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09화 (109/1,214)
  • 109화. 삼성동(三星洞)에 들어가다

    낭보의 집게발에 꽉 붙들려 심협을 쫓아갈 수 없게 된 서천호는 분노가 극에 달했다.

    “크르릉!”

    서천호가 다시 한번 입을 크게 벌리자, 목구멍에서 전류들이 얽혀 파란 광구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그가 막 광구를 내뱉으려던 때였다. 낭보의 온몸에서 빛이 폭발했고, 동시에 집게발이 불어나더니 더욱 힘껏 서천호의 꼬리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서천호가 잠시 균형을 잃었고, 조준에 실패한 광구는 방향이 틀어졌다.

    콰쾅!

    광구가 심협을 맞추지 못하고 옆에 떨어지면서 거대한 굉음과 함께 폭발적인 기운이 솟아났다.

    심협은 그 폭발에 휩쓸려 숲 밖으로 튕겨나가 떨어졌다. 견디기 힘든 통증에 이어 입가로는 피가 흘렀다. 그래도 그는 몸부림치며 일어나 다시 산 정상 방향으로 도망쳤다.

    뒤에서는 잠시 싸우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서천호의 노한 포효만이 남았다.

    심협은 낭보의 상황을 살필 겨를도 없이 수백 장을 내달렸다.

    그런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눈앞에서 길이 끊기더니 높이가 100여 장에 이르는 벼랑이 나타난 것이다.

    ‘잠깐! 영락 소저가 해준 이야기가 있었지!’

    방촌산은 산허리 아래에는 갈림길이 많지만 산허리까지 이르면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하나뿐이라고 했다.

    심협은 망설이지 않고 손발을 모두 사용해 석벽에 튀어나온 돌과 갈라진 틈들을 붙잡으며 벼랑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가까스로 끝까지 올라 보니 벼랑가의 평지 한쪽에는 일고여덟 장 높이의 자두나무가 자라 있었다. 나무는 바짝 말라 시커멓게 된 상태였고, 잎도 거의 떨어져 있었다. 생기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나무였다.

    심협은 나무를 슥 훑어보고는 그 옆을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그때, 심협의 눈에 자두나무 아래로 높이 3척의 네모난 석대(石臺)가 들어왔다. 그 위로는 가로 세로 각각 19개의 줄이 새겨져 있었고, 검고 하얀 바둑돌들이 놓여 있었다. 분명 바둑을 두고 있던 판국이었다.

    심협은 또다시 영락에게서 들었던 나무꾼 이야기가 떠올라 바둑판을 살폈다.

    “…….”

    그러나 그에게는 나무꾼이 겪은 것과 같은, 흑백 갑옷의 병사들이 교전하는 듯한 광경은 펼쳐지지 않았다.

    심협은 바둑에 흥미가 없긴 했으나 두는 법은 알았다. <사자보(四字譜)>와 <현현집(玄玄集)> 같은 기보(*棋譜, 바둑 두는 법을 적은 책)를 본 적도 있었다. 다만 그 이해도는 그리 깊지 않았다.

    심협은 이 기국(棋局)에서 검은 돌이 우세를 점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미 검은 돌이 막고 있어 흰 돌이 둘 수 있는 수는 하나뿐이었다.

    심협이 시선을 조금 옆으로 옮겨보니 바둑판 우측에 작은 글씨가 두 줄 새겨져 있었다. 그는 소리 내어 문구를 읽어보았다.

    “첩첩이 산과 물이 있어 길이 없는 줄 알았건만, 버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꽃이 만개한 또 하나의 마을이 있구나(山重水複疑無路,柳暗花明又一村). 무슨 뜻…… 잠깐! 설마…… 이 기국에 현묘한 이치가 있단 말인가?”

    심협은 마음이 동해 다시 기국을 몇 번이나 살폈다.

    이번에 다시 보니 그는 흰 돌에 남은 마지막 기회는 허수임을 알게 되었다. 흰 돌이 마지막 남은 수를 놓게 되면 채 10수도 지나지 않아 검은 돌에 포위될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그렇게 되면 마지막 기회조차도 없을 것이다.

    “만일 여기에 두게 되면…… 자충수가 되는 것인가? 그러나 죽고자 하면 사는 법이니 오히려 새로운 국면을 열게 될 수도…… 그래, 바로 여기구나!”

    심협은 바둑판 오른편 아래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 기쁜 빛이 스치며 바둑알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아예 처음부터 바둑알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바둑판 위는 텅 비어 있었다.

    “엇! 내가 괜한 생각을 했나 보구나.”

    심협은 그렇게 자기 머리를 툭 치고는 일어나 그곳을 떠나려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커허헝!”

