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14화 (114/1,214)

114화. 선령백초(仙靈百草)

아까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공간의 한구석에 돌멩이가 놓여 있었다. 아까 그가 주워 들었던 바로 그 돌멩이였다.

“칠성필이 물건들을 저장할 수 있는 법기였다니!”

심협은 칠성필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말했다.

희열이 차올랐다. 현실 세계에서 우연히 얻은 석합에도 물건을 축소하는 기능이 있기는 하지만, 칠성필에 비하면 저장 공간이 터무니없이 좁았다. 더구나 석합은 크기가 커서 들고 다니기도 불편했다.

한참 후, 심협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한 손에 칠성필을 쥔 채 무언가를 시도했다. 그러자 칠성필이 미미하게 번득이더니 돌조각이 허공에서 나타나 심협의 손으로 떨어졌다.

“마음대로 넣었다 꺼낼 수 있으니 참 편리하구나!”

심협은 영약이 든 봇짐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곧장 영약과 영목, 옥간, 바둑돌 등을 전부 칠성필 안에 집어넣었다.

잠시 후, 심협은 대전 문 앞의 시신에게 포권으로 예를 표한 뒤 조심스레 거두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다시 대전 앞으로 돌아온 심협은 시신이 생전에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것 같은 대전 문을 열었다.

끼이익!

다소 을씨년스러운 소리와 함께 먼지가 피어올랐다.

심협은 소매로 먼지를 날리다가 맞은편에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고작 몇 걸음 앞, 높이가 1장 정도 되는 백골이 있었다. 흉측하게 생긴 머리뼈였다. 뾰족한 뿔이 나 있고, 턱은 이상하리만치 돌출되어 있는 것이 언뜻 산양 같기도 했다. 하지만 가시처럼 뾰족한 이빨들로 미루어 산양 뼈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요괴의 해골 머리에 이어진 거대한 시체가 보였다. 이 시체는 가로로 대전 전체를 가로지르고 있었고, 꼬리만이 대전 뒤쪽 벽의 큰 구멍으로 뻗어 있었다.

“보아하니 이들은 결국 대전을 지켜내지 못한 것 같구나. 이 짐승 요괴가 뒤에서 벽을 부수고 들어온 모양이야.”

심협은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탄식했다.

그는 대전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곧 쓰러질 것처럼 무너진 흑단목 책장들이 있었고, 바닥에는 낡을 대로 낡고 더러워진 책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이곳은…… 방촌산의 서재(書齋)였던가? 방촌산 제자들이 이곳을 목숨 걸고 지키려던 이유가 있었군.”

심협은 눈빛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이어서 그는 책장을 세웠고, 바닥에 떨어진 책들도 정리했다. 유용한 공법이 적힌 책이 있는지도 찾아보았다. 하지만 너무 낡은 대다가 오랜 세월 빗물에 침수된 책들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라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전 가장 뒤편에는 흑단목 책장들이 기울어진 채 서로 이어져 있었는데, 완전히 쓰러지지는 않은 상태였다. 수많은 책들이 책장 사이에 끼어 있었다.

심협은 그중 가장 바깥쪽 책장을 밀어 다시 세웠다. 그러자 그 틈에 끼어 있던 백여 권의 책이 와르르 떨어져 내렸다.

개중에는 푸른 가죽으로 표지를 싼 고서도 있었고, 죽간(竹簡)을 엮은 것도 있었다. 그리고 표지가 온전히 남은, 비교적 잘 보존된 전집도 있었다.

심협은 손이 닿는 대로 푸른 표지의 책들을 주웠다. 표지에는 ‘청전배원공(靑田培元功)’이라는 다섯 글자가 금빛으로 쓰여 있었다.

대충 한번 훑어보니 소화양공 같은 부류의 기초 단련 공법이 쓰여 있었다.

심협은 주위를 깨끗하게 치운 후 <청전배원공>을 놓아두었다. 그리고 다시 허리를 숙여 죽간 고서적을 주워 펼쳐 보았다.

잠시 그 책을 보던 심협은 일순 멍해졌다가 다음 순간 놀랐고, 이어서 의아한 듯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실전되었다던 <금궤(金匱)>를 여기에서 찾을 줄이야!”

