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107화 (107/1,214)
  • 107화. 서천호(噬天虎)

    지난 2년간 심협의 수련 속도는 하루에 천 리 길을 가는 것에 비유할 만했다. 심지어 나씨 도인이 언급했던, 수백 년에 한 명 나오기도 어렵다는 최고 경지의 도체(道體)를 지닌 자로서도 절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꿈속에서의 자질이 제아무리 뛰어나고, 수련 속도가 빨라 봐야, 그리고 그 수련 경지가 제아무리 높아봐야, 이는 어디까지나 꿈속 세상 이야기일 뿐이었다. 모두 현실로 가져갈 수는 없는 것이다.

    “어서 이곳을 떠납시다. 워낙 소란스러웠고 광표의 피비린내까지 퍼졌으니 다른 요괴들이 올지도 모르니까.”

    영락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여전히 다소 멍해 있었고, 심협의 내력에 점점 더 신비로움을 느꼈다.

    두 사람은 계속 산길을 따라 올랐다. 평온한 길이었다. 종종 요괴가 나타났으나 잔챙이라 할 만큼 약해빠진 놈들로, 알아서 두 사람을 피했다.

    “심 대형, 예전에 아버지께 들은 이야기가 있어요. 수련이 응혼기에 이르게 되면 신식(神識)의 힘이 크게 증진된다고, 그 신식을 밖으로 내보내 주변의 변화를 감지할 수도 있다고…… 그리 말씀하셨는데, 사실인가요?”

    영락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소. 응혼기에 이르면 혼백이 모여 사람의 형태를 이룰 수 있고, 신식의 힘도 크게 증가하오. 신식을 몸 밖으로 내보낼 수도 있지. 이로써 주변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오.”

    심협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심 대형은 신식을 얼마나 멀리 내보낼 수 있습니까?”

    영락이 다시 물었다.

    “반경 10장 정도의 상황은 살필 수 있소. 다만 행적을 잘 숨기는 요괴가 있다면 발견하기는 어렵소.”

    심협의 대답에 영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0장…… 실로 대단한 경지에 이르셨습니다!”

    부러운 듯한 영락의 칭찬에 심협은 웃었다.

    “그대의 자질도 결코 부족하지 않으니,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이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오.”

    심협의 실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된 영락은 처음 산에 오를 때의 긴장감이 다소 사라졌다.

    “영락 소저, 지난번 산에 오를 때 내게 길 안내하는 나비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소? 그때 나무꾼 이야기도 있다고 했는데…… 하필 광표가 나타나 듣지 못했구려. 지금이라도 해주겠소?”

    심협은 갑자기 떠오른 듯 말했다.

    “네, 듣고 싶으시다면 해드리지요. 이는 까마득히 오래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때는 우리 장수촌이…….”

    영락은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 장수촌에 한 나무꾼이 있었다. 그는 매일 산에 올라 나무를 했는데, 대부분 산기슭 근처에서만 했을 뿐, 산속 깊이 들어간 적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꾼은 나무를 하던 중 털이 눈처럼 새하얀 토끼를 발견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줄 생각에 토끼를 잡기로 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토끼를 쫓던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산허리까지 오른 후였다. 나무꾼은 결국 토끼는 잡지 못했으나,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센 두 노인이 벼랑가의 평지에서 바둑을 두는 모습을 보게 됐다.

    노인들은 풍채가 마치 신선들 같은 것이, 아무래도 평범한 사람들은 아닌 듯했다. 이에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두 노인이 바둑 두는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촌구석 나무꾼인지라 바둑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지만, 머지않아 바둑 구경에 정신이 팔렸다. 마치 백의의 병사들과 흑의의 병사들이 공격을 주고받으며 사투를 벌이는 전장의 장면을 생생하게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나무꾼은 누군가 어깨를 치는 것을 느끼고는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바둑 두던 노인 중 한 명이 자신에게 이리 말하는 것을 들었다.

    “자질이 총명하기는 하나 아직 속세의 인연을 다하지 못하였구나. 돌아가거라.”

