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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120화 (120/1,214)

120화. 격세지감

석벽에 눈부신 빛이 일더니 하얀 광막이 생겨났다. 광막에는 무수히 많은 하얀색 문양이 있었는데, 종횡으로 교차하며 각종 무늬를 이루었다. 지극히 현묘한 금제인 듯했다. 아마도 심협의 주먹을 막은 것이 이 금제이리라.

하지만 심협의 주먹에 담긴 힘은 가히 놀랄 만한 것이라, 그의 두 주먹은 하얀 광막 깊이 파고든 상태였다. 광막은 터질 듯 팽팽해져 있었지만, 끊어지지는 않았다.

심협은 실망하거나 놀라기보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어서 온몸에 금색 빛이 다시 가득 차더니, 각각 세 마리의 용과 코끼리 형상이 나타났다. 용과 코끼리들은 포효하며 날아들어 심협의 두 팔로 녹아들었다. 그러자 심협의 두 팔이 발하던 금색 빛이 돌연 몇 배로 불어났다.

“이것도 막을 수 있을까?”

심협은 냉소하며 방금 전보다 몇 배는 더 강해진 주먹을 휘둘렀다.

두 주먹이 화산이 폭발하는 듯한 기세로 달려들자 하얀 광막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해 무수히 많은 하얀 점이 되어 흩날렸다.

그러나 심협의 두 주먹은 광막을 찢고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가면서 석벽을 매섭게 두들겼다.

꽈르릉!

견고한 석벽도 심협의 주먹 앞에서는 두부처럼 약해 보였다. 굉음이 울리더니 심협의 주먹이 꽂힌 부분을 중심으로 석벽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허공에는 하얀 빛 여러 줄기가 나타나 모든 것을 감쌌다. 덕분에 주변의 모든 것이 환영처럼 변했다. 오직 석벽의 구멍만이 실재하는 것 같았다.

심협은 길게 숨을 내쉬며 주먹을 거두고는 석벽의 구멍을 통해 그 너머의 수풀을 살폈다. 그러다가 불쑥 몸을 솟구쳐 그 구멍을 통해 나갔다.

눈앞이 어그러졌고, 잠시 후에는 낯익은 낭떠러지 벽 앞에 나타났다.

“결국 나왔구나!”

심협은 역시나 낯이 익은 산봉우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서천호는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시간이 꽤 지났으니 아마 기다리지 못하고 가버린 듯했다.

“아쉽군. 지금의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보려면 서천호만큼 적합한 상대도 드물 텐데…….”

그렇다고 일부러 서천호를 찾아가 겨뤄볼 생각은 없었다. 타고나기를 그리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우연히 만나기라도 한다면 그때 알아보면 될 일이지.”

심협은 뒤편 낭떠러지 벽을 바라보았다. 원래 하나였던 큰 구멍이 두 개로 늘어 있었는데, 안에서 하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구멍은 닫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보아하니 그 금제를 내가 망가뜨린 것 같구나.”

심협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큰 돌을 몇 개 가지고 와 그 구멍을 막았다. 그러고 나서야 더는 지체하지 않고 다시 산을 내려갔다.

지금 그는 육신이 강해진 것 외에도 민첩함과 속도도 크게 증가했다. 험준하고 가파른 산길도 평지 걷듯 다녔을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순식간에, 단 몇 걸음 옮긴 것만으로 멀어져갔다.

그런데 심협이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 빛에 싸인 누군가가 저 멀리서 쏜살처럼 다가와 낭떠러지 벽 앞에 섰다. 하얀 빛이 거두어지고 서천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서 파란 번개가 발사되더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심협이 구멍을 막아놓은 돌들이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튀었다.

서천호는 지체 없이 구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반 시진 후, 낭떠러지 벽 구멍 안에서는 분노가 가득한 포효가 터져 나왔다. 근처의 산 벽까지 흔들릴 정도였다.

