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17화 (117/1,214)
  • 117화. 석문(石門)

    심협은 급히 물러나며 피수결(避水訣) 광막으로 몸을 감쌌다. 그러나 한발 늦어버렸다.

    빛의 칼이 심협의 오른손과 왼발을 스치고 지나갔다. 베인 곳에서는 피가 흘렀으나,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었다.

    반월환은 허공을 가득 채운 은색 빛을 가르며 날아 나왔다. 그런데 쉴 새 없이 떨리는 데다 표면의 진도 많이 어두워진 것으로 보아 영성(靈性)에 적지 않은 손상이 온 것 같았다.

    그러나 석문의 하얀 빛은 이번에도 미미한 파동만 일었다가 바로 원상태를 회복했다.

    “음…….”

    심협은 표정은 더욱 무거워졌다.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 수단인 반월환으로도 석문의 금제에 아무런 영향조차 미칠 수 없으니 마음이 무거울 뿐이었다.

    심협은 수련 수준에 비해 금제에 대한 지식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니 그저 힘으로 깨부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보아하니 내 관도동과는 인연이 닿지 않는 모양이구나.”

    심협은 결인하여 반월환을 불러들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방촌산 종파는 참으로 넓어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 더 많으니 굳이 이곳에 목을 맬 필요는 없겠지.”

    심협은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는 돌아섰다. 그런데 바로 그때, 등 뒤에서 돌연 팍 하는 소리가 울렸다.

    심협이 재빨리 다시 몸을 돌려 보니 석문에는 조그마한 붉은 빛이 하나 떠올라 있었다.

    “저것은……?”

    붉은 빛이 있는 곳을 자세히 살펴보니 핏자국이 있었다.

    “아…… 반월환에 손을 다쳤을 때 피가 저기까지 튄 모양이군. 그나저나 참으로 신기한 일이로구나. 석문에 피가 묻자 변화가 일어나다니…….”

    비록 저 붉은 빛이 무슨 작용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작은 변화라도 보인 것이 희망적이었다.

    심협은 석문에 오른손의 피를 문질러 닦았다.

    하지만 석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붉은 빛도 전혀 일지 않았다.

    “흠…….”

    심협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피가 묻은 곳들을 살폈다. 자세히 보니 붉은 빛이 일었던 곳은 검붉은 무늬가 새겨진 곳이었다.

    심협은 곧장 그 무늬에 다시 손을 문질러 피를 묻혔다. 그러자 예상했던 대로 그 무늬에서는 피처럼 붉은 빛이 일었다.

    “역시 그랬군!”

    심협은 환하게 웃으며 손과 왼쪽 발에 묻은 피를 모두 석문의 무늬에 발랐다. 그러고도 피가 부족하자 손가락을 그어 피를 내기까지 했다.

    잠시 후에는 무늬 전체에 피를 바를 수 있었다. 그러자 석문의 검붉은 무늬가 이루고 있는 기이한 도안 전체에 붉은 빛이 일었고, 깜빡이기 시작했다.

    위잉!

    도안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리더니 석문에서 도안이 서서히 떠올랐다. 이어서 허공에 뜬 채로 눈부신 붉은 빛을 발산했다.

    심협은 급히 뒤로 물러나 이 신기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피처럼 붉은 도안은 한참 요동치더니 돌연 소리 없이 깨졌고, 무수히 많은 붉은 빛이 되어 석문으로 녹아들었다. 그러자 석문 앞으로 하얀 빛이 떠올라 미친 듯이 번득였고,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백색 부적 문양이 나타나 허공으로 흩어졌다.

    문에 일었던 하얀 빛은 급속히 어두워지더니 몇 차례 호흡할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카칵!

    가벼운 소리와 함께 푸른 석문에 한 줄기 금이 생겨났다.

    심협은 기쁨을 억누르며 힘껏 문을 밀어보았다.

    그러나 무슨 재질로 만든 것인지, 석문은 금제가 사라졌는데도 매우 무거워, 젖 먹던 힘까지 다해도 몇 촌 정도 열리는 데 그쳤다.

