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의외의 발견
심협은 몸에 묻은 흙먼지들을 털어내며 마당으로 나온 후 무너진 건물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마당에 있던 끊어진 용마루 위에 앉아 손을 펼쳐보았다.
그의 손에는 길이가 3촌, 폭이 1촌 정도 되는, 하얗고 긴 옥간(玉簡)이 놓여 있었다. 옥간은 비단처럼 매끄러웠으나 아무런 장식도 없어 그리 귀한 물건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심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그 커다란 종에 박아 넣은 것이라면 결코 평범한 물건은 아닐 터였다.
‘혹시…… 법기인가?’
그렇게 생각한 심협은 단전에서 법력을 운공하여 손의 경맥을 따라 옥간에 법력을 주입시켜 보았다.
법력이 주입된 순간, 옥간 내부에서 반딧불 같은 것이 한번 번득이더니 점점 투명해졌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 보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법력의 파동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 법기를 조종할 때 나오는 반응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나 심협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곧장 가부좌를 틀고는 옥간을 손바닥에 딱 붙여두고 구구통보결을 운공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제법 오랫동안 구구통보결을 운공했으나 옥간에는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진짜 그냥 평범한 옥간인가?”
심협은 다소 실망스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허나 그 순간, 그는 무언가가 퍼뜩 떠올라 머리를 가볍게 치며 웃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신식을 밖으로 내보낼 수 있으니 신식의 힘으로 낱낱이 파헤쳐 보면 될 것 아닌가?”
말을 마치자마자 심협은 옥간을 미간에 갖다 댄 후, 눈을 살짝 감고 신식을 주입시켰다. 곧이어, 눈앞에 하얀 빛이 이는 것이 느껴지더니, 그의 신식이 하얀 공간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신식으로 안을 둘러보았다. 그 텅 빈 공간에는 허공에 금색 문자들만 떠 있었는데, 그 수가 수만 개나 됐다.
“이것은 설마…… 신선의 공법인가?”
심협은 크게 기뻐가며 급히 문자를 살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착각했음을 알게 됐다. 옥간에 쓰인 문자들은 멀리 유람한 것을 기록한 유람기였던 것이다.
‘용수(龍樹) 3년 5월 초엿새. 단오가 막 지나고, 나는 친한 벗과 함께 동승신주의 담계산(潭稽山)에 놀러 갔다. 산에 오르는 도중, 산 위 혼원담(混元潭) 부근에 청령선로(淸靈仙露)가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일곱 빛깔의 운매선록(雲魅仙鹿)이 온몸에서 무지갯빛을 내뿜고 있었다. 한데 보아하니 요기(妖氣)가 사라지면서 영기(靈氣)로 전환되어 있었다. 청령선로를 먹고 그 영험한 효과를 본 것임이 틀림없었다.
내 본디 운매선록을 잡아 수련 재료로도 쓰고 탈 것으로도 쓰려 했으나, 그것이 청령선로를 먹고 수련이 크게 증진된 터라 벗과 힘을 합쳤음에도 얻지 못하였으니 안타깝도다.’
‘보리(寶利) 16년 봄. 나는 동토(東土)의 대당으로 향했다. 북구로주(北俱盧洲)의 서부 뇌주(雷州)를 지날 무려, 나는 주성 길가에서 남루한 중년 남자가 칼을 파는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칼에는 번개의 힘이 들어 있어 수십 장 밖에서도 웅장한 울림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속의 사람들은 이를 알아챌 수 없으니, 그 칼이 보물임을 알 수 없었다.
그 사람에게서 천금을 주고 칼을 사고서야 나는 그 대장장이의 조상이 이 칼을 만들었으나 벼락에 맞아 죽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 칼을 불길하게 여겨 그동안 묵혀두었었다고 했다. 세속의 범부(凡夫)라도 하늘과 서로 합이 맞으면 법보(法寶)를 만들어낼 수도 있으니, 어찌 기이하지 않겠는가? 내 인연이 닿아 이 칼을 얻었으니 이 또한 행운이 아닌가?’
이 기록을 남긴 사람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이 방촌산의 내문제자라는 것은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심협은 처음에 실망했으나 기록을 몇 편 읽고 나니 점점 빠져들었다. 그는 본래 이러한 신선과 관련된 기이한 소설이나 유람 잡기들을 좋아했는데, 옥간에 담긴 내용이 다채롭고 기이했으니 어찌 재미있지 않겠는가!
