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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110화 (110/1,214)
  • 110화. 유적

    심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갑자기 석문 쪽을 향해 일장(一掌)을 휘둘렀다. 그러자 공기 중의 수증기가 모여들어 주먹만 한 물의 구(球)를 이루어 날아갔다.

    퍼펑!

    가벼운 충돌음이 울리더니 석문 안의 금제가 다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심협의 옆에 있던 비석에도 미미한 빛이 희미하게 일었다. 계속 비석을 주시한 만큼, 이번에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 모호한 빛은 그가 이전에 본 적이 없던 부적 문양이었다.

    “이 부적 문양을 깬다면 저 금제도 없어지겠지?”

    그는 부적 문양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곳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심협은 금제를 깨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애초에 <무명천서>도 어쩌다 운이 좋아 찾아낸 것이었으니, 이번에도 운이 따라줄지 시험해볼 생각이었다.

    그가 묵묵히 법력을 운공하자 장심(*掌心, 손바닥 가운데)에 파란 빛이 나타났다. 그 상태로 부적 문양이 사라진 곳을 쳤다.

    쿠르르릉!

    비석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모호한 빛이 다시 일면서 부적 문양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에도 부적 문양은 깨지지 않았다. 오히려 무형의 흡입력이 솟아나 심협의 손바닥을 빨아들였다.

    “흡!”

    부적 문양이 다시 한번 빛으로 번득였고, 심협의 손은 들러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이어서 그의 법력이 물밀듯이 비석을 향해 빠져나갔다.

    파란 빛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가면서, 비석의 부적 문양은 점점 더 밝아졌다. 비석에 나있는 금에서도 파란 빛이 스며나기 시작했다.

    심협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체내의 법력은 이미 절반이 흘러나간 상태였다. 죽기 살기로 막아보려고도 했고, 심지어 공법을 역(逆)으로 운공해보기도 했으나 어떤 것도 소용이 없었다.

    “크으윽!”

    순식간에 법력이 완전히 빠져나가 체내가 텅 빈 듯했다.

    한데 그때, 비석에 갑자기 변화가 나타났다. ‘사월삼성동(斜月三星洞)’ 다섯 글자가 점점 밝아지더니, 결국 눈처럼 밝은 하얀 빛이 되었다. 그 빛은 비석에서부터 몇 척이나 뻗어 나와 심협을 빨아들였다.

    심협은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고 신식의 긴장이 풀어지더니, 곧 의식을 잃었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심협이 서서히 눈을 떴다. 정신이 들자마자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는데, 온몸에 힘이 없었고 시야도 흐릿했다.

    그는 억지로 몸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양손을 원 모양으로 결인한 후, 묵묵히 무명공법을 운공했다. 그런데 운공을 시작하자마자 몸이 미미하게 떨려와 운공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된 일이지?’

    심협은 다시 눈을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전 운공하려고 법력을 모았을 때, 사방에서 농후한 천지(天地) 영기가 몰려오는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심지어 물속에서 운공할 때보다도 훨씬 농후한 영기였다.

    심협은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고서야, 자신이 낭떠러지 위에 있다는 것과 주위 풍경이 완전히 바뀐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새로운 세상에 온 것만 같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벼랑가로 다가갔다. 멀리까지 시야가 탁 트여 있었는데, 시선이 닿는 곳마다 정교하게 지어진 누각과 정자들이 푸른 나무들과 어우러져 있었다. 산길 회랑(*回廊, 지붕이 있는 긴 복도)들은 그 건물들에 연결되어 있었고, 수많은 폭포에서는 은구슬 같은 물방울이 흩날렸다.

    “그야말로 선경(仙境)이로구나! 여기가 설마 방촌산 신선들이 사는 곳인가?”

    심협은 흥분과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의 안색은 심각하게 변했다.

    “뭔가 이상하다. 너무 조용한데……?”

    이토록 큰 신선들의 마을에 푸르른 식물들만 가득할 뿐, 사람은커녕 짐승 한 마리 보이지않았다. 사방이 죽은 듯이 고요해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심협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다시 가부좌를 튼 채 양손을 원 모양으로 만든 후 눈을 감고 운공을 시작했다.

    이곳의 천지 영기는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농후했다. 신선들이 사는 곳은 확실히 산과 물도 영험한 듯했다.