    심협은 시큰거리는 손목을 풀며 잠시 쉬었다가 양손을 결인하고 끌었다.

    그러자 주변 허공에 물의 빛이 일렁이더니, 커다란 손 두 개가 나타나 석문을 힘껏 밀었다. 그럼에도 석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심협은 출규기 수사로 법맥은 더욱 증강되어 어수지술(御水之術)의 위력도 크게 증가했다. 방금 사용한 법술의 힘이라면 수천 근 바위도 밀어낼 수 있을 것이고, 그 자신이 미는 것보다 몇 배는 강할 터였다. 그런데 어째서 직접 밀었을 때는 조금이나마 열렸던 문이 물의 손으로 밀었을 때는 전혀 밀리지 않는단 말인가?

    “설마…… 이 문은 법술로는 열 수 없단 말인가?”

    심협은 그렇게 추측하고는 어수지술을 거두고 다시 두 손으로 석문을 힘껏 밀어보았다. 그러자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조금 더 열렸다.

    그렇게 1각 정도를 틈틈이 휴식을 취해가며 연 결과 석문에는 1척 정도의 틈이 생겨났다. 사람 한 명은 어떻게든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심협은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 석문에 기댄 채 한참을 쉬고 나서야 겨우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조심스레 문 너머를 살핀 심협은 순간 경계심이 치솟았다. 외부의 빛은 그 안으로 전혀 들어갈 수 없는 것인지, 문 너머는 완전한 어둠에 잠겨 아무것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협은 잠시 고민하다가 우선 신식을 내보내 석문 안쪽을 살폈다. 하지만 신식은 무형의 힘에 저지당해 조금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역시 금제가 있었군.”

    하지만 이대로 물러갈 수는 없었기에, 그는 결심한 듯 눈을 빛냈다. 이어서 피수결로 광막을 만든 후 조심스레 석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석문을 지나치자 공간의 파동이 느껴졌는데, 마치 전혀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았다. 곧이어 주변이 갑자기 밝아지기 시작하더니 제법 큰 동굴 안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행히 뒤에는 석문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바깥이 분명하게 보였다. 이에 심협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동굴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벽과 바닥은 모두 단단한 백색 암석이었다. 마치 특수한 옥돌 같은 이 암석은 뼛속까지 찌를 것처럼 차가웠다. 그 서늘함에 오히려 정신이 번쩍드는  듯했고, 다만 정확히 무엇으로 이루어진 암석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동굴은 매우 넓었는데, 거의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가장 깊은 곳에는 마치 병풍 같은 하얀 수정 벽이 솟아 있었고, 그 앞에는 황색 방석이 놓여 있었다.

    심협은 의아했지만, 경거망동하지 않고 우선은 신식을 내보내 살펴보았다.

    석벽과 바닥에는 조금 전의 그 금제가 있는 것인지 신식이 조금도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신식으로 동굴 안을 살피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심협은 동굴의 다른 곳을 모두 둘러본 후 하얀 수정 벽 앞에 멈춰 섰다.

    수정 벽은 높이가 약 2장에 너비는 5척 정도였다. 표면은 이상하리만치 매끄러워 마치 밝은 거울처럼 심협의 모습이 비춰졌다. 그리고 그 위로 어렴풋이 하얀 빛이 몇 가닥 보이기도 했다.

    수정 벽을 자세히 살피자 처음에는 별것 아닌 듯했던 하얀 빛이 점점 눈에 들어왔다. 이 하얀 빛은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는데, 심협의 신식도 이를 따라 회전했다. 그리고 그는 잠시 후 현기증을 느꼈다.

    심협은 화들짝 놀라 급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머릿속의 신식이 서서히 회복되면서 현기증도 점점 사라졌다. 심협은 그제야 다시 눈을 떴다.

    “사람의 정신을 이리 어지럽힐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한 벽이로구나! 하지만 이곳의 이름이 관도동인데…… 관도(觀道, 도를 보다)라……. 설마 이 수정 벽을 보면서 도를 깨우칠 수 있다는 것인가?”

