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22화 (122/1,214)

122화. 노를 젓듯이

이제는 낙뢰부 문양이 익숙해져 일필휘지의 기세로 그릴 수 있었다.

그때였다. 부적의 마지막 획을 그려 넣자 부적 표면 전체에 돌연 빛이 일었고, 이어서 밝은 자색 빛이 방출되었다.

심협은 잠시 넋이 나간 듯,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듯한 표정으로 부적을 바라보았다. 분명 백 번은 실패할 것을 각오했건만, 십여 회 만에 성공하다니!

그가 당황해 있는 사이에 부적지는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어서 자색 빛 가운데 쌀알만 한 무수히 많은 부적 문양이 떠오르더니 기이한 흡입력을 발산했다.

쿠르르!

하늘에서 우렛소리가 울리더니 눈부신 번개들이 모여들었다. 이 기이한 현상을 감지한 심협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곧장 부적지를 쥐고 마당으로 나갔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부적에는 자색 빛이 번득였고, 가벼운 소리가 울리며 허공을 향해 요동쳤다. 마치 하늘의 번개를 불러들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심협은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부적을 든 손을 펼쳤다. 동시에 법력으로 부적지를 감싸 허공으로 띄웠다.

낙뢰부는 번득이며 구름 바로 아래까지 솟구쳤다. 그러자 구름에 숨어 있던 번개가 더욱 강렬하게 요동쳤고, 이어서 부적 위로 모여들었다.

꽈르릉!

거대한 우렛소리가 울리고 구름 속에서 몇 줄기의 자색 번개가 하늘을 갈랐다. 그리고 곧 팔뚝만 한 굵기의 번개로 합쳐져 청상지 부적으로 떨어졌다.

“헛!”

심협은 혹시나 부적이 번개의 힘을 견뎌내지 못할까 마음을 졸였다.

부적에서는 자색 빛이 크게 일렁였고, 자색 문양이 부적 주위를 빠르게 맴돌았다. 번개는 그 안으로 들어갔는데, 마치 솜에다가 물을 부은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낙뢰부가 번개를 흡수해 버린 것만 같았다.

이 광경에 심협은 그야말로 넋이 나갔다.

낙뢰부는 번개를 흡수한 후로 표면에 일었던 자색 빛이 거두어졌는데, 깨알 같던 부적 문양들도 함께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부적은 마치 모든 힘을 다 잃은 것처럼 나부끼며 떨어져 내렸다.

심협은 급히 손을 들어 법력을 발사해 낙뢰부를 끌어왔고, 흥분을 감춘 채 자세히 살펴보았다.

부적의 문양은 이전보다 훨씬 더 선명해져 있었는데, 마치 영성(靈性)이 생겨난 것만 같았다. 미세한 자색 번개들이 요동치는 것도 어렴풋이 보이는 듯했다.

심협은 낙뢰부를 기쁜 눈으로 바라보며 신식으로 살폈다.

부적에 봉인된 번개의 힘은 막강했다. 소뢰부보다 몇 배나 강한지 감도 잡히지 않았고, 지금의 심협으로서도 은근히 두려울 정도였다.

“어쨌든 위력이 크면 클수록 좋지.”

심협은 흐뭇해하며 부적을 품에 챙겨 넣고 집으로 들어갔다.

날은 거의 저물어 있었고, 게다가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까지 내리니 마을 사람들은 진즉 집으로 돌아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심협의 거처 상공에 번개가 모이는 것도 알아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방금 하늘에 일어난 현상을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 마 파파였다. 그녀는 마을 누각의 문에 기대어 서 있었는데, 두 눈은 심협의 거처를 향한 채였다.

“사존(師尊)께서 언급하셨던, 낙뢰부를 만들 때 일어나는 현상 같구나! 낙뢰부는 방촌산의 비전이라 사존께서는 방촌산의 외문제자들에게도 전수해 주지 않으셨는데……. 도대체 심협은 어디에서 이 부적을 얻었단 말인가? 게다가 만드는 데 성공하다니!”