<금궤>는 비전 공법이 담긴 책이 아니라 평범한 옛사람이 남긴 의서로, 수많은 난치병에 쓰는 민간요법이 담겨 있었다. 예전에 이 책을 얻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보았으나 결국 얻지 못했다. 한데 지금, 여기서 이 책을 보게 되니 감개가 무량했다. 그러나 지금의 그에게는 아무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금궤>를 내려놓은 심협은 책 무더기에서 다시 고서 전집을 골라냈다.

잔뜩 쌓인 잿빛 먼지를 털어낸 후 전집함에 들어 있는 책을 모두 쏟아냈다. 총 세 권의 서책이었는데, 표지에는 모두 ‘선령백초’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었고, 각각 주석으로 초목(草木), 충수(蟲獸), 광석(鑛石)이라는 작은 글자가 있어 서로 구분이 됐다.

심협은 세 권 중 가장 두꺼운 초목 편을 펼쳐 자세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이 책에는 수많은 초목 영약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고, 글로 된 설명뿐만 아니라 생생한 그림도 있어 이해하기 수월했다.

한 장씩 넘겨가며 한참을 읽던 심협의 눈이 한곳에 머물렀다. 그러고는 품에서 칠성필을 꺼내 법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잎이 파란 빛과 같은 영초가 나타났다.

책에 나온 그림과 손에 든 영초를 비교하던 그는 점점 희색이 만연해졌다.

‘역시 천년 인삼이었구나.’

심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고, 인삼의 효과를 자세히 읽어보았다. 내용대로라면 인삼은 높은 수준의 단약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재료였다. 그러니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라 할만 했다.

잠시 후, 심협은 인삼을 챙긴 후 <선령백초>를 계속 읽어 나갔다.

응혼기에 진입한 후로 그는 신식의 힘만이 아니라 기억력도 월등해져, 이제 책을 한번 훑는 것만으로도 열 줄은 가볍게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심지어 그 내용도 모두 기억할 수 있게 됐다. 덕분에 고작 반 각 만에 그는 세 권의 두꺼운 선령백초를 다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이어서 다른 고서적을 주워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넋 놓고 책을 읽다 보니 어느덧 네댓 시진이 지나 하늘은 다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심협은 그제야 퍼뜩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덮으며 미간을 문질렀다.

그의 뒤로는 사람 키에 가까운 높이의 책 무더기가 일고여덟 개나 서 있었다. 모두 그가 반나절 동안 읽은 것들이었다. 이제 읽지 않은 책은 수십 권에 불과했다.

한데 이 대전 안의 책들 중 수선(修仙) 공법에 관한 것은 <청전배원공>을 비롯해 평범한 기초 공법을 다룬 몇 권이 전부였고, 지금의 그에게는 별 쓸모가 없는 것들이었다. 오히려 <선령백초> 같은 책이나 각 대륙 수행계와 세속의 지리지가 더 많았고, 그에게도 더 도움이 됐다. 개중에는 단약을 만드는 방법이 적힌 책이나 광물을 주조해 무기로 만드는 방법이 적인 책들도 있었다.

“공법에 대한 책이 아니더라도 부적술 책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하나도 없군.”

심협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아마 모든 내문, 외문 제자들에게 개방해 책을 볼 수 있도록 했을 거야. 그중 가장 많은 것은 기초 공법에 관한 책이었겠지. 그러니 종파에서 진정으로 전승해야 할 중요한 책을 비치해 두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이는 춘추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종파의 중요 공법은 사부와 제자 사이에 구전될 뿐 밖으로 전해지지 않았다. 순양검결이 그러했던 것처럼.

심협은 잠시 앉아서 쉬다가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뒤에 쌓아둔 책 무더기에서 기초 공법에 관한 책 몇 권과 <영약선초>, 단약과 무기 만드는 방법에 관한 책들과 아직 읽지 못한 것들을 칠성필에 챙겨 넣었다.