기록 중에는 대당에서 벌어진 이야기도 있었다. 옥간의 주인이 직접 겪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기록으로 남긴 것은 분명했다.
대당의 달주(達州) 경내 당추현성(唐秋縣城)에 원외 어르신 한 명 있었는데, 그 집 입구의 디딤돌에 천년 묵은 영험한 힘이 있어 대당 관부에서 거액을 들여 샀다고 한다. 이를 가지고 흠천감(*欽天監, 천체 현상에 관한 일을 맡았던 부처)의 단약 제조술사가 백골도 부활시킬 수 있는 영험한 단약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였다.
허나 옥간의 주인은 이 일을 믿지 않는 듯 문장 끝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방촌산으로 돌아가 사부님이나 문파의 어르신께 가르침을 청해야만 이 일의 진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옥간의 주인은 문장을 기록할 때 연호를 뒤죽박죽으로 써뒀는데, 거의 4대 부주(*불교 세계관의 대륙)의 연호가 다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 이야기들의 배경이 되는 나라의 연호로 기록한 듯했는데, 최대 백 년 정도에 걸친 것이었다.
이런 기이하고 흥미로운 일들 외에 옥간의 주인이 유람 도중 요괴를 만난 기록들도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 대부분은 옥간의 주인이 처단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 옥간 주인의 수련 수준은 언급되어 있지 않았지만, 이 내용들로 미루어 매우 높았을 것은 분명했다. 최소 대승기(大乘期)에 이른 수사였으리라.
이야기 곳곳에서 자신의 종파인 방촌산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이 느껴졌다. 종파의 선조 ‘보제조사(菩提祖師)’에 대해 언급할 때면 경탄과 찬양, 숭배의 표현이 가득했다.
허나 그 기록대로라면 심협 또한 보제조사에게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에둘러 표현하긴 했지만, 보제조사가 삼청사제(三淸四帝)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진정 최고 경지에 이른 신선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삼청사제가 누구인가! 도가 전설 속의 천계(天界)를 다스리는 지존이 아닌가!
“허허! 그저 자신의 유람기였으니 망정이지, 이게 밖으로 새어나가 다른 사람들이 읽었다면 아마 수천수만 명이 당신을 비웃었을 거요.”
심협은 재미있게 읽긴 했어도 그 내용들을 믿지 않았기에 코웃음을 쳤다.
한데 계속해서 유람기를 읽던 그의 눈이 돌연 번득였다. 그 글의 끄트머리에 뭔가 다른 것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 부적에 관한 내용도 있구나!”
허공에 떠 있는 다섯 줄기의 금색 빛이 모여 만들어진 빛 부적들로 모서리가 번득였다. 그 형태는 복잡했고, 하나하나 기상(氣像)이 남달랐다.
심협은 크게 기뻐하며 부적들을 살폈다.
한눈에 보기에도 부적들은 그 형태가 자못 복잡했다. 풍(風)으로 시작하는 부적만 그나마 조금 눈에 익을 뿐, 나머지 부적은 모두 낯선 것들이었다.
한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부적마다 아래에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달린 주석에 부적의 명칭과 용도, 사용법이 적혀 있었다.
심협의 눈에 익었던 부적은 ‘비행부(飛行符)’였다. 대분류(大分流)로는 보조 부적이었고, 소분류(小分流)로는 풍(風) 속성 부적이었다.
부적의 용도를 살필수록 마음이 동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부적은 사람을 잠시 동안 종이처럼 가벼워지게 만들고, 바람을 따라 일어나 허공에서 멀리 이동할 수 있다고 한다. 지금의 그에겐 이보다 더 좋은 부적이 없을 것이다!
“어쩐지 눈에 익더라니, 백 형이 가지고 있던 비둔부와 비슷한 부적이로군. 그런데 비둔부와 비행부 중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인지 모르겠구나. 2년 전에 이 부적이 있었다면 광표를 만나서도 그리 낭패하지는 않았을 텐데…….”
심협은 중얼거리면서도 정신을 집중해 비행부를 자세히 살펴 자신의 식해(識海)에 잘 새겨 넣었다.
