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12화 (112/1,214)
  • 112화. 백초곡(百草谷)

    심협은 비좁은 동굴 입구로 뛰어내려 몸을 가눈 후, 몇 장 정도를 들어가 보았다. 안은 둘레가 10여 장에 이르는, 탁 트인 석실이었다.

    심협은 손을 들어 장심에서 파란 빛을 뿜어냈다. 그러자 석실 안에 갖춰진 간소한 물건들이 보였다. 석벽에는 선(禪)자가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로는 작은 탁자와 등나무로 짠 방석이 놓여 있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없었다.

    한데 특이하게도 탁자는 벽에 딱 붙어 있었고, 밖에 방석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 방석에 앉는다면 벽을 마주하고 앉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간소하다니, 이곳 주인은 오로지 좌선만 했단 말인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심협은 쪼그려 앉아 탁자를 몇 차례 두드려 보았다. 탁자는 보통의 박달나무로 만든 것으로, 수백 년이 지났음에도 썩지는 않았지만 법기 같은 값진 물건은 아닌 듯했다.

    방촌산 종파가 있던 곳인 만큼 기대가 컸고, 분명 보물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여겼으나 이리도 초라한 것을 보니 실망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방석은 또 얼마나 낡았는지, 가볍게 들춰본 것만으로도 찢어져버렸다.

    “엇, 이게 뭐지?”

    심협은 뭔가 발견한 듯 그렇게 외치고는 손바닥의 푸른빛으로 아래쪽을 비춰보았다.

    방석 아래에 하얀 점이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아, 바둑돌이로군!”

    그 근처에는 두 개의 검은 바둑돌도 놓여 있었다. 아마 이곳 주인이 바둑돌을 정리하다가 방석 아래에 떨어뜨린 것이리라.

    심협은 흰 돌을 조심스레 집어들었다.

    “정말 가볍구나!”

    본래 바둑돌이 그리 무겁지는 않지만, 이 바둑돌은 이상할 정도로 가벼웠다. 마치 손에 깃털을 들고 있는 것 같아, 심지어 보고 있지 않다면 손에 뭐가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심협은 의아해하며 검은 바둑돌도 집어 보았다.

    한데 이번에는 반대로 마치 땅바닥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더욱 기이한 이 현상에 심협은 손에 힘을 잔뜩 주어 들어보았다. 그러자 검은 돌은 마치 뿌리 뽑히듯 들렸다.

    “어이쿠, 백 근(斤)은 족히 나갈 것 같은데?”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시나 싶어 들어 보니 다른 검은 돌들도 그 정도 무게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혹시…… 이 바둑돌들이 법기일까?”

    심협은 손에 올려둔 바둑돌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는 잠시 망설인 끝에 법력을 운공하여 바둑돌들에 주입해보았다.

    법력이 주입되자 세 알의 바둑돌은 빛을 발했는데, 밝기는 각각 달랐다. 그러나 그뿐,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흠!”

    심협은 살짝 이를 악물고 법력을 두 배쯤 주입했다. 그러나 바둑돌들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실망한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바둑돌들을 내팽개치듯 던졌다.

    팍!

    한없이 가벼운 흰 돌은 벽에 부딪혀 그대로 튕겨 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반면 검은 돌들은 무거웠던 탓에 멀리 가지도 못하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심협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세 개의 바둑돌을 주워 구구통보결을 운공하여 제련을 시도해보았다. 하지면 이 또한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번에는 하얀 옥간에 했던 것처럼 신식을 펼쳐 바둑돌 안에 투입시켜 보았다. 실망스럽게도 여전히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법기가 아니라 그저 재질만 특수할 바둑돌인 것 같군.”

    심협은 실망감에 한숨을 폭 내쉬면서도 나중에 좀 더 살펴볼 생각으로 바둑돌들을 품속에 넣었다. 그러나 검은 돌들은 너무도 무거워 옷이 축 늘어졌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소매를 찢어 검은 돌을 양팔에 하나씩 묶었다.

    심협은 양팔을 휘둘러보기도 하고 팔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약간 무게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행동하는 데는 별 제약이 없었다.