    숲속에서 호랑이 울음소리와 함께 거대한 몸집이 바위 뒤에서 튀어나와 벼랑 위에 섰다. 이어서 심협을 빤히 바라보며 서천호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어찌 도망칠 것이냐?”

    심협은 후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바둑판 앞에서 시간을 끌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의 눈에 깎아지른 듯한 벼랑가에 종횡으로 새겨져 있는 선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위로 속이 빈 동그라미와 속을 칠한 동그라미가 여러 개 그려져 있었다. 각각 흰 돌과 검은 돌 삼아 그려둔 것으로, 방금 전까지 심협이 보았던 바둑기국과 같은 도안이었다. 그리고 바둑판 위에는 옛 전서체로 ‘인생은 기국과 같다(生如棋局)’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아아…….”

    그 네 글자가 눈에 들어오자, 심협은 돌연 무언가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인생은 기국과 같고 사람의 몸은 바둑돌과 같으니, 둘 바둑돌이 없다면 자신의 몸을 바둑돌 삼으면 될 것이다.’

    그때, 심협이 벼랑가에 멍하니 서 있는 모습에 의구심이 들면서도 서천호는 벼락처럼 덮쳐왔다.

    그 순간, 심협은 마음을 굳게 먹고는 몸을 솟구쳤다. 그리고 벼랑가에 새겨진 바둑판 우측 아래, 종횡으로 선이 교차하는 곳으로 맹렬히 부딪쳐갔다.

    펑!

    묵직한 소리가 울렸고, 심협은 어깨가 부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벼랑의 벽은 그저 벽일 뿐, 무슨 출구가 있겠는가? 하하!’

    심협이 스스로를 비웃기 시작한 그때, 벼랑의 벽에 새겨진 바둑판이 환하게 빛나더니 그 위의 검은 돌과 흰 돌이 모두 별처럼 점멸했다. 이어서, 바둑판 위에 바둑돌 그림자들이 떠오르더니, 검고 하얀 흔적을 그려내며 마치 유성처럼 심협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놀라운 광경에 서천호는 급히 공격을 멈췄다. 번쩍이던 빛의 흔적들은 서로 교차하더니 몽롱한 하얀 빛이 되어 심협을 에워쌌다.

    심협은 방금 전까지 차갑고 딱딱했던 바위가 갑자기 따뜻하고 부드럽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석벽으로 쓰러졌다.

    이에 다급해진 서천호는 맹렬히 달려들어 앞발로 심협의 다리를 잡으려 했다. 한데 심협이 쓰러지면서 두 다리가 절로 위로 솟구쳤고, 서천호의 공격은 아슬아슬하게 그 위를 지나갔다.

    그렇게 심협은 석벽 안으로 물이 스미듯 모습을 감추었고, 따뜻하게 번쩍이던 빛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석벽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서천호는 한동안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하며 말없이 석벽을 바라보았다.

    “커헝!”

    이어서 그는 분노의 포효를 내지르며 석벽을 연신 두들겼다.

    쾅! 쾅!

    그 충격에 산이 뒤흔들렸다. 그러나 이미 눈앞에서 사라진 심협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서천호는 석벽에 대고 한바탕 분풀이를 한 후에야 서서히 살기를 거두며 이성을 되찾았고, 한참이나 벼랑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자리를 떠났다.

    * * *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넘어질 뻔한 심협은 가까스로 몸을 가누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동안 멍해져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그는 자신이 석벽을 뚫고 산허리 안으로 들어왔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것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였다.

    고개를 돌려 보니 뒤로는 100장 정도 높이의 매끄러운 석벽이었다. 석벽에는 마애(*磨崖, 석벽에 글자나 그림 등을 새김)가 되어 있었는데, 오랜 세월 침식된 탓에, 글자들이 흐릿해져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낭보(浪普)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한 손으로 석벽을 더듬어 보았다.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좀 전과 달리 그의 손은 석벽을 뚫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정말 석벽이구나.”

    심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낭떠러지 주변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선 광활한 낭떠러지가 산봉우리임을 알 수 있었다. 맞은편 산 벽의 낭떠러지와 자신이 선 낭떠러지는, 두 낭떠러지가 마치 끊어진 다리의 양쪽 끝인 것처럼, 대치를 이룬 듯 무척 흡사한 형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심협이 조심스레 낭떠러지 모퉁이로 다가가자 세찬 바람에 옷이 펄럭였다. 아래를 내려다보았으나 두 낭떠러지 사이의 골짜기에는 운무(雲霧)가 넓게 퍼져 있어 거의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심협은 시선을 돌려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거리가 10여 장은 되어 보이는 맞은편 낭떠러지에 천장까지 높이가 몇 장은 될 법한 동굴이 있었다. 동굴 입구에는 구리 못이 상감된 다 떨어진 석문(石門) 두 짝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는데, 문틈으로 드러난 부분은 칠흑처럼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협이 시선을 조금 돌려보니, 동굴 입구 왼편에는 높이가 1장에 이르는 돌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비석은 마치 거미줄처럼 쩍쩍 금이 가 있었다. 비석에는 고풍스러운 글자가 커다랗고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사월삼성동(斜月三星洞), 뭐하는 곳이지?”