    심협은 확신이 없는 듯 나지막이 중얼거렸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수정 벽 앞에 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황색 방석을 가지고 와 깔고 앉았다. 이어서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에야 다시 하얀 수정 벽을 바라보았다.

    수정 벽의 하얀 빛은 다시 그의 시야를 가득 메웠고, 머릿속의 신식도 회전시켰다. 이내 다시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깔고 앉은 방석에서 청량한 기운이 전해지더니 현기증이 한층 약해진 것이다.

    심협은 기뻐하며 온 힘을 다해 신식을 운공하여 수정 벽의 영향에서 벗어나려 했다. 동시에 두 눈은 계속 수정 벽을 보고 있었다. 혹시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수정 벽의 하얀 빛은 그저 회전만 할 뿐,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심협은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잔뜩 흘렀고, 정수리에서는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방석의 도움이 있음에도 현기증은 점점 더 심해졌고, 시야도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두 눈은 수정 벽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내 추측이 틀린 것인가? 도를 깨우치는 방법이 이게 아니란 말인가?’

    심협은 힘겹게 버티며 속으로 외쳤다.

    또다시 1각이 지나자 현기증이 너무 심해져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그때, 그의 두 눈에는 파란 영광(靈光)이 일었고, 이어서 수정 벽의 영향을 막아내고는 겨우 시선을 옮겼다.

    그때였다.

    “껄껄! 이리 오래 버틴 것만 해도 대단하구나!”

    돌연 놀리는 듯한 목소리가 심협의 귓가에 울렸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회전하던 수정 벽의 하얀 빛에 파동이 일더니 밀물처럼 사라져 버렸다.

    다음 순간, 하얀 수정 벽 안에는 심협의 모습이 다시 뚜렷하게 비쳤다.

    그리고는 가느다란 금색 빛이 수정 벽에 나타나더니 가볍게 요동쳤다.

    하얀 빛이 사라지면서 현기증도 같이 사라진 심협은 멍하니 앉아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고, 동굴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심협은 잠시 고민에 빠졌으나, 이내 그 목소리에 대해서는 잊고 수정 벽의 금색 빛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건…… 털인가?”

    자세히 보니 그 가느다란 금색 빛은 수정 벽에 딱 붙은 금빛 찬란한 짐승의 털이었다.

    그때, 털에서 금색 빛이 맹렬히 발사되더니 수정 벽으로 파고들었다. 털이 파고든 것은 수정 벽에 비친 심협의 미간이었다.

    그 순간, 수정 벽 안에 비쳐진 심협의 모습에 변화가 생겨났다. 체구가 서서히 줄어들었고, 의상도 빠르게 바뀌었다. 순식간에 깡마르고 기이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뚜렷하지는 않아서 이목구비도 제대로 볼 수 없었으나, 자세히 보면 입은 뾰족했고 볼은 원숭이의 그것이었다. 온몸에는 금색 털이 자라 있었고, 의복은 푸른 도포였다.

    이 갑작스런 상황에 심협은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수정 벽 안의 기괴한 모습이 돌연 고개를 들더니 심협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헛!”

    심협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가 다른 어떤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수정 벽에 비친 그 기괴한 모습이 돌연 검은 그림자로 변했다.

    위잉!

    가볍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수정 벽에서 발사된 그 그림자는 순식간에 심협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속도가 번개처럼 빨라 지척에 있었던 심협으로서는 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큰일이다!’

    퍼펑!

    곧이어 심협의 머릿속에서 폭발음이 울렸다. 무형의 힘이 침입한 것만 같았는데, 이 힘은 놀라울 정도로 강력했다. 출규기 수사의 막강한 정신력으로도 전혀 막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머릿속에서 천지를 뒤흔들 듯한 거대한 진동이 일었다. 곧이어 머릿속이 뜨거워지더니 모든 신식의 힘이 물 끓듯 요동쳤다. 이에 심협은 바로 혼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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