    심협은 동굴 석실을 나와 물 밧줄을 잡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금 전 높은 낭떠러지에서 살펴보았을 때 왼편 전방에 백색 광장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맞아, 그 근처에 건축물도 많았어. 그쪽으로 가봐야겠군.”

    그렇게 마음먹은 심협은 숲을 가로질렀다. 숲을 지나는 동안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으나 살아 있는 생명체는 전혀 볼 수 없었다. 왠지 불안해진 그는 신식을 수시로 방출해 주변의 변화를 감지했다.

    반 시진이 조금 더 지나자 해가 서서히 지고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이 무렵, 심협은 푸른 대나무 숲에 이르러 있었다. 담담한 초목의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놀랍게도 그 향기를 맡자 정신이 번쩍 들었고, 그간 생사를 가르는 추격전으로 인한 피로감도 많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심협은 급히 향기를 따라갔다. 그러자 얼마 후, 대나무 숲을 완전히 지나게 됐다.

    대나무 숲을 나오자 저 멀리 무늬가 투각(*透刻, 묘사할 대상의 윤곽만을 남기거나 반대로 윤곽만을 구멍이 나도록 파는 조각 기법)된 하얀 담장이 보였다. 담장은 둥글게 에워싼 형세로 뻗어 있어 하나의 독립된 공간을 이룬 상태였고, 초목의 짙은 향기는 그곳에서부터 퍼져 나왔다.

    심협은 숲의 오솔길을 따라 담장 근처로 다가가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은 잡초가 무성히 자라 있는 황폐한 공간이었다.

    그는 다시 담장을 따라 백여 보를 더 간 끝에 뒷부분이 둥글게 된 문 앞에 이르렀다. 문은 높이가 1장 남짓이었고, 윗부분은 유리로 기와를 막고 있었는데 그 아래로는 칠이 벗겨진 편액이 걸려 있었다.

    “백초곡(百草谷)? 여기가 백초곡인가?”

    편액의 글자 중앙에는 둘레 1척 정도의 팔각동경(*八角銅鏡, 팔각형 동 거울)이 상감되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팔각동경의 세공은 매우 정교했다. 거울 중심에는 태극쌍어(太極雙魚)도안이 있었고, 주위를 복잡한 부적 문양이 에워싸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보통 물건이 아니었으나, 안타깝게도 거울에는 거미줄처럼 금이 잔뜩 가 있었고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또한 영력(靈力)의 파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 설령 법기였다 하더라도 이제 기능을 할 수 없을 터였다.

    문을 지나 백초곡 안으로 들어선 심협은 바로 큰 약초밭을 볼 수 있었다. 이미 잡초가 빽빽하게 자란 상태였지만, 밭두렁으로 밭을 가지런하게 나눈 흔적이 선명했다.

    “선가 종파의 약초밭에는 말로만 듣던 영약선초(靈藥仙草)가 있겠지?”

    기대에 찬 심협은 밭두렁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약초밭 초입에는 쑥갓이 잔뜩 나 있었고 잡초도 무성했다. 심협은 눈을 부릅뜨고 한참을 뒤져 보았지만, 영기가 있어 보이는 약재는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점점 밭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얼마동안 일고여덟 개의 밭을 다 뒤졌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하! 이럴 수가…….”

    심협은 실망감에 혀를 차고는 다시 약초밭 한쪽으로 들어가 잡초 한 무더기를 뽑아보았다. 한데 뿌리 아래의 흙을 보니 누르스름한 상태였다. 토질이 말라 굳어져 버렸으니 보통의 토지보다도 못한 셈이었다.

    “이러니 귀한 약초가 자랄 수가 없었겠지. 쯧쯧.”

    심협은 미간을 찌푸리며 잡초를 휙 집어던지고는 땅을 잠시 더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퍼뜩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눈이 번득였다. 누렇게 말라버린 흙 아래로 불에 탄 흔적이 나타난 것이다.

    “대체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심협은 몸을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에 탄 적이 있었다면 약초밭은 이미 그 근본이 망가진 셈이니 더 이상 영약(靈藥)이 자랄 수가 없다. 그러니 더 찾아봐야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심협은 다시 초목 향기가 퍼져 나오는 백초곡의 중심으로 향했다.

