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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106화 (106/1,214)

106화. 응혼기 수사

심협은 들국화에 맺힌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찍어 문질러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러세요?”

영락이 의아한 듯 물었다.

“산의 빗물에 음기가 너무 강하오. 보통의 우물물보다 약간 더 무겁고, 점성도 있구려. 며칠 전 내렸던 비도 이랬던 것 같소.”

심협의 말에 영락은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듯 말했다.

“어쩐지……. 심 대형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비를 맞은 마을 어르신들이 병이 나셨다가 최근에서야 겨우 회복되셨지요.”

“사실 음기만으로는 그리 문제가 아니오. 다만 방촌산의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는 것 같으니 그게 걱정이구려.”

심협의 탄식에 영락도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다시 산을 올랐다.

반 시진쯤 후, 길가의 움푹 파인 곳에 얕은 못과 계곡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더 올라가자 경사가 점점 가팔라졌다.

두 사람은 이내 빽빽한 수풀로 들어서게 됐는데, 저 앞으로 둘레가 족히 10여 장은 되어 보이는 푸른 못이 나타났다. 못에는 나뭇잎들이 떠다녔고, 물결은 햇살에 반짝였다.

못을 지나던 심협이 수면을 힐끔 보더니 불쑥 말했다.

“잠시 쉬었다 갑시다.”

영락은 고민도 하지 않고 걸음을 멈추었다.

심협은 못가에 쭈그려 앉더니 연못에 손을 넣었다. 그러자 냉기가 순식간에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그러나 심협에게는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크허헝!”

맞은편 수풀에서 갑자기 짐승 우는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어서 맷돌만 한 금빛 광구(光球)가 나타나 나무들을 베었고, 못 위 1장 높이에서 두 줄기 금색 빛을 그리며 심협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심협은 진즉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전혀 당황하지 않고 물에 담그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렸다. 사실 물에 담근 순간 이미 결인을 해둔 상태였다.

연못 수면에 파도가 솟구쳐 두터운 물의 벽이 되어 심협의 앞을 막았다.

퍼펑!

금색 빛이 물 벽에 충돌하자 물 벽은 마치 주머니처럼 빛을 감쌌다. 그러고도 무너지지 않았고, 몇 차례 호흡을 할 시간 동안 광구의 힘을 소모시킨 후에야 터져나가 물보라가 되었다.

금빛 광구는 물보라를 뚫고 나왔지만, 그 기세는 한풀 꺾였고, 크기도 반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그때 심협은 청양수로 푸르게 빛나는 오른손을 들어 광구를 내리쳤다. 그러자 광구는 폭발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쏴아아!

마치 폭우가 내린 듯 못 위로 물안개가 일었고, 수면은 크게 일렁였다.

물안개가 점차 사라진 후, 맞은편 수풀에서 길이가 5장에 이르는 거대한 금황색 짐승이 천천히 걸어 나와 못가에 섰다. 몸에는 갈색 원형 무늬가, 이마에는 번개가 번득이는 듯한 무늬가 있었다. 두 눈에는 금색 빛이 번득였고, 네 개의 날카로운 이빨은 예리한 검 같았다. 몸에 감도는 요기(妖氣)는 막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바로 광표였다.

그런데 2년 전과 달리 왼쪽 눈부터 비스듬히 3줄기 발톱 자국 같은 것이 얼굴을 반쯤 가로지르고 있어, 광표는 더욱 흉악해 보였다.

“또 너희냐?”

광표는 심협과 영락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의외라는 목소리였다.

영락은 안색이 창백해져 심협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바로 도망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심협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표정에도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영락의 손목을 끌어 자신의 뒤에 서게 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지? 결국 또 만나게 됐군.”

심협은 한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더니 탄식하듯 말했다.

“지난번에는 요행으로 도망쳤을지 모르나 이제 운이 다했구나. 재수 없게도 또 나를 마주치지 않았느냐.”

광표의 두 눈이 가늘게 변하더니 살기가 번득였다.

“글쎄, 재수가 없는 건 어느 쪽일까?”

심협이 태연한 목소리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허! 하찮은 인간 수사가 감히 나를 도발하려 하느냐!”

