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15화 (115/1,214)
  • 115화. 탈혼(脫魂)

    “하는 수 없지.”

    잠시 망설이던 심협은 이내 광장 위로 올라가 보았다.

    한데 그가 광장의 하얀 바닥을 밟자마자 사방에서 회오리가 이는 듯하더니 도깨비불들을 휩쓸었다. 도깨비불은 허공을 수놓으며 날아다녔다.

    심협은 긴장감을 바짝 끌어올리며 우뚝 멈춰 서서 사방을 경계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야 심협은 조금 마음을 놓고 광장 중앙의 대로 향했다.

    한데 그가 백여 걸음을 더 다가가 이제 대와의 거리가 10여 장밖에 남지 않았을 때, 귓가에 갑자기 사람 목소리 같은 것이 모호하게 울렸다. 처음에는 마치 모기 소리처럼 작았던 이 소리는 자세히 들어보니 매우 웅장하여 계속 메아리쳤다. 다만 소리가 크든 작든 또렷하지가 않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심협은 긴장한 채 그 소리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귓속에 이 문장이 분명하게 들려왔다.

    “옳은 길이면 나아가고, 옳지 않은 길이라면 물러갈 것이라.”

    그 소리가 들려온 순간, 심협의 머릿속에는 마치 천둥이 치는 것만 같았다.

    꽈르릉!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이어서 심협은 마치 철퇴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몸이 앞뒤로 흔들렸고, 균형을 잃어갔다.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 심협은 급히 신식을 가다듬고 손으로는 미간을 누르면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

    돌연 떠오른 기억. 언젠가 옥침에 관련한 일을 사부에게 말하려 했을 때 나타났던 기이한 현상. 분명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심협은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나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울리던 벼락 치는 듯한 소리도, 모호한 목소리도 사라졌다.

    “방금 분명 사람 목소리를 들었는데, 무슨 이야기를 했던 것인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심협은 의혹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심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답답함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분명 어떤 목소리를 들었는데 뭐라고 말했는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던 것이다.

    문득 예전에 책에서 본 내용이 떠올랐다. 신식을 공격하는 술법이 있는데, 이 술법에 당하면 혼에 부상을 입게 된다. 이 경우 기억을 잃는 정도에서 그치면 다행이고 심하면 영지(靈智)가 완전히 훼손되어 백치가 되기도 한다.

    심협은 당황하여 급히 눈을 감고 식해(識海)를 살폈다. 식해 안에는 옅은 파란색의 인영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심협이 응혼기에 진입할 때 그의 혼이 모여서 이룬 사람 형상으로, 다행히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헛!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심협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놀라며 두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기쁨과 놀라움이 뒤섞여 있었다. 부상을 당했을까 우려했던 신식은 멀쩡했고, 식해는 이전보다 더욱 확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심협은 신식을 내보내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기쁨은 더욱 커졌다. 신식으로 살필 수 있는 범위가 반경 10장 정도에서 11장 정도로 넓어졌기 때문이다.

    “좀 전에 들린 목소리가 신식을 강화하고 식해도 확장시켜준 것일까?”

    심협은 조심스레 추측했다. 이런 생각에 그는 한층 진지해졌고, 기대와 경계심이 반쯤 뒤섞인 심정으로 다시 한번 광장 중앙의 높은 대로 향했다.

    대까지의 거리가 10장 정도로 줄었을 때, 머릿속에서 다시 그 기이한 목소리가 울렸다.

    심협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다시 한번 그 목소리를 들어보려 집중했다.

    “사(邪)의 길은 가지 말 것이며…… 암실에서도 속임이 없어야 한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머릿속에서 천둥 같은 굉음이 크게 울렸다.

    꽝!

    “큭!”

    심협의 머릿속은 또다시 극심한 통증으로 부서질 듯했다. 아까보다도 훨씬 큰 고통이었고, 그 웅장한 소리에 고막이 찢어질 듯했다. 심협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거의 넘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는 재빨리 가부좌를 틀고 두 손을 원 모양으로 만들며 정좌했다.

    “덕(德)과 공(功)을 쌓고, 만물을 자애로운 마음으로 대하라.”