어지간한 일로는 놀라지 않는 마 파파마저 경악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심협은 여전히 낙뢰부를 만드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자질이 놀랄 만한 수준이기 때문인지, 옥간을 보고 우려했던 것에 비해서는 훨씬 높은 확률로 부적을 쓰는 데 성공했다. 적게는 서너 장당, 많게 잡아도 스무 장 중에 1장은 성공한 것이다.

그는 부적을 쓰는 데 성공할 때마다 곧장 마당으로 나와 번개의 힘을 흡수시켜 낙뢰부를 완성해갔다. 정말 하늘이 그를 돕는 것인지 비와 번개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 반나절이 지났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심협의 눈은 빨갛게 충혈된 상태였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눈빛만은 흥분으로 가득했다.

탁자에는 한 무더기의 부적이 쌓여 있었는데, 모두 성공적으로 번개의 힘을 흡수한 낙뢰부였다. 그 수가 무려 30여 장이었다!

낙뢰부는 소뢰부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력의 부적이다. 그런 낙뢰부를 이토록 많이 손에 넣었으니 출규기 중기는 물론 후기, 어쩌면 더 높은 경지의 상대를 만나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심협은 낙뢰부들을 칠성필에 넣은 후 침상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쉬었다.

한참 후,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피곤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날은 완전히 어두워진 후였고, 비바람은 여전했으나 더 이상 우렛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빗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심협은 일어나 등불을 밝혔다. 부적을 계속 써볼 생각이었다. 다른 네 가지 부적도 써보고 싶어 손이 근질거릴 지경이었다.

그는 곧 연부로에 불을 붙이고는 자수정을 넣었고, 잠시 후 두 번째 재료를 넣었다.

2각(*刻, 시간의 단위. 1각은 약 15분) 정도가 지났을 때, 심협은 손을 결인하여 잡아끌었다. 그러자 짙은 자색 액체가 연부로 안에서 튀어나왔다. 이어서 심협이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자 이 액체는 계란만 한 십여 개의 덩어리로 나뉘었다. 각 액체 덩어리는 법력에 싸인 채 연부로 위에 떠 있었다.

심협이 다시 양손을 결인하자 법력이 그중 하나를 네모반듯하게 펼쳤다.

자색 액체에 담긴 열은 금세 식었고, 액체는 빠르게 응고되었다. 액체가 부드러움 속에 딱딱함을 지닌 자색 종잇장으로 변한 것이다. 종이에는 구름 같은 무늬가 은은하게 엿보였다.

“자운지는 명불허전이구로나! 청상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품질이야!”

심협은 두 손가락 사이에 자운지를 끼운 채 신식으로 살피자마자 그 비범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청상지에 비해 더욱 질기고 두툼할 뿐만 아니라 상서로운 기운이 담겨 있었다. 부적 문양이 담을 수 있는 능력도 청상지에 비해 훨씬 뛰어날 게 분명했다.

심협은 십여 개의 액체 덩어리는 물론이고 남은 재료도 모두 자운지로 만들었다. 그 결과, 총 서른다섯 장의 자운지가 생겨났다.

자운지는 부적용 먹에 비해 만들기가 훨씬 복잡한 것인 데다가 재료도 많지 않았는데, 다행히 별다른 문제없이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의 법력이 심후하지 않았더라면 어림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심협은 자운지를 한쪽에 쌓아두고, 옥간에 기재된 대로 부적용 먹을 만들기 시작했다. 먹 역시 금세 완성되었다.

작은 종지에 담긴 부적용 먹과 자운지를 앞에 두고, 심협은 잠시 눈을 감은 채 휴식을 취했다. 그러다가 정, 기, 신이 모두 회복되자 다시 눈을 떴다.

“자운지로 부적을 쓸 수 있는 기회는 서른다섯 번뿐이다. 신중해야 해.”

고급 먹과 자운지가 갖춰졌으니 이론대로라면 낙뢰부 때보다 성공 확률은 높아지겠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

“무엇부터 시도해볼까?”

정신부, 비행부, 쇄갑부, 실억부의 효과가 심협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는 이내 가장 실용적인 쇄갑부를 먼저 써보기로 결정하고는 그 문양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았다. 그리고 곧장 붓을 들어 부적을 쓰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실패!

두 번째, 실패!

