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08화 (108/1,214)
  • 108화. 게 요괴 낭보(浪普)

    두려워 어쩔 줄 모르고 있던 영락은 심협에게 손을 잡히자, 처음에는 당황했다가 이내 얼굴을 붉혔다. 그 순간, 두려움도 잊게 되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심협이 자신의 손에 미미하게 열기를 내뿜는 동그란 무언가를 쥐어준 것을 알 수 있었다. 고개를 숙여보니 광표의 내단이었다.

    “방금 여기까지 올라올 때 어지간한 요괴들이 우리를 피한 것은 아마도 이 내단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오. 그러니 이걸 가지고 있으면 마을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게요.”

    심협은 영락에게만 들리도록 조용히 말했다.

    “심 대형, 그럼 대형은……?”

    혼자 도망치고 싶지 않았던 영락이 당황하며 물었다.

    “소저가 있으면 싸움에 집중할 수 없으니 더욱 위험하오.”

    심협은 영락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렇게 말했다. 그제야 그 말이 옳음을 깨달은 영락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심협에게서 내단을 건네받았다.

    다소 마음이 놓인 심협은 가볍게 손바닥을 흔들었다. 그러자 반월환이 그의 손바닥에서 솟아올랐다.

    “지금이오! 어서 가시오!”

    심협은 암암리에 법력을 운공하면서 크게 외쳤다. 반월환은 이미 여러 개의 은빛 달그림자가 되어 요란한 소리를 울리며 서천호를 덮쳐갔다.

    영락은 망설임 없이 방향을 틀어 산 아래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얕은 수작!”

    서천호가 가소롭다는 듯 비웃으며 입을 크게 벌렸다. 목구멍에서 빛이 번득이더니 파란 번갯불이 뿜어져 나왔다. 번개는 공중에서 파란 그물망을 이루어 반월환을 뒤덮었다. 그러자 반월환이 발산하던 달그림자는 그물망에 갇혀 빠져나올 수도 없게 되었다.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서천호가 울부짖듯 외치더니 훌쩍 심협의 머리 위를 넘어가 영락을 덮쳐갔다.

    그 순간, 심협이 발끝으로 바닥을 찍었다. 그러자 그의 몸이 뒤로 스르륵 미끄러지며 나아가더니 서천호의 앞을 막아섰다.

    이어서 심협은 양손을 매우 빠르게 움직여 결인했다. 그러자 몸 앞에 파란 빛이 순식간에 모여들어 솟구쳤다. 동시에 공기 중의 수증기가 순식간에 응결해 회전하는 세 자루 물의 칼을 이루었고, 더없이 빠르게 회전하며 서천호의 머리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서천호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앞발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허공에 마치 발톱으로 할퀸 듯한 파란 빛의 궤적이 여러 개 떠올랐다. 이 궤적은 강력한 힘을 동반한 채 물의 칼을 공격해 찢어발겼다.

    퍼펑!

    물의 칼은 산산조각이 났는데, 흩날리는 물보라에 담긴 난폭한 살기가 그대로 심협을 뒤덮었다. 이에 심협은 추락하듯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크윽!”

    심협은 가슴속에서 기혈이 요동쳤고,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서천호가 대충 휘두른 앞발 하나의 위력이 이리 대단한데, 만일 작정하고 공격한다면 결코 막아낼 수 없을 터였다.

    서천호는 튕겨져 나간 심협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방향을 틀어 영락을 추격했다.

    심협을 걱정하고 있던 영락은 달리면서도 결국 뒤를 돌아보았다. 그 바람에 서천호와의 거리가 더욱 좁혀져 이제 20여 장에 불과했다.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서천호의 거대한 위압감이 뒤덮으면서 영락의 두 발도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막 서천호에게 따라잡히려던 순간, 제법 큰 물소리가 들려왔다.

    산길 옆의 계곡에서 계곡물의 절반 이상이 심협의 어수지술(御水之術)에 이끌려 나오면서 마치 홍수처럼 거대한 물줄기가 산 아래로 빠르게 흘렀다. 심협이 부상도 감수하고 어수지술을 강행한 결과였다.

    영락은 어찌 된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물에 휩쓸려 버렸다.

    영락이 물에 휩쓸린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거대한 물 붕어가 나타나 물에 빠진 영락을 등에 업고 산 아래로 빠르게 헤엄쳐 간 것이다.

    이 광경에 서천호는 크게 노하여 걸음을 멈추고 맹렬히 고개를 돌렸다. 두 눈에는 난폭한 눈빛이 가득했다.

    “크르릉!”