    또 한 구절이 울렸다. 심협은 그제야 다소 거친 노인의 거친 목소리라는 느낌을 받았다. 나이가 매우 많은 사람이 말하는 것 같았다.

    “옳은 길이면 나아가고, 옳지 않은 길이라면 물러갈 것이라. 사(邪)의 길은 가지 말 것이며, 암실에서도 속임이 없어야 한다. 덕(德)과 공(功)을 쌓고, 만물을 자애로운 마음으로 대하라……. 이건 보제 조사의 가르침 아닌가?”

    심협이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또 다른 가르침이 울렸다.

    “외물에 희비가 엇갈리지 말고, 자신을 바르게 하여 남을 감화하라.”

    콰쾅!

    머릿속에 폭발음이 울렸다. 마치 거대한 망치에 두들겨 맞은 듯, 다시 한번 극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심협은 그대로 고꾸라졌고, 시야도 흐릿해졌다.

    그러나 심협은 이를 악물고 식해를 살폈다. 신식의 힘은 더 강해져 있었고, 식해 안의 사람 형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그래, 분명 이 가르침의 목소리가 나를 더 강하게 만드는 거야. 비록 참기 힘든 고통이지만, 이겨내야 한다.’

    그때 또다시 가르침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그의 머릿속에 굉음이 울렸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순간, 그는 순식간에 모호한 잔영들이 눈앞에 나타난 것을 보았는데, 시야가 흐려진 탓에 모호했다.

    “…….”

    잠시 후, 머릿속의 울림이 사라졌다. 동시에 눈앞의 잔영들도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심협은 일어나려 했으나 몸이 무거워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그는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고, 재빨리 경맥들을 살폈다. 다행히도 경맥에는 전혀 이상이 없었으나 어째서인지 몸을 전혀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상황을 미처 파악도 하기 전에 또 한 구절의 가르침이 떨어졌다. 이와 함께 또다시 천지가 뒤흔들리는 듯한 진동이 전해졌다.

    “크으으…….”

    이번에는 혼(魂)만 떨리는 것이 아니라 육신마저 맹렬히 떨렸다. 망치로 내리치는 듯한 힘이 육신을 통과해 체내 경혈까지도 떨리게 했다.

    체내의 20개 법맥이 동시에 떨리면서 그 안에 담긴 법력마저도 통제를 벗어나 미친 듯이 운공되기 시작했다.

    “설마…… 법맥 속의 법력마저도 단련되는 것인가? 어째서지?”

    심협은 극심한 통증을 견디면서도 커져가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법맥과 신식이 마치 대장장이가 단련하는 쇳덩이라도 된 듯했다. 보이지 않는 망치가 끊임없이 두드리듯, 액화(液化)되어 있던 그의 법력은 점점 순도가 높아져 갔다.

    식해 안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사람 형상 또한 점점 또렷해져 이목구비의 윤곽까지 드러났다. 심협과 쌍둥이처럼 닮은 얼굴이었다.

    “날아가는 인연을 쫓아가니, 겨울잠에서 깬 생명들이 꿈틀거리네.”

    콰쾅!

    이제는 익숙해진 머릿속의 목소리와 거대한 폭발음이 거의 동시에 울렸다. 그러나 이번의 통증은 이전까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크아악!”

    심협은 처참한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야가 흐려지지 않았고, 또 하나의 ‘심협’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이 심협은 제자리에 가부좌를 튼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심협이 급히 자신의 몸을 살펴보니 옅은 하얀 빛에 싸여 있었다. 뿌연 빛에 휩싸인 자신보다 오히려 저 앞에 앉아 있는 또 다른 심협이 실재하는 사람 같았다.

    비록 순식간에 지나간 장면이기는 했지만, 심협은 아까 눈앞에 나타났던 잔영들은 자신의 혼이 육신을 떠날 때 일어난 잔영이었음을 깨달았다. 지금껏 몸이 흔들린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혼이 충격을 받아 몸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체내의 법맥도 절반이 빛나기 시작하더니, 그 안에서 액화되어 있던 법력이 마치 불어난 강처럼 지극히 빠르게 흘렀다.