세 번째, 또 실패…….

심협은 단숨에 여섯 장의 부적을 썼지만, 단 한 장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조금 풀이 죽기는 했지만, 애초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일이라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후, 다시 자운지를 꺼내고 붓을 들어 부적을 써내려갔을 뿐이다.

일곱 번째 시도는 뭔가 달랐다. 부적 문양을 완성하고 붓을 들자마자 윙 하는 소리와 함께 부적 표면에서 자색 빛 한 줄기가 인 것이다!

챙! 챙!

이어서 빛이 반짝이는 가운데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공이다! 와하하! 성공이야!”

심협은 기쁨에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먹과 종이가 모두 좋다 보니 대체용 낙뢰부를 쓸 때보다는 성공 확률이 많이 높아진 듯했다.

심협은 쇄갑부를 손에 들고 몇 번이나 뒤집어가며 살폈다.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 이 부적은 일회성이다. 그러니 아무리 궁금해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른 후에 다시 칠성필을 들었다. 이번에는 정신부를 써보기로 한 것이다.

그는 네 가지 부적을 모두 쓰고 싶었다. 그러나 자운지가 많지 않으니 앞서 성공한 쇄갑부가 아닌 다른 것을 써볼 참이었다. 성공 확률이 쇄갑부와 비슷하다면 나머지도 모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부의 부적 문양은 쇄갑부보다 훨씬 복잡해 머릿속으로 여러 번 되뇌어본 후에야 쓰기 시작했다.

한 장, 두 장, 세 장, 네 장……. 이번에는 아홉 번째에 가서야 겨우 성공할 수 있었다.

“자운지가 열아홉 장 남았으니 우선은 제일 쉬워 보이는 비행부를 써봐야겠구나. 그리고 남은 것들로는 실억부를 써보자.”

심협은 신중하게 순서를 정한 후, 다시 붓을 들었다.

하지만 몇 장 써보기도 전에 자신이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비행부의 문양이 단순한 편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전의 부적 두 가지와 달리 문양을 그릴 때 종이 위에 기이한 부력이 생겨난 것이다. 이로 인해 흔들리는 배에서 붓을 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실패!

실패!

또다시 실패!

순식간에 열여덟 차례나 실패했고, 이제 자운지는 마지막 한 장만 남았다.

“내 계획을 잘못 세웠구나. 비행부가 가장 어려운 것일 줄이야…….”

심협은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하지만 다시 좀 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다섯 가지 부적 중 내심 가장 갈망하던 것이 바로 비행부이기 때문이다. 비행부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 도망쳐서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보물이 아닌가!

예전에 백소천의 비둔부로 도망쳤을 때, 마치 새가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듯한 쾌감을 받았다. 그때의 경험 덕분에 비행부에 대한 갈망은 무척 컸다.

심협은 서서히 숨을 내쉬고는 다시 칠성필을 들었다. 하지만 바로 부적을 쓰지 않고 눈을 감더니, 앞서 비행부를 쓰다가 실패했던 과정들을 가만히 돌이켜보았다. 마지막 기회인만큼 철저하게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기이한 힘이 훼방을 놓은 것이 실패의 주된 이유다. 그 힘은 비행부 부적 문양 자체에서 기인한 것이니 없앨 수가 없는데……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 문제를 두고 한참이나 고민하던 심협의 머릿속엔 돌연 무언가가 스쳤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현실 세계에서 <무명천서>를 찾으려고 급류에서 배를 몰았던 경험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 배를 모는 것도 이와 같지 않았던가! 솟구치는 강물은 줄곧 뱃머리의 방향에 영향을 끼쳤지. 그게 지금의 상황과 매우 비슷하구나!”

심협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때 그는 우대담에게 노 젓는 기술을 배운 바 있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나 기억이 다소 흐릿했으나, 어느 정도는 기억이 났다.

“강물과 맞서지 말고, 강물의 힘을 빌려, 물의 흐름에 따라 유리하게 이끌어야 한다고 했지. 그래, 맞아. 흐름에 따라 유리하게 이끈다. 바로 그거야!”

심협의 눈이 번득였다. 답을 찾은 듯했기 때문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