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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121화 (121/1,214)
  • 121화.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영락을 돌려보낸 심협은 대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가부좌를 튼 채 칠성필에 담아둔 것들을 모두 꺼냈다.

    사월삼성동을 돌아보느라 물건들을 자세히 살필 틈이 없었으니 이제 자세히 살펴볼 생각이었다.

    심협은 우선 하얀 옥간을 꺼내 신식을 내보냈다. 다섯 장의 부적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전에는 대충 훑어보기만 하느라 부적들의 기능이나 위력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얼굴은 기쁨과 근심이 반쯤 섞인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다섯 장의 부적은 언뜻 보기에는 별것 아닌 듯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 비범하고 영험한 것들로 각각 오묘한 용도가 있었다.

    비행부에 대한 설명은 많지 않았지만, 단시간 동안 하늘을 날게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정신부는 적의 육체적 방어를 무효화할 수 있는 부적이었다. 직접적으로 경락과 경혈을 봉인하니 인간 수사만이 아니라 요괴에게도 효과가 있는 것이었다. 미인사와의 싸움에서 견고한 비늘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만일 그때 정신부가 있었더라면 그리 고생하지 않았으리라.

    쇄갑부는 이름으로 미루어 적의 갑옷이나 요괴의 견고한 비늘 등을 부수는 부적인 듯했다. 그러니 그 가치는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실억부는 언뜻 보기에 계륵 같은 부적이었다. 부적을 사용하는 사람보다 수련 수준이 낮은 대상에게만 사용이 가능할 뿐, 비슷하거나 더 강한 상대에게는 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부적 또한 적절한 용도가 있었다. 상대의 혼에 직접 작용하는 것이니, 수련 수준이 비슷한 상대에게 전투 중에 사용하면 기억을 잃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잠시 정신을 잃게 할 수는 있을 테니 말이다. 치열한 전투일수록 아주 작은 실수로도 승패가 결정되니 아주 잠시라도 정신을 잃게 할 수 있다면 큰 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

    낙뢰부(落雷符)는 뇌(雷, 번개) 속성 부적으로, 온전히 공격용이었다. 그러나 같은 뇌 속성이긴 해도 소뢰부와는 전혀 달랐다. 소뢰부는 자신의 법력을 번개로 바꾸어 공격하는 것이지만, 낙뢰부는 진짜 하늘의 번개를 부적에 봉인해둔 것이다. 진짜 번개는 천지의 위력을 가진 것이니, 부적에 봉인되면서 그 위력이 조금 약해졌다 해도 소뢰부보다는 훨씬 강할 수밖에 없다.

    낙뢰부의 위력은 부적을 만드는 사람의 수련 정도에 큰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이 부적은 그리는 것 자체도 꽤나 번거로웠다. 번개가 치는 날에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위력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감내할 만한 번거로움이었다.

    심협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 다섯 개의 부적은 위력이 강한 대신 소뢰부에 비해 만들기도, 사용하기도 훨씬 어려웠다. 고급 부적용 먹과 자운(紫雲) 부적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자운 부적지라……. 분명 고급 부적용 종이겠지?”

    심협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본래 영재(靈材)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으나 다행히 사월삼성동에서 본 <선령백초> 덕에 이제 제법 아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아는 것이 많아도 자원이 부족하면 만들 수 없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장수촌에서든 현실 세계에서든 구하기 어려운 재료들이니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월삼성동에서 영재들을 구해 오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이 부적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때, 돌연 우렛소리가 울렸다.

    심협은 창밖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던 하늘이 더욱 어두워졌고, 요동치는 구름 속에서 어렴풋이 번개가 번득였다.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내 비의 장막이 흐린 하늘을 뒤덮은 것처럼 빗방울이 점점 거세고 굵어졌다. 간간이 번개가 번득였다.

    “하늘이 때맞춰 비와 번개를 내려주는데…… 참으로 아쉽구나.”

    심협은 한숨 끝에 혀를 찼다. 낙뢰부를 쓰기 적합한 날씨이고, 그는 어떻게 하늘의 번개를 봉인하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으나 재료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신식을 옥간으로 주입했다.

    “음? 이게 뭐지?”

    심협의 신식은 낙뢰부 아래 쓰인 몇 줄의 작은 글씨를 발견했다. 워낙 작고 흐릿해 출규기에 진입하기 전이었다면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른 4개의 부적에는 이런 글씨가 없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글씨들은 조금 뚜렷해졌다.