    서천호의 포효가 귀에 꽂히자 심협은 머릿속 깊은 곳에 날벼락이라도 떨어진 것만 같았다. 이에 몸은 심하게 떨렸고,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그때 그의 몸 전체에서 20개의 파란 빛의 띠가 번득이다 사라졌다. 그러자 청량한 기운이 단전에서부터 솟구쳐 빠르게 머릿속을 한 바퀴 돌았고, 이에 곧장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심협은 머릿속이 윙윙 울리는 것을 견뎌내며, 법력을 운공해 신식과 식해(識海)를 보호했다. 동시에 손가락을 까딱거려 서천호를 도발했다.

    “건방진 놈!”

    서천호는 분노가 극에 달한 듯 영락을 내버려둔 채 심협에게 달려들었다.

    도발이 효과를 보이자 심협은 곧장 양손을 거둬 결인하였다. 그러자 반월환이 이미 약해진 번개 그물망 안에서 몸부림치며 빠져나왔다.

    심협은 몸을 돌려 산 정상을 향해 미친 듯이 내달렸다. 서천호를 영락에게서 최대한 멀어지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100여 장을 달린 후 왼쪽 숲속으로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사실 그는 매우 당황한 상태였다. 서천호의 포효가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서천호는 전신이 마치 푸른 화염처럼 변한 상태로, 형용하기 어려운 속도로 돌진해오고 있었는데, 광표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였다.

    심협은 급히 무언가 외며 결인을 하더니 손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피수결(避水訣)의 푸른 광막이 빛을 번득이며 나타났다.

    그러나 그 빛이 안정되기도 전에 서천호가 부딪혀왔다.

    펑!

    광막은 어지럽게 요동치더니 단숨에 폭발해 버렸다.

    “쿨럭!”

    심협은 가슴에 묵직한 통증을 느끼며 피를 토해냈고, 그대로 튕겨나가 커다란 고목에 부딪힌 후 바닥에 떨어졌다.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서천호가 입을 크게 벌린 채 덮쳐온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심협이 급히 몸을 돌리면서 맹렬히 소매를 떨치자, 소매에서 금색 빛줄기가 발사되었다.

    금색 빛 안에는 4, 5장에 이르는 밧줄이 정면에서 다가오는 서천호를 향해 쏜살같이 발사되었다.

    서천호는 냉소하며 앞발을 휘둘렀다. 밧줄을 끊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밧줄은 마치 지각 능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돌연 낭창거리며 구불구불해지더니 서천호의 발톱을 피했다. 이어서 도마뱀처럼 서천호의 앞발을 타고 올라가 단숨에 허리를 휘감았다.

    표면에서 옅은 금빛 부적 문양이 떠올라 번득이면서 밧줄이 조여졌다. 이에 서천호는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앞발이 가슴 앞까지 당겨지면서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심협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내달렸다. 그는 자신의 현재 수준으로는 제아무리 뛰어난 법기가 있어도 출규기 요괴를 상대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도망치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호흡 몇 번 할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뒤에서 펑 하는 소리가 울렸다. 서천호의 몸에서 난폭한 기운이 폭발해, 마치 실재처럼 뭉쳐진 살기가 밧줄을 산산조각 낸 것이다.

    심협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금색 빛이 어지럽게 흐트러지면서 끊어졌던 밧줄이 다시 모여들어 합쳐지더니 허공을 날았고, 단숨에 심협을 따라와 오른팔에 감겼다.

    심협은 밧줄의 빛이 많이 어두워진 것을 보고 심각하게 손상됐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까워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추풍보로 전력을 다해 내달릴 뿐이었다.

    “요망한 놈!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마!”

    서천호는 몇 차례나 허탕을 치자 분노가 폭발한 듯 포효하며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자 배와 허리에서 전류 같은 빛이 일더니 등과 가슴팍을 따라 머리로 흘러들었다. 뒤이어 입에서 전류가 교차하는, 실재하는 광구(光球)가 되었다.

    꽈릉!

    천둥소리와 함께 서천호의 입을 떠난 광구는 쏜살같이 심협의 등으로 향했다.

    심협은 등 뒤에 거대한 힘이 습격해 오는 것을 느꼈고,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이에 그는 맹렬히 몸을 돌려 빠르게 결인하고는 두 손을 붙였다가 떼자, 그의 손 위로 회전하는 물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소용돌이 중앙의 동굴에서는 농후한 요기가 풍겨 나와 허공에서 기이한 요괴의 모습을 이루었다.

    손에 오금삼차극(*烏金三叉戟, 삼지창의 일종)을 들고 심협의 앞에 착지한 요괴는 온몸이 붉었고, 길이는 4척 정도였다. 옆으로 넓은 체형에 몸에는 푸른 갑옷을 입은 채였다. 두 어깨에 연결된 것은 팔이 아니라 거대한 게의 집게발이었다. 둥글납작한 머리에는 금황색 머리카락이 한 움큼 나 있었고, 동그란 두 눈은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심협이 응혼 후기에 접어들어 새로 통령 계약을 맺은 게 요괴였다. 이 요괴도 응혼 후기로, 막강한 방어 신통력을 지니고 있었다.