* * *

서천호가 분노의 포효를 터뜨리고 있을 무렵, 심협은 이미 방촌산을 내려온 후였다. 낭떠러지의 벽 앞을 떠난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기에 더더욱 발걸음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산기슭의 못에서 얼굴을 씻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굴 안에 있을 때에는 열두 시진 내내 환했으니 낮과 밤이 바뀌는 것도 알지 못하고 지냈다. 그래서일까? 지금 올려다본 하늘은 마치 커다란 검은 막으로 뒤덮인 것처럼, 시간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기이하고도 숨 막힐 듯한 중압감이 느껴졌고, 대기에도 서늘한 한기가 퍼져 있었다.

“곧 폭우가 내릴 모양이군.”

심협은 다소 이상하다 여겼지만, 크게 개의치 않고 곧장 장수촌으로 돌아갔다.

“시…… 심…… 선사님? 심 선사님이십니까? 살아계셨군요!”

마을 입구 울타리 안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사람들이 심협을 보고는 놀람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으로 달려나왔다.

처음에는 그 반응이 의아했던 심협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산에 오른 지 20여 일이나 지났고, 당시 서천호에게 쫓기기까지 했으니 누구라도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할 것 아니겠는가.

“나는 괜찮소. 문을 열어주시오.”

“네, 네! 선사께서 살아계시다니, 천만 다행입니다. 어서 문을 열게.”

청우는 사람들 틈에서 걸어 나와 심협에게 공수하며 말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불러다가 뭔가를 분부했다.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쏜살같이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그간 마을은 어떠했소? 그리고 영락은 돌아왔소?”

심협은 마을로 들어서면서 뒤따르고 있는 청우에게 물었다.

“영 선사 말씀이십니까? 지금 마을 안에 있습니다. 방금 사람을 시켜 전달했습니다. 며칠 전에 요괴들이 마을을 습격했는데 영 선사가 물리쳤습니다.”

청우의 대답에 심협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그리 깊게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영락에게 별일이 없다니 된 것 아니겠는가.

그때, 심협의 뒤를 따르던 청우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심 선사님, 그간 어디에 계셨습니까? 벌써 한 1년은 지났으니 저희는 선사님이 떠나셨거나 무슨 일을 겪으신 줄로만 알았거든요.”

“1년? 1년이라니!”

심협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네? 1년쯤 전에 영 선사와 함께 방촌산에 올랐다가 돌아오지 않으셔서…….”

청우는 자기가 뭘 잘못한 게 있는지 긴장하며 말했다.

심협은 눈이 휘둥그레져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선사님, 괜찮으십니까?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청우는 심협을 따라 걸음을 멈추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아, 아니오. 그게 벌써 1년 전이란 말이오?”

심협은 청우가 긴장하는 듯하자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렇습니다. 작년 6월에 방촌산에 오르셨지요. 지금이 10월이니 1년 하고도 넉 달이 지났군요.”

청우는 자기 잘못이 아닌 걸 알고 조금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청우는 약간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쌀쌀하다고 느낄 정도의 날씨였다. 그제야 심협은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쩐지…… 하산하는 내내 무언가 이상하다 싶더니……. 장수촌도 조금 달라졌고…….’

하지만 자신이 동굴에서 지낸 것은 고작 20여 일이었는데 어떻게 여기서는 1년이 넘게 지났단 말인가?

문득 영락이 해준, 나무꾼과 방촌산 신선들의 바둑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이야기만큼 극적으로 많은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상황이었다.

‘보아하니 영락이 해준 이야기가 그저 설화는 아닌 모양이구나.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도 모르겠어.’

심협이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저 앞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 대형! 정말 심 대형이군요! 무사하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얼굴에 희색이 가득한 영락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영 도우.”

다시 영락을 만나자 더없이 반가웠지만, 심협은 기쁨을 살짝 억누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영락 뒤로는 마을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는데, 심협을 보고는 다들 놀랍고도 기쁜 기색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 거처로 옮겨서 합시다.”

심협은 영락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청우, 마을 입구를 잘 지켜주세요.”

영락은 청우에게 분부한 뒤 바로 심협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금세 심협의 거처에 도착했다. 1년 넘게 떠나 있었지만, 그의 거처는 여전히 깨끗했다. 누군가가 계속 청소를 한 것이 분명했다.

“심 대형, 그동안 어디 계셨습니까? 어찌 소식도 전하지 않으시고…… 저는 심 대형이 서천호에게 목숨을 잃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영락은 원망하듯 말했다.