    “이건……?”

    이내 그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 작은 글씨들은 옥간의 주인이 직접 수많은 시험을 통해 찾아낸, 평범한 재료들로 낙뢰부를 만드는 방법이었다. 다만 이 방법으로 쓴 부적은 정통적인 방법으로 쓴 부적보다 성공률이 훨씬 떨어졌다.

    그러나 지금의 심협에게는 더없이 기쁜 일이었다. 시도할 방법조차 없는 것보다야 확률이 좀 떨어진다 해도 시도할 방법이 있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

    “남전석(藍電石), 부영옥(浮影玉), 금선패(金扇貝).”

    심협은 기쁜 표정으로 대체 재료들을 하나하나 읽어 보았다.

    다행히 이것들은 희귀한 재료가 아니었다. 게다가 사월삼성동에서 얻은 영재들 중에는 남전석과 부영옥, 평범한 부적용 종이도 많았다. 금선패는 없었지만, 해역의 하급 요괴에게서도 얻을 수 있는 평범한 영재였다. 낭보(浪普)에게 도움을 청하면 분명 충분히 얻을 수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낙뢰부를 쓸 재료는 다 갖춰지는 건가?”

    심협은 옥간을 잠시 내려두고 결인하여 낭보를 소환하려 했다. 그러나 반쯤 들던 손을 우뚝 멈추고는 창밖에 폭포처럼 내리는 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가 다시 칠성필을 들어 구구통보결을 시전해 제련을 시작했다. 제대로 하려면 도구를 잘 갖춰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낙뢰부를 쓰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을 터. 칠성필은 붓이니 부적을 쓰는 데도 쓸 수 있겠지. 그러니 금제를 모두 제련할 수만 있다면 부적이 성공 확률도 높아질지 모른다. 어차피 보아하니 쉬이 그칠 비는 아니군.”

    지금의 그에게 법기 제련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칠성필에서는 팍 하는 소리가 울리면서 두 번째 금제가 제련되었다. 동시에 붓의 북두칠성 도안 중 개양성(開陽星, 북두칠성의 꼬리 쪽 세 개의 별 중 두 번째 별) 자리에 빛이 번득였다.

    은은한 은색 빛으로 일렁이는 칠성필은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또한 칠성필 안에서 파동이 일자 보관 공간이 기존보다 3할은 더 넓어졌다.

    심협은 붓을 들어 허공에 휘둘렀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붓 끝이 지나간 자리의 은색 빛 흔적은 별다른 변화 없이 금세 사라져 버렸다.

    “음, 이러면 부적을 쓰는 데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을 텐데…….”

    심협은 고민하는 대신 제련을 이어갔다.

    눈 깜짝할 사이 반나절이 지나갔다. 창밖에는 여전히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우렁찬 우렛소리 역시 끊이지 않았다.

    이 무렵, 칠성필 표면에서는 은색 빛이 계속 회전하고 있었다. 북두칠성 도안도 모두 밝은 은색으로 빛났으니, 7층의 금제 모두 제련을 끝낸 것이다.

    순간, 칠성필에서 법력의 파동이 한 줄기 발산되었다. 이 파동은 금빛 밧줄이나 반월환과는 달랐고, 변화무쌍한 느낌으로 가득했다.

    심협은 칠성필을 어루만지며 숨을 고른 후 체내의 법력을 주입했다. 이어서 시험 삼아 칠성필로 허공에 부적을 써 보았다. 그러자 허공에 빛의 흔적이 떠올랐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시간은 조금도 늘어나지 않았다.

    “휴우, 이 법기로 부적을 쓸 수는 있겠지만 그 성공 확률을 높이는 데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겠구나. 아무래도 물건 보관이 주된 용도인 모양이야.”

    심협은 쓰게 웃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동시에 신식을 칠성필로 주입했다.

    예상대로 칠성필 안의 공간은 처음의 세 배에 이르렀다. 이제 물건을 보관할 공간은 충분해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돌연 심협의 표정이 변했다.

    “음?”

    방금 전까지는 제련에 집중하느라 감지하지 못했는데, 칠성필 공간 깊은 곳에 생소한 물건이 한 무더기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뒤쪽 공간에 보관되어 있다가 금제가 모두 제련되자 드러난 것이리라.

    심협은 그 물건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두터운 청색 부적용 종이 한 뭉치, 두 개의 백옥병, 단로(丹爐) 형태의 검은 화로, 그리고 각종 영재(靈材)들이었다.

