 조준했다. 파란 빛이 강렬하게 요동치는 보검에서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이전보다 열 배는 굵어진 차가운 검기가 번개처럼 10여 장을 뛰어넘어가 막 분산되려는 빛의 포탄에 꽂혔다. 그러자 빛의 포탄은 순식간에 얼어붙어 거대한 얼음 공처럼 변해 땅으로 떨어졌다.

    가까스로 빛의 포탄이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은 막아냈으나, 영락은 다소 무리를 한 것인지 창백한 안색으로 비틀거렸다.

    한편, 보검이 생각보다 대단한 위력을 보이자 살짝 두려운 마음이 생겼던 녹합은 영락이 비틀거리는 모습에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또다시 입을 벌려 빛의 포탄을 발사했다. 이번에는 영락을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빛의 포탄이 날아드는 것을 본 영락은 다급하게 법력을 운공하며 양손을 결인해 보검을 조종했다. 이에 검신에 파란 빛이 크게 일렁였다.

    그때였다. 영락의 몸에 일었던 하얀 빛이 돌연 요동쳤다. 영락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그녀의 몸을 감쌌던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결국 영락은 무너지듯 쓰러지고야 말았다.

    “영 선사!”

    마을 사람들은 크게 놀랐고, 몇몇은 만사를 제쳐두고 영락에게 달려갔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청우였지만, 애초에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으니 제때 구해낼 수가 없었다. 이제 영락은 빛의 포탄에 그대로 직격당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하얀 그림자가 영락의 앞에 나타나 빛의 포탄과 충돌했다.

    콰쾅!

    거대한 굉음에 이어 빛의 포탄은 방향을 틀어 녹합에게로 날아갔다. 더구나 그 속도는 처음 발사됐을 때보다 훨씬 빨라,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헛!”

    크게 놀란 녹합은 두꺼운 뒷다리로 뛰어올라 옆으로 몇 장이나 물러난 후에야 가까스로 빛의 포탄을 피할 수 있었다.

    “어느 놈이 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녹합은 우스운 꼴을 당할 뻔하자 분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그때, 영락의 앞을 막아섰던 하얀 그림자가 번득이더니 허공에서 거대한 백호가 나타났다. 그 털은 눈처럼 하얗고 선명해 마치 비단 같았고, 검은 무늬가 조금씩 섞여 있었다.

    그렇게 천신(天神)처럼 등장한 서천호는 냉랭한 눈빛으로 녹합을 노려보았다. 동시에 육신에서는 거대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발산되었다. 예전 심협과 겨룰 때보다 훨씬 강한 기운이었다. 수련 경지가 또 오른 것이 분명했다.

    “대…… 대왕!”

    녹합은 안색이 크게 변해 급히 땅에 엎드렸다.

    “대왕!”

    양두괴와 다른 요괴들도 급히 엎드려 절했다.

    영락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감히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혼란스러웠던 마을 입구에는 이제 적막이 내려앉았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였다.

    “녹합, 네놈이 감히 내 명을 무시하는 것이냐!”

    주변을 둘러본 서천호는 마을 사람들의 잘린 사지와 선혈 등을 보자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아, 아닙니다. 그저 마을 사람들이 그놈을 감싸고돌기에…… 어쩔 수 없이 몇 놈을 죽여 겁을 좀 주었을 뿐입니다.”

    녹합은 뻔뻔하게 말했다.

    “겁을 좀 주었다? 내가 사람을 죽여 겁을 주라고 했더냐? 네놈은 얼마든지 본 왕의 뜻을 거스를 수 있다는 게로구나! 크하핫!”

    서천호는 분노가 극에 달하여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대왕. 제가 잠시 무언가에 홀렸나 봅니다. 부디 대왕께서 기회를 한 번 더 주십시오!”

    녹합은 서천호가 다가오는 모습에 머리에 냉수를 끼얹은 것처럼 바짝 정신이 들었다. 체면이고 뭐고 당장 고개를 조아리고 용서를 빌었다.

    “본 왕이 준 기회가 부족하단 말이냐?”

    냉랭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도 전에 서천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백호의 앞발 하나가 허공에서 나타나 녹합의 머리를 내리치려 했다.

    녹합은 조아리고 있던 머리를 번쩍 들었다. 방금 전까지 공손하기 그지없었던 표정은 사라지고 섬뜩한 분노만이 가득한 얼굴로 녹합은 입을 벌려 파란 빛을 내뱉었다. 그 빛 안에는 파랗고 투명한 구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녹합의 내단이었다. 내단은 눈부신 물의 빛으로 싸여 있어 빛의 포탄보다 몇 배는 더 눈부셨다.

    쏴아아!

    녹합의 내단은 파도 같은 소리를 내며 서천호의 발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서천호의 발을 막기는커녕 내리찍는 속도조차 조금도 늦추지 못한 것이다.

    팍!

    서천호의 발에 번갯빛이 번득이는가 싶더니 내단이 튕겨나가 녹합의 머리에 꽂혔다. 녹합의 머리 위를 덮었던 딱딱한 껍데기가 부서졌고, 머리는 수박 쪼개지듯 터져버렸다.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고, 녹합의 몸은 몇 차례 경련하다가 완전히 멈추었다.

    양두괴는 자신과 비등한 힘의 녹합이 한 번의 발길질에 이처럼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것을 보자 가슴이 떨려와 허리를 더 깊이 숙였다.

    한편, 마을 사람들은 이 광경에 숨을 쉬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서천호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서천호는 녹합의 시체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마을을 향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놀라서 반쯤 넋이 나가 있던 영락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녹합의 수준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응혼 초기는 됐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쉽게 죽이다니, 서천호의 힘은 가히 공포라 할만 했다.

    영락은 숨을 들이키며 보검을 쥐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몸에서 빛이 번득였고, 보검에도 다시 검광이 일었다.

    “얘야, 네가 영검부(靈劍符)를 써서 억지로 수련 수준을 올려봐야 청봉검(靑鋒劍)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는 없다. 게다가 영검부의 역효과는 그 기세가 엄청나서 막을 수가 없단다.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니, 더 쓰다가는 전신의 경맥이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서천호는 영락과 보검을 훑어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 검을 아시오?”

    영락의 움직임이 순간 멈췄다.

    그때, 서천호를 자세히 살펴보던 마 파파가 돌연 무언가 생각난 듯 외쳤다.

    “너…… 너는 백미(白眉) 어르신이 돌아가신 후 실종되었던…… 그 고양이 아니냐!”

    서천호는 마 파파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놈만 내어 준다면 예전 인연을 생각해 본 왕이 다른 책임은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소. 앞으로도 방촌산의 요괴들을 단속하여 마을을 공격하지 않도록 하지. 하지만 그놈을 내놓지 않으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오.”

    “내 저 요괴들에게도 말했지만, 심협은 지금 마을에 없소. 우리가 내놓고 싶어도 내놓을 수가 없단 말이오.”

    마 파파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사방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럼 그놈이 어디로 갔단 말이오? 그대들이 놈을 내놓지 않겠다고 하니 하는 수 없지. 양두괴, 마을 안을 뒤져라!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죽여도 좋다!”

    서천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명을 내렸다.

    “네!”

    양두괴는 일어나 대답하더니 수하들을 데리고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영락은 굳은 얼굴로 청봉검에 영력을 주입했다. 하지만 검에 파란 빛이 이는가 싶더니 그녀의 몸 위로 강렬한 하얀 빛이 요동쳤다. 이어서 영락은 피를 토하며 비틀거렸다. 보검의 파란 빛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영락은 검으로 땅을 짚은 채 반쯤 꿇어앉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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