    심협은 진중한 목소리로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읽으며 의아함을 품은 채, 이번에는 동굴의 우측으로 시선을 옮겼다. 동굴 입구에서 비스듬히 오른쪽 위, 눈에 띄는 움푹 파인 흔적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커다란 손자국이었다.

    심협은 자신의 손을 펴 멀리서 그 손바닥과 비교해 보았다. 그런데 그 손자국의 형태가 다소 특이했다. 손가락은 기이하리만치 길었고, 손가락 마디는 비정상적으로 굵었다. 흐릿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람의 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낭떠러지 옆으로 다가가 소매 안에 넣은 채로 손목을 돌렸다. 그러자, 허공에 조금씩 물보라가 모여들더니 두 낭떠러지 사이에 투명한 물 다리를 만들어냈다. 물결이 넘실거리며 요동쳤으나, 물 다리는 무척 견고해 심협은 무사히 맞은편 낭떠러지로 건너갈 수 있었다.

    심협은 고개를 들어 오래된 석문을 자세히 살폈다. 문에 상감된 구리 못에는 잔뜩 녹이 슬어 있었다. 석문은 둘 다 심각하게 기울어져 여닫을 수 없는 상태였다. 중간에는 높이 1장에, 폭 3척 가량의 틈이 있었는데, 그 안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어째 바람도 전혀 통하지 않는군.”

    조심스레 살펴보던 심협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이 문과 그 안의 공간에서는 뭔가 기이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에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식해(識海)를 고요하게 만든 후 신식의 힘을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신식은 그의 의식이 이끄는 대로 문 안을 정탐하기 시작했다.

    한데 그의 신식이 막 문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칠흑같이 어둡던 공간에 갑자기 눈부신 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심협의 신식은 순식간에 강력한 힘이 덮쳐오는 것을 느끼며 곧장 식해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으음.”

    심협은 침음했고, 이어서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시각(視覺)을 되찾을 수 있었으나, 심협은 그 뒤로도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여전히 어지러웠던 것이다.

    잠시 후, 그는 몸부림치며 일어나 앉아서는 애써 고개를 흔들자 현기증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았다.

    “또 금제로군…….”

    그는 석문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신식에 반격을 가하는 금제를 경험한 것은 처음이다. 방금 전 상황으로 미루어 이 금제는 이미 훼손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신식은 중상을 입었을 것이고, 이리 쉽게 정신을 차리지도 못했을 터였다.

    심협은 잠시 망설인 끝에 석문 앞으로 다가갔다. 이어서 손을 문틈으로 쑥 집어넣자, 손바닥에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무형의 장벽이 느껴졌다.

    장벽에는 탄성도 있는 것 같았는데, 석벽처럼 딱딱하고 차갑지는 않았다.

    심협은 조용히 법력을 운공한 상태로 장벽을 강하게 눌러보았다.

    이번에는 석문 안에서 모호한 하얀 빛이 밝게 일었다. 이어 심협이 미처 손을 거두기도 전에 어떤 힘이 반격하듯 튀어나왔다.

    “헛!”

    뒤로 거세게 튕겨나간 심협은 급히 몸을 세우며 두 발을 묵직하게 내리찍었고,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직전에 가까스로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흠, 금제가 있다면 분명 금제를 깨는 기관이 어딘가 있을 텐데……. 대체 어디 있을까?”

    심협은 아래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리고는 동굴 입구 근처를 자세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눈은 동굴 입구 위의 거대한 손자국으로 향했다.

    “설마……?”

    심협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결심을 하고는, 몸을 띄우며 양기를 운공했다. 그리고 청양수를 사용해 거대해진 손바닥으로 매섭게 손자국을 쳤다.

    콰르릉!

    굉음과 함께 벽 전체가 미세하게 흔들렸고, 부패한 낙엽과 흙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사뿐히 땅에 내려선 심협은 기대에 찬 눈으로 주위를 살펴봤지만, 석문은 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실망하려는 찰나, 석문 옆에 선 비석에 모호한 빛이 이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재빨리 ‘사월삼성동’이라고 새겨진 돌 비석으로 다가가 한 바퀴 돌아보며 자세히 살폈다. 가뜩이나 잔뜩 금이 간 비석은 꽤나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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