    나무꾼은 어찌 된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정신이 얼떨떨해졌고,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이 원래 나무를 하던 곳이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사방에 풀이 무성하고 고목이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것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무꾼은 당황하며 허리를 숙여 도끼를 주웠는데, 자루가 말라 썩어 있었고, 날에는 녹이 잔뜩 슬어 있었다.

    심지어 마을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마을에는 그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나무꾼은 한참을 물어 자신의 집으로 겨우 돌아왔는데, 집도 완전히 달라진 상태였다. 그는 사람들을 붙들고 한참을 이야기한 끝에야 깨닫게 됐다. 자신이 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돌아온 사이에 이미 60년의 세월이 지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부모와 아내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자신이 살던 집에는 그의 자녀들과 손자들, 증손자들까지 3대가 살고 있었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소문은 점점 바뀌고 덧붙여져, 사람들은 나무꾼이 장수하는 법술을 얻었다고 여기게 됐다. 그래서 60년이 지나도록 전혀 늙지 않았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마을에 100세를 넘기는 노인이 많아지면서 마을에는 장수촌이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소? 그럼 그 뒤에는 어찌 되었소?”

    심협이 흥미로운 듯 물었다.

    “나중에 그 나무꾼은 신선 노인의 말이 떠올라 자손들과 헤어져 산에 올라 수련을 시작했대요. 듣자 하니 후에 누군가 산에서 그를 보았다는데, 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종종 산에서 나무를 하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고 해요.”

    “오오, 정말 신기하오. 그 나무꾼이 아직 산에 있을지 모르겠소!”

    심협은 빽빽한 수풀을 바라보며 웃었다.

    “모두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이에요. 마을에…….”

    영락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멀리서 야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커헝!”

    야수의 포효에 숲 전체가 떨렸고,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영락은 귓가가 요란스럽게 울리는 듯한 느낌에 재빨리 주위를 둘러봤다. 마치 천지가 회전하는 것처럼 시야가 흔들렸다.

    “내 신식이 감지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군. 그런데도 이 정도 위력이라니, 분명 응혼기 요괴인 듯하오. 괜히 자극하지 맙시다.”

    심협이 안색을 굳히며 말하자 영락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러더니 급히 심협을 따라 산을 올랐다.

    그런데 10장도 채 달리기 전에 심협이 갑자기 멈춰 섰다.

    “아…… 그것이 우리를 발견했군. 이미…… 따라왔구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숲이 한바탕 흔들리더니 굵은 나무들이 양쪽으로 쓰러졌다.

    심협은 숲의 동정을 주시했다.

    잠시 후, 나무들이 쓰러져 탁 트인 시야로 거대한 맹수가 날아와 두 사람 앞에 내려섰다. 몸길이가 족히 2장은 되고, 뒤로는 그 몸통만큼이나 긴 꼬리가 달려 있었다. 눈처럼 하얀 털 가운데 검은 무늬가 섞여 있는 호랑이 요괴였다.

    머리통 주변에는 옅은 파란색 갈기가 나 있었고, 검붉은 두 눈은 구리 방울처럼 컸다. 입가에는 강철 침과 같은 수염들이 있었고, 아래턱 옆으로는 두 개의 송곳니가 차갑고 살벌한 빛을 번득이며, 날카로운 칼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서천호(噬天虎)!”

    영락이 경악성을 내질렀다.

    호랑이 요괴는 그 소리를 들었지만, 영락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검붉은 눈을 부릅뜬 채 심협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네게서 광표의 냄새가 나는구나. 아니…… 광표의 내단 냄새인가. 그리고 소호리(騷狐狸)의…….”

    서천호는 갑자기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목소리가 묵직한 것이 마치 중년 남자의 것 같았다.

    심협은 말없이 영락의 앞을 막아섰다. 한 손은 소매 안에서 반월환을 쥔 채였다.

    서천호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입가를 당겼는데, 그 표정과 자세가 흡사 사람이 비웃는 것과 같은 모양새였다.