이어서 광표가 거대한 발로 땅을 내려치자 순식간에 강렬한 기세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그 앞의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듯 순식간에 갈라졌다. 그리고 그 진동에 연못도 요동쳤고, 파도가 일어나 뒤덮을 듯 심협에게 몰려왔다.

거대한 파도가 몰려오는 것을 본 영락의 안색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심협이 미동도 없이 버티고 서 있자 그녀도 마음을 굳게 먹고 이를 악물고는 용기를 냈다.

“하찮은 건 짐승 쪽이지!”

심협은 차갑게 비웃더니 체내의 법력을 운공했다. 그러자 그에게서도 강력한 기운이 발산되어 쏘아져 나갔다.

촤르륵!

못 위에서 두 기운이 일으킨 3, 4장 높이의 물기둥이 충돌하면서 한바탕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이어서 거대한 굉음을 동반한 물결이 동시에 폭발하면서 폭우처럼 물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심협은 연신 손을 결인하며 움직였다. 그러자 비처럼 쏟아지던 물방울들이 파란 광막에 휩싸이더니, 마치 응고된 듯 허공에 멈추었다.

“가라!”

심협이 나지막이 외치며 결인한 양손을 휘두르자, 허공에 멈춰 있던 물방울들이 서로 엉켜 날카로운 송곳 같은 칼로 변해, 두려울 정도로 빠르게 선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허공에 파란 소용돌이가 생겨나더니 물의 칼이 비처럼 광표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광표는 평범한 어수지술(御水之術)이라 여겼던 심협의 법술이 갑자기 물의 칼로 변해 쏟아지자 그제야 그 기세와 위력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이제는 피하려 해도 늦은 상황이었다. 이에 광표가 온몸의 털들을 모두 바짝 세우자 모호한 금색 빛이 일었다.

쐐액!

날카로운 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수십 개의 물 칼이 광표에게 쏟아졌다. 그 위력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높이 치켜들었던 광표의 등이 점점 아래로 내려앉았다. 동시에 그를 에워싼 금색 빛에도 붉은 핏빛이 퍼졌다.

영락은 고개를 내밀어 그 모습을 봤으나,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응혼기의 광표를 심협이 이토록 쉽게 제압할 수가 있단 말인가!

“크르릉!”

물 칼의 소용돌이가 겨우 멈춘 순간, 광표의 포효가 그대로 심협에게 발사되었다.

그러나 심협은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앞으로 성큼 나서더니, 두 발로 수면을 딛고 허공을 가르며 달려나갔다.

광표와의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심협의 발아래에서 갑자기 물소리가 울렸다. 그러더니 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뱀이 머리를 드러냈다. 이 뱀은 심협의 몸을 받친 채 광표보다 머리 하나는 더 높이 치솟았다. 이제 심협이 광표를 내려다보는 위치가 된 것이다.

심협은 싸늘한 눈으로 광표를 내려다보며, 두 손을 몸 앞에서 휘둘렀다. 그러자 소매에서 금속성이 울렸고, 동시에 은색 빛줄기가 발사되었다. 그 빛은 허공에 은빛 달과 같은 잔영을 남기며 광표를 공격해갔다.

“헛!”

광표는 반월환의 공격에 놀라고 당황해 곧장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자 금색 빛이 연달아 발사되어 반월환을 공격했다.

하지만 은빛 달은 너무도 빨라 단 한 번도 맞히지 못했다.

은빛 달이 가까이 다가온 찰나, 광표의 눈빛이 차게 변하더니 이마의 문양에서 돌연 빛이 번득였다.

그 순간, 심협은 눈앞이 어질어질해졌다. 동시에 광표가 모습을 감추었고, 반월환은 결국 허공을 가르고야 말았다. 그리고 심협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도 전에, 뒤에서 돌연 거대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뒤에서 나타난 광표가 금색 빛에 휩싸인 거대한 발을 심협의 후두부(後頭部)를 향해 맹렬히 휘두른 것이다.

“심 대형!”

영락은 경악해 외치며 급히 양손을 휘둘러 법술을 시전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광표를 막기에는 너무 늦은 때였다.