이어서 시선을 왼쪽 첫 번째 부적으로 돌렸다. 여타 부적과 마찬가지로 ‘칙령(勅令)’이라는 두 글자로 시작하는 부적이었다. 부적의 문양을 보니 획이 시원스레 뻗어나가지 않고 꺾이는 부분이 많았다. 전체적으로는 마치 사람 몸 윤곽처럼 보였고, 꺾이는 부분들은 마치 사람의 경혈 같아 보이는, 자못 특이한 문양이었다.
“정신부(定身符), 부적의 법력으로 사람의 경락, 경혈을 막아 그 몸을 제어함으로써 잠시 동안 행동을 방해한다. 이것 참 재미있는 부적이구나.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겠어. 하하하!”
심협은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부 바로 옆에는 ‘쇄갑부(碎甲符)’라는 공격형 부적이 있었다. ‘파군(破軍)’이라는 두 글자로 시작하였는데, 전체적인 모습은 마치 예리한 날을 가진 긴 창 같았고, 부적 전체에서 살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그 오른쪽이 비행부였고, 그다음은 전체가 번득이는 금빛 번개의 선으로 이루어진 부적이었다. 같은 뇌(雷, 번개) 속성인 소뢰부와 비슷해 보였다. 허나 뢰(雷)자가 아닌 칙령(勅令)으로 시작되는 부적이었고, 중간에 다섯 줄기의 번개 문양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봉할 봉(封)자로 끝맺었다. 뭔가 특별해 보이는 부적이었다.
마지막 부적은 더욱 기이했다. 잠시 동안 기억을 잃게 하는 ‘실억부(失憶符)’라는 부적이었다. 틀림없이 신식에 손상을 끼치는 것이리라.
다만 이 부적은 사용하는 데 제약이 많았다. 우선 자신보다 수련이 낮은 사람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부적이었다. 또한 상대의 신식이 강하면 부적의 효과를 볼 수 없다고 한다.
옥간의 기록에 따르면 이 다섯 개의 부적은 모두 방촌산에만 있는 비전 부적으로, 사용법과 필요한 재료가 각각 다르며, 외부인에게 함부로 전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심협에겐 지금 특수한 재료는커녕 보통 부적에 쓸 황지나 주사도 없었으니 이 부적들을 시험해볼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그저 기억해두는 것이 전부였다.
그가 이 공간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한 시진 이상이 흘렀다. 조금 피로했던 심협은 미간을 문지르며 옥간을 챙겨 넣었다.
“보아하니 방촌산은 장수촌 사람들 말처럼 진정한 신선들의 수선(修仙) 종파인가 보구나. 내가 여기 온 것도 기연이라 할 수 있을 터.”
심협은 잠시 쉬었다가 혹시 건질 것이 있는지 다시 찾아보러 나섰다.
하지만 두 시진이나 숲을 뒤지고 다녔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심하게 망가져버린 폐허들뿐이라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다시 숲을 나와 보니 눈앞에는 막다른 길뿐이었고, 또 다른 산 벽이 있었다.
이 산 벽은 조금 전의 높은 산 벽과 달리 높이가 백여 장에 불과했다. 그 위로는 계곡물이 굽이치며 흘렀는데, 거칠지 않은 물살이 산 벽을 따라 퍼졌다.
한데 계곡물이 흐르는 곳에 옛 전서체로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필력에 힘이 있어 기세가 대단해 보였다.
“신수개천(神秀開天)…….”
심협은 고개를 들어 그 글자를 보다가 돌연 눈썹을 치켜세웠다. 다소 놀란 듯한 눈빛이었다. 이어서 그가 한 손을 들자 산 벽을 따라 흐르던 계곡물이 모여들어 밧줄을 이루었다. 그는 물 밧줄을 잡고 산 벽을 올라 금세 글자가 새겨진 곳에 이르렀다.
‘역시! 안에 숨겨진 공간이 있었어!’
심협은 속으로 외쳤다.
‘신수개천’이라 새겨진 곳 정중앙에 미세하게 튀어나온 바위가 있어 계곡물을 양쪽으로 갈랐다. 그리고 바위 아래로 눈에 잘 띄지 않는 동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