    놀라운 광경이었지만 심협은 두렵기는커녕 매우 기뻐했다. 혼이 몸을 벗어났다는 것은 출규기로의 진입을 앞두고 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출규기에 이르면 혼이 자유롭게 육신을 떠날 수 있다고 하는데, 혼이 제대로 모여 뚜렷해지지 않으면 육신을 벗어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니 지금 자신의 혼이 육신을 떠났다는 것은 제대로 혼이 응집됐다는 의미이고, 이는 곧 출규기가 머지않았음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심협은 기쁨을 참지 못해 속으로 크게 외쳤다.

    ‘혼을 내려치는 충격이여, 다시 오거라!’

    그 순간,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꽝!

    이번에는 심협의 혼도 이전처럼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몸 밖으로 밀려났다. 혼이 육신과 완전히 분리되어 허공에 뜨게 된 것이다.

    심협은 어슴푸레한 빛으로 이루어진 양손을 들어 눈앞에서 흔들어 보았다. 그리고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육신을 내려다보며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혼으로 이루어진 사람 형태의 빛은 그의 의지대로 가볍게 나부끼며 밤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심협은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아무런 속박도 없는 자유를 만끽했다.

    어느덧 심협은 이미 30장 높이까지 날아올랐다.

    밤하늘에서는 바람 소리가 점점 커졌고, 심협은 갑자기 추위를 느꼈다. 맞은편에서는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는데, 심협은 피하지 못하고 휩쓸려 버렸다. 그의 혼은 마치 깃털보다도 무게가 적은 것처럼 바람에 먼 곳까지 쓸려갔다.

    얼떨떨해 있던 심협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바람에 십여 장을 쓸려간 뒤였다. 그제야 그는 육신과의 연결이 약해진 것을 알아차리고는 급히 하강했다.

    육신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연결된 듯한 느낌은 점점 강해졌다.

    심협은 자신의 육신을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나부끼며 멀리까지 날아가 보았다. 단, 이번에는 높이 날아오르기보다는 땅바닥에서 낮은 고도로 멀리까지 이동했다. 그렇게 30여 장을 날아가자 다시 육신과의 연결이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심협은 탐색을 멈추고 다시 돌아갔다.

    그런데 그 순간, 또다시 가르침의 목소리가 울렸다.

    “맥이 안정되고 기(氣)가 기민하니, 혼이 허공에서 노닌다.”

    심협의 혼은 순간 무형의 거대한 힘이 내리치는 것을 느꼈다. 육신이라는 보호막도 없고 충격을 분산해줄 법맥도 없다 보니 이번에는 그 막강한 힘이 그대로 혼을 내리찍었다. 혼이 단숨에 부서질 것만 같았다.

    “…….”

    심협의 비명을 지르려 입을 벌렸으나,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파란 빛들이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혼력(魂力)이 흩어지는 것이었다.

    심협은 화들짝 놀랐고, 가르침의 여운이 가시자마자 급히 혼을 제어하여 육신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고작 3, 4장을 이동했을 때, 또다시 가르침의 소리가 울렸다.

    꽝!

    심협의 혼은 바닥에 내리 찍혔다. 이번에는 억지로 이를 악물고 극심한 고통을 참아냈지만, 입을 벌리지 않자 코와 귀에서 혼력이 흩어져 나왔다.

    심협은 갑작스레 추위를 느끼고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여 혼을 살폈다. 한데 혼이 아까보다 한층 어두워져 있었다. 이에 심협은 덜컥 겁이 났고, 고통을 참아내며 힘겹게 일어나 육신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곧은 것은 굽었다 하며, 중한 잘못을 가볍게 처리한다.”

    심협의 혼이 막 걸음을 떼었을 때, 가르침이 다시 전해지며 무형의 거대한 힘이 내리쳤다. 그리고 심협의 혼은 그대로 쓰러졌다.

    이번에는 코와 귀뿐 아니라 입과 눈에서도 파란 혼력이 흩어져 나왔으니, 마치 이목구비에서 푸른 피를 쏟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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