그 순간, 심협이 나지막이 무언가 외는 것이 들렸다. 이어서 그의 몸 전체에 파란 빛이 솟았고, 물의 기운을 발산하는 파란 광막이 심협을 에워쌌다. 피수결(避水訣) 광막이었다.

퍼펑!

거대한 소리와 함께 광표의 거대한 발이 피수결 광막을 후려쳤다. 그러자 광막은 한바탕 요동쳤다. 마치 호수에 바람이 분 것처럼 잔잔한 물결이 퍼져나간 것이다.

그러나 광막은 찢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공격의 위력을 반동력으로 돌려보냈다.

“헉!”

광표는 거대한 힘이 덮쳐오는 것을 느꼈고, 다음 순간 앞발이 마비되었고, 그 거대한 몸이 튕겨나갔다.

광표의 몸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위협적인 반월환이 등 뒤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거대한 반달의 잔영이 되어 광표의 가슴팍을 뚫고 지나갔다.

“크아아!”

광표의 비명과 함께 피가 비처럼 허공에 뿌려졌다.

콰쾅!

묵직한 소리와 함께 못가에 떨어진 광표는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선홍빛 피가 연못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게…… 어찌 가능하단 말이냐?”

광표는 몸부림치듯 비틀거리며 걸었다. 치명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심협을 받치고 있던 뱀은 그제야 서서히 내려왔다. 그가 손을 휘두르자 반월환이 금속성을 내며 돌아와 손목 주위를 맴돌았다.

“내 본래 너와는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네가 죽음을 자초했지. 그러니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심협은 담담하게 내뱉고는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반월환이 광표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그런데 그때였다. 돌연 광표의 몸에 몽롱한 혈기(血氣)가 퍼졌고, 이어서 그 거대한 몸뚱이가 순식간에 열 배는 축소되어 5척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마의 문양에서 다시 빛이 번득이더니, 광표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광표는 또다시 뒤에서 나타났는데, 너무도 갑작스럽고 빨랐기에 심협도 이번에는 피수결 광막을 미처 만들어낼 틈이 없었다.

“죽어라, 인간!”

광표는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며 심장까지 갈라버리려는 듯한 자세로 심협의 등을 잡으려 했다.

그 차갑게 번득이는 발톱이 심협의 옷을 뚫으려던 순간!

쉬익!

반월환이 관통하고 지나간 곳에서 기이한 소리가 울리더니 그 부분에서부터 돌연 얼음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광표의 몸 절반을 얼려버렸다.

쿵!

광표는 그대로 추락해 땅바닥에 처박혔다.

심협은 그제야 몸을 돌리며 손을 결인했다. 그러자 못 아래에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나타났고, 길이가 1장에 가까운 물 칼이 튀어나와 파란 빛을 번득이며 광표의 몸을 반으로 잘라버렸다.

광표의 굳어버린 얼굴에는 경악과 두려움, 여한이 섞여 있었다. 응혼기의 요괴가 그토록 멸시했던 인간 수사의 손에 처참하게 죽은 것이다.

심협은 요동치는 물 위에 서서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광표의 시신으로 다가가 검붉은 내단을 찾아냈다.

다시 못가로 돌아온 그는 연못물로 여기저기 묻은 피를 씻어냈다.

아직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영락은 그제야 다가왔다. 그녀는 여전히 감정을 추스르기가 어려웠다.

“심 대형, 광표는 응혼기 요괴인데…… 그렇다면 대형의 수련은……?”

영락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나도 응혼기 수사요. 그대를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말하지 않았지.”

심협은 얼굴에 묻은 피를 씻어내고는 웃었다.

“이미 벌써 응혼기…… 고작 2년 사이에…….”

영락은 마치 영혼에 울리는 천둥소리라도 들은 듯 넋이 나가버렸다.

“나도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소!”

심협의 이 말은 실제로 기이한 꿈에 들어와 있다는 의미도 담고 있었지만, 당연히 영락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영락의 기억 속 심협은 예전에 마을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벽곡 초기의 수사였다. 그렇기에 심협이 고개를 돌렸을 때 영락은 멍해져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만큼 믿기 힘은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영락이 모르는 것은 또 있었다. 심협의 수련은 응혼 초기나 중기도 아닌 후기에 이르러 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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