    그렇게 반각(*半刻, 시간의 단위. 일각은 약 15분)가량 운공한 후에야 그는 다시 일어났다. 짙은 영기 덕에 좀 전에 잃었던 법력을 모두 회복했을 뿐 아니라, 체내의 부상도 모두 치료할 수 있었다.

    낭떠러지 위에서 주변을 살펴보니, 산을 따라 이어진 갈지(之) 자 돌계단이 보였다. 그는 얼른 그 계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반쯤 내려가다 보니 한쪽에 정자가 서 있었다. 정자 안에는 백옥으로 된 탁자가 있었고, 그 위에는 백자(白瓷)로 된 술 주전자와 술잔이 놓여 있었다.

    목이 가느다란 술 주전자를 중간에 두고, 작은 술잔 두 개가 양쪽에 각각 하나씩 놓여 있는 모양이 방금 전까지 두 사람이 대작(對酌)을 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탁자 위에는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상태였다. 심지어 백자로 된 술 주전자에도 두꺼운 먼지가 쌓여 있는 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위에 놓여 있었는지 짐작도 하기 힘들 정도였다.

    심협은 술 주전자를 들고 살짝 흔들어보았다. 속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주전자를 내려놓고 정자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래쪽 산 벽에 가지런히 놓인 유리 기와로 된 처마들이 보였는데, 이미 여러 곳이 훼손되고 무너져 있었다.

    심협은 온통 의문투성이인 정자를 나와 다시 계단을 내려갔는데, 금방 유리 기와 처마로 덮인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그곳이 산을 따라 지어진 잔도(棧道)일 거라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처마 아래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산 벽에 구멍을 뚫어 만든 석실들이 있었다.

    그가 첫 번째 석실 앞에 이르러 보니 문 좌측 석벽에 ‘제자사(弟子舍)’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제자들의 숙소였구나!’

    심협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문득 자신이 춘추관에서 머물던 정실을 떠올렸다. 이곳이 춘추관의 정실보다 더 나을 것은 없어 보였다.

    첫 번째 석실의 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완전히 열어보니 습한 냄새가 느껴졌다. 사방은 어두워 안은 잘 보이지 않았다. 법력을 운공해 장심에 짙푸른 빛을 일으킨 후에야 안을 살펴볼 수 있었다.

    석실은 그리 넓지 않았고, 좌우로는 작은방들도 딸려 있었는데, 안에 갖춰진 물건들은 모두 간소했다.

    정중앙의 방에는 탁자와 의자뿐이었는데, 그 위에는 먼지가 잔뜩 쌓인 다기가 놓여 있었다. 좌측 작은방은 침실로, 돌로 된 침상 하나뿐이었고, 그 위에 놓인 이불은 완전히 부식된 상태였다.

    우측 작은방에는 너덜너덜한 방석이 있었고, 벽 근처의 큰 탁자 위에는 향로와 책들이 먼지에 뒤덮인 채로 놓여 있었다.

    심협이 책 위의 먼지를 살짝 털어내자, 책 표지에 ‘항요보(降妖譜)’라고 쓰여 있는 것이 보였다. 허나 어찌나 낡았는지, 펼쳐 보려 하자 부스러져 버렸다.

    “이런…….”

    심협은 이 석실을 나와서 복도를 따라가며 모든 석실을 다 뒤져보았지만, 다른 곳들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기는 방촌산의 외문제자들이 기거하던 곳인 모양이군.”

    그는 제자사를 나와 산 벽 아래 우거진 수풀로 들어갔다.

    산길은 구불구불하고 쉽게 눈에 띄지도 않았다. 잡초 사이로 가려진 작은 돌길 하나만이 길게 뻗어 있었다.

    작은 길을 따라 안으로 걷다 보니 독립된 가옥들도 있었는데, 대부분은 이미 훼손됐고 무너졌으며 불이 났었는지 검게 탄 흔적까지 있는 폐허들뿐이었다.

    십여 개의 가옥들을 지나자 길은 오른쪽으로 뻗었다. 그리고 갈림길 근처에서는 잘 보존된 가옥도 하나 있었다.