허리를 이리저리 틀어 굳어 있던 근육을 풀고, 다시 목을 돌리며 슬슬 벽에 뚫린 구멍으로 나가, 이곳을 떠나려던 그는 대전 한 모퉁이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은은하게 번득이는 하얀 빛이었다.

심협은 재빨리 그 빛으로 다가갔다. 그곳의 벽에는 폭 1척에 길이는 3척 정도 되는 네모난 비단에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이 그림이 달빛에 비치면서 몽롱한 하얀 빛을 반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에는 맑고 하얀 보름달이 그려져 있었고, 달 아래 한쪽에는 비스듬히 선 푸른 대나무들이 달빛을 받아 어렴풋한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그림은 한 폭의 ‘청죽망월도(靑竹望月圖)’였던 것이다.

“이 그림의 화공은 실로 대단하군! 어떤 염료를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리도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조금도 색이 바래지 않았다니! 푸른 대나무는 여전히 푸르름을 자랑하고, 보름달에는 하얀 빛깔에 노란 빛도 있어 따스한 기운이 담겨 있구나! 마치 실제처럼 생생한 그림이야!”

한데 그림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눈앞이 어그러지는 듯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대나무들과 보름달은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

달빛 아래, 미풍이 부는 듯했다.

솨아아!

대나무들이 하나하나 흔들렸고, 그 소리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땅바닥에 비치는 그림자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심협은 화들짝 놀라 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 기이한 현상은 사라졌고, 바람에 대나무가 흔들리던 소리도 사라졌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그는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심정으로 다시 한번 그림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시야가 어그러지는 듯하더니 아까의 그 광경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대나무 그림자는 계속 변해갔고, 달빛이 비친 그림자는 땅바닥에 명암이 교차하는 무늬를 그려냈다.

심협은 그림자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 돌연 눈썹을 치켜세우며 무언가 깨달은 듯 말했다.

“이것은 진짜 같지 않은…….”

그는 마치 정신이 이상해진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저었고, 그렇게 꼬박 한 시진이나 그림을 보았다.

“이 달빛의 변화는 마치 보법의 변화와 비슷하구나! 분명 무언가 속임수가 있을 게야. 단시간에 알아내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우선 가지고 가보자.”

심협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자 결국 탄식하고는 그림을 떼어내 칠성필에 챙겨 넣었다. 이것저것 넣다 보니 칠성필은 금세 차버려 이제 공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정리를 마친 심협은 벽의 구멍으로 나와 다시 광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곳곳에 대전들이 있었는데, 모두 다 훼손이 심했다.

길에는 다양한 해골들이, 점점 빽빽하게 널려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미 잡초에 묻힌 후였다.

‘보아하니 이 근처에서 큰 전투가 벌어진 것 같구나.’

심협은 속으로 그렇게 추측했다.

밤하늘 아래, 죽은 듯 고요한 가운데 심협의 발걸음 소리만 울려 퍼졌다.

하나하나 지나쳐간 무너진 대전들은 마치 흙을 높게 쌓아 만든 무덤 같았다.

밤바람이 한바탕 불어오니 나무 그림자들이 이리저리 끌렸다. 빽빽한 숲속 폐허에는 녹색 불빛들이 떠다녔다. 해골에서 무수히 많은 도깨비불이 나와 마치 반딧불처럼 떠다니는 것이었다.

심협은 도깨비불을 가로질러 숲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제법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한데 그 순간, 기이한 현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방에서 도깨비불들이 모여들더니 마치 병사들이 대열을 갖추듯이 백색 광장을 에워싸고 끊임없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심협은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그 광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광장에는 해골 몇 구와 낙엽들뿐, 그 어떤 법진이나 기관도 없었다.

광장 정중앙에는 원형의 높은 대가 있었다. 높이는 고작 3척 정도였는데, 그 위에 흐릿한 태극 도안이 있었다. 색이 다른 두 가지 벽돌로 만든 도안 같았는데, 그 외에 별다른 것은 없었다.

심협은 조심스레 신식을 내보내 광장 위를 훑었다. 그럼에도 아무런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후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도깨비불은 흩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땅바닥에 가볍게 떨어지더니 광장 전체를 에워쌌는데, 마치 검푸른 등불을 켜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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