    “부적지가 이리도 많다니! 그리고 청란목(靑鸞木)과 화성초(化星草), 남전석…… 심지어 금선패까지! 낙뢰부를 만들 대체 재료가 모두 있잖아! 실로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심협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소득에 뛸 듯이 기뻤다.

    청색 부적지는 동래현성 우부에서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청상지(靑霜紙)라 부르는 것 같았다. 이는 옥간에 담긴 다섯 가지 부적을 쓰는 데 필요한 자운지에 비하면 다소 부족했으나, 심협이 소뢰부를 쓸 때 사용하던 황색 부적용 종이보다는 훨씬 좋았다.

    그는 재료들을 모두 꺼내서 분류하고 정리했다.

    재료는 상당히 많았는데, 대부분은 저급 영재들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낙뢰부를 제작할 대체 재료들도 꽤 많았다.

    고급 영재들도 있었다. 다섯 가지 부적을 쓸 수 있는 부적용 먹을 만들 재료, 심지어 자운지를 만들 수 있는 재료도 다 갖춰져 있었다. 다만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심협은 바로 청상지 한 장을 앞에 놓고는 손을 휘둘러 칠성필에서 검은 화로를 꺼냈다.

    화로는 높이가 2척 정도였고, 전체가 검은색이었다. 작은 구멍이 잔뜩 뚫린 뚜껑이 덮여 있었다. 몸체에는 아름다운 주작(朱雀) 도안이 새겨져 있었는데, 생동감이 넘쳐 마치 살아 있는 듯했다. 좌우로는 단지 내부까지 통하는 작은 구멍이 하나씩 뚫려 있었다.

    이 연부로(煉符爐)는 부적용 먹이나 종이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도구였다.

    고급 부적용 먹과 종이의 제작 방법은 복잡했다. 하지만 연부로와 적합한 도구가 있다면 수고는 한층 덜고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러니 부적에 정통한 수사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 도구를 구하려고 했다.

    “칠성필에 연부로가 있었던 게 천만다행이군.”

    심협은 결인하여 남전석 등의 재료를 꺼내 옆에 두고는 부싯돌도 꺼내서 연부로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연부로는 금세 검붉게 타오르며 열기를 내뿜었다.

    심협은 남전석을 연부로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남전석은 순식간에 다섯 줄기 화염에 휩싸여 녹았고, 이 파란 액체에서는 어렴풋이 번개가 스치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부영옥을 꺼내 연부로에 던져 넣자 역시 순식간에 녹았고, 남전석이 녹은 액체와 섞였다. 그러자 액체는 서서히 옅은 자색으로 변해갔다.

    심협은 신식으로 연부로 안의 상황을 감지하다가 금선패를 투입했다.

    부적용 먹을 만드는 것은 단약이나 무기를 만드는 것에 비해 어렵지 않았다. 그저 불 조절만 잘해주면 되는 일이었다.

    금선패가 녹아들자 원래 옅은 자색이었던 액체는 색이 금세 짙어졌고, 그 안에 아주 작은 금빛 알갱이도 나타나 빛을 발했다.

    심협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뚜껑을 열었고, 이어서 손을 들어 결인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법력이 한 줄기 뿜어져 나가 자색 액체를 에워싼 채 다시 날아 나왔다. 그렇게 액체는 조금씩 식어갔으나 특유의 방법으로 제조된 덕에 응고되지는 않았다.

    그는 액체를 작은 종지에 담고, 칠성필을 그 종지에 푹 담갔다가 꺼냈다. 이어서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낙뢰부 문양을 자세히 되뇐 후, 마치 용이 노니는 듯한 붓놀림으로 단숨에 그려나갔다.

    하지만 문양을 끝까지 그려도 전혀 빛을 발하지도 않았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실패한 것이 분명했다.

    심협은 실망하지 않고 실패한 부적을 옆으로 치우고는 다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하지만 두 번째 시도도 실패였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얼마 지나지 않아 심협 양쪽으로 십여 장의 실패한 부적이 널려 있었다.

    그러나 심협은 차분했다. 옥간에서도 분명 이 대체 방법으로는 성공 확률이 매우 떨어진다고 되어 있었으니 아직은 실망할 때가 아니었다.

    ‘아직 종이도, 먹도 많다. 수백 번은 더 시도해볼 수 있어. 그중 한 번은 성공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고는 다시 부적지 한 장을 더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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