    “광표 그놈은 기습과 도주에 능해 지난번 내 발톱 아래에서도 죽지 않고 도망쳤는데, 인간 수사 손에 죽을 줄이야. 참으로 쓸모없는 놈이었군.”

    서천호는 앞발을 핥으며 이죽거렸다.

    ‘광표의 얼굴에 새로 생겨났던 흉터는 저 서천호가 남긴 것이었나?’

    서천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와 기세는 광표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농후하고 강력했다. 이에 심협은 바짝 긴장해 조심스레 영락을 보호하며 조금 뒤로 물러났다.

    “너희는 장수촌에서 왔느냐?”

    서천호가 심문하는 듯한 눈으로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그렇소.”

    왜 그런 것을 묻는지 알 수 없어 심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그 말에 서천호는 고개를 조금 숙이더니, 추억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단을 넘기고 떠나라.”

    심협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스쳤다.

    “저희를 죽이지 않을 건가요?”

    영락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왜? 죽고 싶은 것이냐?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마라. 광표의 내단을 남겨두고 어서 꺼져!”

    서천호는 두 사람을 매섭게 노려보더니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그 눈빛에는 살기가 거의 담겨있지 않자, 심협은 더욱 의아해졌다.

    “내단을 넘겨드리면 선배께서는 저희가 산에 오르게 해주실 겁니까?”

    영락이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물었다.

    심협은 서천호의 힘을 감지한 순간부터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가 영락의 말에 심장이 덜컥했다.

    “산에 오르겠다는 것이냐?”

    그 말이 뭔가 자극이 된 것인지 서천호의 눈이 돌연 검붉은 빛으로 번득였다. 그러더니 눈꼬리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올라 얼굴을 완전히 뒤덮었다.

    순식간에 서천호의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져 갔다. 온몸에서는 갑자기 살기가 폭발했다.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진득한 살기였다.

    “산 위의 모든 것은 다 내 것이다. 누구도 건드릴 수 없어!”

    서천호가 다시 으르렁거리며 입을 열었는데, 그 목소리는 좀 전과 달리 거칠게 쉬어 있었다.

    또한 서천호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두 사람에게 달려들며 포효했다.

    “크르릉!”

    수십 장이나 떨어져 있던 좀 전과 달리 바로 앞에서 포효하자, 심협은 공기 중에 물결과 같은 파동이 일어나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파동은 겹겹이 두 사람을 덮쳐왔다.

    심협은 급히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영락의 앞을 완전히 막아섰다. 이때 그의 한 손은 이미 피수결(避水訣) 결인을 한 채였다.

    그의 몸에 파란 빛이 일더니 길이가 1척에 이르는 파란 광막이 한 겹 생겨났다. 광막은 마치 갑옷처럼 심협을 보호하면서, 요동치는 공기 중의 파동과 충돌했다.

    쾅! 쾅!

    충돌할 때마다 피수결 광막은 크게 일렁였다. 그러나 충돌해오는 파동이 점점 강해져 광막은 얼마 버티지 못할 터였다.

    심협은 두려운 마음에 체내의 법력을 미친 듯이 끌어올려 전력으로 피수결을 운공했다. 그러자 광막의 빛이 맹렬히 불어나더니, 그 안에서 무형의 힘이 폭발하면서 서천호의 포효가 만든 공기 파동을 떨쳐냈다.

    그러나 피수결은 억지로 그 힘을 떨쳐낼 뿐, 광표와의 전투에서처럼 공격을 반동으로 돌려보내지는 못했다.

    “큰일이오! 저 호랑이는 출규기 요괴요!”

    서천호의 포효에 담긴 위력을 본 후에야 심협은 깨달았다.

    “허! 네놈이 응혼기 수사였구나! 그렇다면 네놈을 먹는 것이 광표의 내단보다 훨씬 더 효과가 좋겠지. 크하하!”

    서천호는 눈에 더욱 짙은 살기를 담은 채 흥분한 듯 웃었다.

    심협은 굳은 안색으로 소매 안에 감추어두었던 손을 몰래 뒤로 뻗어 영락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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