    일고여덟 개의 약초밭을 지나자 땅이 살짝 솟은 곳이 나왔다. 심협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곳을 살폈는데, 잡초 사이로 작은 담황색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그는 바로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숙여 잠시 그 꽃을 살펴보았는데, 표정이 기이했다. 이어서 그는 손을 뻗어 꽃잎을 살짝 만진 후 손을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아 보더니 씩 웃었다.

    “꽃 하나에 잎이 네 개, 잎에는 일곱 개의 맥이 있고, 꽃에는 네 개의 꽃잎이 있으며, 냄새를 맡아도 아무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만져보면 단향(檀香)이 난다. 책에서 본 사엽화(四葉花)로구나! 화를 피해 간 것이 있을 줄이야!”

    심협은 책을 많이 읽기는 했어도 약초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했는데, 공교롭게도 그중 하나인 사엽화를 발견한 것이다. 복용하면 기혈이 튼튼해지고 원기를 키울 수 있으니, 금향옥을 만들 때 꼭 필요한 약재였다.

    그러나 맥의 깊이와 색상으로 미루어볼 때, 이 꽃은 생장 시간이 그리 길어 보이지 않았다. 이제 30년 정도 됐을까? 그러니 약효에도 한계가 있을 터. 금향옥에 쓰기에는 부족했다.

    “약성이 그리 강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진관보와 아이들에게 탕약으로 달여 먹이면 기혈이 튼튼해지고 체력이 강해지겠지. 어쩌면 아이들이 앞으로 수선자가 되도록 도와줄 수도…….”

    심협은 그런 생각에 조심스럽게 사엽화의 뿌리를 캤다.

    완전히 캐내자 사엽화 표면의 광택은 곧장 어두워졌다. 하지만 시들어버린 것은 아니었고, 표면에 밀랍 같인 막이 형성되어 스스로를 봉했다.

    이를 본 심협은 기뻐하며, 사엽화를 품에 챙겨 넣었다.

    다시 기대감이 생긴 그는 초목 향기가 나는 곳으로 가는 동안에도 혹시나 사엽화가 더 있지는 않을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사엽화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대신 길이 1척 정도 되는 마를 세 개 찾아냈다.

    심협은 마 하나를 반으로 쪼개었다. 단면에는 가느다란 실들이 있었는데, 옅은 금빛의 광택이 번득였다. 진액에서는 맑은 향기가 느껴졌다.

    “이것도 영약이란 말인가?”

    심협은 마에 영기(靈氣)가 감도는 것을 느끼며 의아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어서 그는 수증기를 모아 방금 쪼갠 마를 깨끗이 씻더니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의 입안은 맑고 달콤한 즙으로 가득 찼고, 청량한 기운이 목구멍을 넘어 뱃속으로 들어가더니 난류(暖流)가 되어 단전으로 들어갔다.

    “법력을 보충하는 효과도 있다니!”

    심협은 기뻐해 마지않으며, 금세 마 하나를 깨끗이 먹어치웠다. 그리고 남은 두 개의 마를 들고 당장 먹어치울 것인지 고민하다가 결국 꾹 참고 소매에 챙겨 넣었다. 그러고는 계속 밭을 뒤졌으나 이후로는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날은 금세 저물었다. 심협은 멀리서 백초곡 중앙을 바라보았는데, 붉은 빛 한 줄기가 꼿꼿하게 서 있었고, 그 주위로는 자질구레한 파란 빛이 흩어져 있었다.

    기이한 현상에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가 보니 그 구역 중앙에는 팔뚝 굵기에 길이는 3척 남짓한 기이한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심협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기이한 나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나무는 전체적으로 붉었고, 구불구불한 무늬가 나 있었다. 꼭대기에는 서너 개의 가지가 있었는데, 잎은 하나도 없었다. 나무와의 거리가 8장 정도 되는데도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심협은 좀 더 다가갔으나, 이내 열기가 뭉쳐져 담장처럼 앞을 막고 있었다.

    “기이한 일이군.”

    부쩍 호기심이 생긴 그는 양손을 결인하여 사방의 수증기로 푸른 물결을 만들어내 열기의 담장을 에워싸게 했다.

    치이익!

    물이 열기의 담장에 닿자마자 달궈진 쇠에 물을 뿌린 듯한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피어올랐고, 주위의 온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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