“미안하오. 다 이야기하리다. 내 그날 서천호에게 쫓기다가 우연히 한 동굴로 숨어들었는데, 그곳의 금제 때문에 1년이나 갇혀 있다가 얼마 전에 겨우 탈출했다오.”

심협은 사월삼성동 안의 상황을 말하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영락과 장수촌 사람들에게 방촌산 신선은 유일한 희망이 아닌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이를 악물고 버틸 수 있는 것이 모두 그 희망 덕이었다. 지금 방촌산의 멸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절망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리 된 것이군요. 그런데 심 대형의 수련이 또 정진한 것 같습니다.”

영락은 고개를 끄덕이다 감탄한 듯 눈빛을 빛냈다.

영락에게는 신식이 없으니 심협의 수련 경지를 느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와 전에 없이 탄탄해진 육신의 힘을 느끼고는 그렇게 말했다.

“동굴을 벗어나려고 정말 열심히 수련을 했소. 보아하니 영 도우도 수련이 크게 증진한 듯하오. 연기 후기에 진입했구려.”

심협이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이전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까지만 해도 영락의 수련은 연기 중기였다. 그런데 그에게는 약 3주, 실제로는 1년 넉 달이 지난 지금 연기 후기에 올라섰으니 영락의 자질도 비범하다 할 만했다. 또한 영락은 수련만 높아진 것이 아니라 몸에도 무언가 변화가 생긴 듯했다.

“심 대형 앞에서는 부끄러운 수준이지요. 언급할 것조차 못 됩니다.”

영락은 고개를 저으며 웃어 보였다.

심협은 이어서 그간 마을이 어떠했는지 물었다. 영락의 말대로라면, 1년여 동안 마을은 비교적 평온했다. 종종 요괴들이 습격해오기는 했지만, 다행히 수준 낮은 요괴들뿐이었다. 게다가 영락의 수련도 높아져 그럭저럭 대응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눈 후, 영락이 일어나 작별 인사를 했다.

“영 도우, 잠시 기다리시오.”

심협은 떠나가려는 영락을 부르더니 칠성필에서 사엽화(四葉花)와 영초를 하나 꺼내 건넸다.

“사엽화! 배원초(培元草)!”

영락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영 도우가 영초에도 조예가 깊은 줄은 몰랐구려. 그 동굴에서 찾아낸 것이라오. 사엽화는 탕약으로 달여 아이들에게 먹이면 보신이 될 게요. 배원초는 영 도우가 드시오. 몸의 근원을 튼튼하게 해줄 테니까. 어쩌면 수련의 관문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오.”

심협은 두 영초를 영락의 손에 쥐여주고, 웃으며 말했다.

“이 배원초는…… 적어도 200년은 넘어 보이는데…… 너무 진귀한 것이라 받을 수 없습니다.”

영락은 사엽화만 받더니 배원초는 다시 심협에게 건넸다.

“그저 영초일 뿐이니 개의치 마시오. 내 동굴에서 얻은 것이 꽤 많소.”

심협은 허리춤의 칠성필을 툭 치며 웃었다.

그 모습에 영락은 머뭇거리면서도 배원초를 쉬이 받아 들지는 못했다.

“영 도우는 항상 시원시원한 모습이었는데 오늘은 어찌 머뭇거리는 것이오? 나를 아직 심 대형으로 여긴다면 받으시오.”

심협은 안색을 굳히며 짐짓 화난 척하며 말했다.

“심 대형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면목 없지만 받겠습니다.”

영락은 순간 당황했다가 가볍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영 도우의 수준이 올라야 장수촌에도 좋은 일 아니겠소? 나 역시 장수촌 사람이니 그대의 수준이 오르는 것은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오.”

심협은 그제야 웃으며 말했다.

우연히 사월삼성동에 들어가 수많은 소득이 있었으니 방촌산의 큰 은혜를 입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마도 방촌산은 이미 멸문된 것으로 보여 보답할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방촌산의 명맥을 이어가는 사람이 있는 장수촌을 돕는 것이 그 은혜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리라.

배원초 하나로 모든 은혜를 갚았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심협은 방촌산에서 가지고 온 것들을 모두 살펴보고 장수촌에 천천히 보답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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