    통령역요 술법에는 제한이 있어 심협은 어쩔 수 없이 추두와의 통령 계약을 해지해야 했다. 그리고 꽤 공을 들여 통령 계약을 맺은 것이 이 게 요괴다.

    “심가 놈아, 감히 이 어르신을 불…….”

    게 요괴는 나타나자마자 호통을 치려다가 불현듯 어마어마한 위력의 광구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더니 반사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오금삼차극을 바람개비처럼 돌렸다. 그러자 몸 앞에 크기가 1장에 이르는 푸른 물 소용돌이가 생겨나 막강한 흡입력을 발휘했다.

    꽝!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푸른 광구는 물 소용돌이 안에서 폭발했고, 무수히 많은 전류 물보라가 튀어나왔다. 그 바람에 반경 5장 안의 고목들이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졌고, 연기와 먼지가 사방에서 피어올랐다.

    “끄응,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이 망할 심가 놈! 또 이 어르신을 엿 먹이려는 게냐?”

    연기 속에서 애처로운 신음 소리에 이어 바로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낭보(浪普) 도우, 욕은 나중에 하시지요. 우선은 저 서천호를 상대해야 합니다.”

    심협이 그렇게 부탁했으나 게 요괴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상대하라고? 무슨 개소리냐! 이 어르신도 응혼기인데 어떻게 저 괴물을 상대하라는 말이냐! 각자 도망치자.”

    연기와 먼지가 걷히면서 드러난 게 요괴는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던 갑옷이 검게 그을린 데다가 온통 먼지까지 뒤집어쓴 낭패한 모양새였다.

    “통령술로 요괴까지 부르다니, 인간도 제법이구나.”

    서천호는 연기와 먼지를 뚫고 천천히 다가오며 냉소했다.

    “거기 호랑이 형, 나와 이놈은 잘 모르는 사이요. 저놈이 뭔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얼마든지 후려치시구려. 내 보기만 하고 절대 끼어들지 않겠소!”

    낭보는 그 말을 마치자마자 일어나 몸의 먼지를 털어내더니 마치 구경꾼처럼 뭉텅 잘려나간 나무둥치에 기대어 섰다.

    서천호는 이 광경에 의아한 듯 심협과 게 요괴를 번갈아 봤다. 둘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심협은 낭보를 보며 낭패한 얼굴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좋다. 네놈은 인간이 아니니 끼어들지만 않는다면 살려주겠다.”

    서천호의 말에 낭보는 성의를 표하듯 몸을 돌려 몇 걸음 물러났다.

    “자, 또 무슨 수가 남았는지 구경시켜주겠느냐?”

    서천호는 난폭한 눈빛으로 심협을 노려보며 느긋하게 다가갔다.

    심협은 그런 서천호를 살피며 반월환을 쥔 채 서서히 물러났다.

    “커헝!”

    서천호가 크게 포효하더니 단숨에 심협을 덮쳐갔다.

    그때였다. 낭보의 눈빛이 돌연 교활하게 변하자, 오금삼차극에 파란 빛이 일어 흐릿한 송곳이 되었고, 송곳은 매우 날카로운 기세로 서천호의 허리를 찔러갔다.

    송곳이 막 허리를 파고들기 직전, 서천호의 기다란 꼬리가 파란 전류에 휩싸여 맹렬하게 허공을 가르더니 갑자기 강력한 바람이 불었다.

    이에 낭보는 집게발로 오금삼차극을 꽉 잡고 재빨리 거두더니 창끝으로 바닥을 찔렀다. 그리고 나머지 집게발로는 서천호의 꼬리를 잡으려 했다.

    까깡!

    금속성이 울렸고, 삼차극이 반쯤 땅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낭보의 오른쪽 집게발이 서천호의 꼬리를 잡았다.

    그 순간, 막강한 전류가 갑옷을 통해 낭보의 체내로 흘러들어갔다.

    치지직!

    낭보의 게 껍데기 위로 푸른 빛이 일면서 전류에 휩싸였다.

    “끄아악! 시, 심가 놈아! 이 교활한 놈이 속지를 않는구나! 내가 막고 있을 테니 얼른 도망치거라.

    몸 전체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채로 낭보는 처참하게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말을 끝냈다.

    “낭보 도우! 억지로 버티지는 마시오.”

    심협은 화들짝 놀라 급히 통령술을 시전해 물 소용돌이를 낭보 옆에 던져두고는 곧장 도망쳤다.

    ‘그래도 저놈이 양심은 있구나.’

    낭보는 속으로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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