    그러나 잘 보존되었다는 것도 방금 지나친 폐허들과 비교해 그렇다는 것이지, 이곳 또한 대문은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심지어 굳건히 버티고 선 2층짜리 가옥마저 지붕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가 대문을 들어서니, 마당 바닥 곳곳에는 울퉁불퉁한 구멍들이 보였다. 그 안에는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모를 대들보 기둥이나, 처마 일부 같은 건축물 잔재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멀리서 봤을 때는 무릉도원 같더니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니 황폐하고 처량하기 이를 데 없구나. 오래전에 큰 전투가 있었던 모양이지? 한데 어째 시신은 한 구도 보이지 않는 것인가? 어쨌든 운이 좋다면 선인들이 남긴 물건 하나쯤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심협은 의문이 가득한 상태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는 끊어진 용마루(*지붕 가운데 부분, 가장 높은 수평 마루)를 뛰어넘어 가옥으로 다가가 문을 밀어젖혔다.

    끼이익!

    오랫동안 여닫지 않은 탓에 문은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안으로 열렸고, 한바탕 먼지가 일었다.

    심협은 입과 코를 막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평범한 집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가운데에는 협소한 안채가 있었는데, 벽에 걸린 산수화는 이미 삭아버린 상태였다.

    안채 양측으로는 객실들이 있었는데, 그 안에 침상과 탁자, 의자가 보였다. 물론 삭아버린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바닥의 벽돌 사이사이로 잡초가 잔뜩 자라 있어 무척 황폐해 보였다. 이곳에 어떤 단서가 있지 않을까 싶어 와봤으나,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심협은 안채 뒤쪽으로 돌아가서 오래된 나무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방 하나뿐이었는데,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사람 키만 한 구리종이 박혀 있었다. 그 모양으로 미루어 지붕의 거대한 구멍은 이 종 때문에 인해 생긴 듯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종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사방에는 둥근 꽃무늬 장식이 있어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심협은 종에 새겨진 문자들을 읽어보았다.

    ‘하늘이 만물을 덮고 땅이 만물을 싣고 있으니, 오직 인(仁)과 덕(德)으로 천하 백성들이 은혜를 입도록 할 것입니다. 해와 달이 서로 번갈아 가며 뜨니, 드높은 공로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천하에 베푸시네. ..(중략).. 천지를 위해 재앙이 물러가기를 기도합니다.’

    전체를 읽어보고야 심협은 종에 새겨진 것이 도가의 기도문임을 알 수 있었다. 글자는 많지 않았으나 그 뜻은 지극히 큰 것이었다. ‘천지를 위해 재앙이 물러가기를 기도한다’는 문장만 보더라도, 기도문에 담긴 기백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종의 반대편에는 제법 큰 손자국이 파여 있었는데, 지문과 손금이 뚜렷했다. 인간의 손바닥임이 분명했다.

    “엇? 이건 뭐지?”

    종을 더 살펴보던 심협은 뭔가를 발견한 듯, 손자국에 바짝 다가가 자세히 보니 손자국의 중지와 식지(食指, 둘째 손가락) 사이에 이물질이 있었는데, 고동색인 종과는 달리 하얀 색이었다.

    “종을 뚫고 박혀 있는 것 같군.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거야.”

    그 이물질은 손으로 만져보니 차가웠다. 옥돌로 만든 것 같았다.

    심협은 두 손가락으로 그 끝을 잡고 힘주어 빼보려 했지만, 돌출된 부분이 너무 작다 보니 제대로 쥘 수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체내의 양기를 운공하여 청양수로 종의 손자국을 내리쳤다. 그 반동으로 튀어나오게 하려던 것이다.

    하지만 그저 종만 묵직하게 울렸을 뿐, 이물질은 튀어나오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이 들어가 버렸다. 이제 아예 튀어나온 부분이 없을 정도였다.

    “이런 제기랄! 다시 해보자!”

    심협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다시 한 번 일장을 가하였다.

    댕-!

    이번에는 더욱 힘을 가해 내리치자 종소리가 울렸고, 방금 안으로 더 들어갔던 하얀 이물질에 순식간에 튀어나왔다.

    심협은 재빨리 그것을 손으로 잡았다.

    한데 그때, 줄곧 땅에 박혀 있던 종이 갑자기 가라앉더니 바닥에 커다란 구멍을 뚫고 떨어졌다.

    “헛!”

    심협도 1층 안채로 떨어지면서 건물은 순식간에 연기와 먼지로 가득 찼다. 그는 온몸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일어나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그가 건물 밖으로 한 걸음 내딛자마자 건물이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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