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뱀 소굴
심협은 전력을 다해 단전의 법력을 운공했다. 그러자 20개의 법맥에 담겨 있던 법력들이 운공되기 시작해, 체내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며 거세게 흘렀다. 그러더니 마치 성난 파도처럼 두 눈에 주입되었다.
그의 눈에 파란 빛이 일었다.
파지직!
이어서 뭔가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고, 심협의 시야는 다시 뚜렷해졌다. 황색 빛과 가짜 뱀 그림자는 모두 사라졌고, 사투를 벌이는 물뱀과 추두만 눈에 들어왔다.
미인사의 수련은 확실히 추두보다 위였고, 몸놀림이나 힘도 더 우세했다. 그렇다보니 순식간에 추두는 피갑 곳곳이 깨진 채 어렴풋이 핏자국까지 내비쳤다.
이를 본 심협은 재빨리 왼손을 결인하고,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흐르던 물이 출렁이더니 일고여덟 개의 거대한 물 밧줄이 순식간에 미인사의 몸을 칭칭 감았다.
“아니!”
미인사는 순간적으로 움직임이 봉쇄되자 심협을 돌아보았고, 그가 시야를 정상으로 회복한 모습에 다소 놀란 듯했다.
한편, 추두는 미인사가 물 밧줄에 묶이자, 사기를 끌어올리더니 파랑추를 세차게 휘둘렀다.
휘잉!
묵직하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퍼펑!
검은 빛줄기로 변한 파랑추가 목에 꽂히면서 미인사의 상반신은 뒤로 훌쩍 젖혀졌다.
바로 그때, 미인사의 머리 위에서 은색 빛이 번득였다. 반월환이 빠르게 날아든 것이다.
쐐액!
빛이 크게 일렁였고, 은빛 달그림자가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를 내며 미인사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크아아!”
미인사는 크게 놀라 포효했다. 그러자 몸에 황색 빛이 가득 일었다가 빠르게 수축했다. 이어서 미인사의 몸에 두께가 몇 촌(寸)이나 되는 황색 광막이 생겨났고, 동시에 머리를 옆으로 틀었다.
하지만 광막이 완전히 형성되기도 전에, 반월환의 은빛 달그림자가 파고들었다. 그러자 제법 견고해 보이던 황색 광막도 마치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이어서 은빛 달그림자가 순식간에 파고들어 순식간에 미인사의 목을 반 척 이상 베어버렸다.
미인사의 눈에는 경악과 두려움이 들어찼다. 아름다웠던 얼굴도 순식간에 뱀 머리로 바뀌었다.
“쉬이익!”
더 이상 미인(美人)이라 부를 수 없게 된 미인사가 입을 쩍 벌리더니 처참하고도 난폭한 소리를 내질렀다. 근처의 수역까지 윙윙 울릴 정도였다.
심지어 그 소리를 잠깐 들은 것만으로도 심협은 어지러움을 느끼고는 결인한 두 손을 멈추었고, 자연히 반월환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때, 미인사의 방대한 몸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뒤이어 몸에서 황색 빛이 급히 번득였다가 용솟음치듯 거대한 힘이 분출되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흐르던 물줄기도 폭발하듯 요동쳤다.
찌이익!
동시에 무언가 찢어지는 듯한 기괴한 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심협이 그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물 밧줄에서 느껴지던 몸부림이 사라져 있었다. 이에 그는 안색을 굳히며 재빨리 손을 결인했다.
반월환과 물 밧줄들은 흐르는 물속에서 매우 빠르게 날아왔는데, 기다란 황색 물건이 물 밧줄에 걸려 있었다. 다 헤질 대로 헤진 뱀 허물이었다.
그 순간, 하얗고 기다란 것이 요동치는 물속으로 빠르게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전신이 눈처럼 하얗고 비늘조차 없는 큰 물뱀이었는데, 그 몸집이 아까보다 두 배는 커진 듯했다. 목의 상처도 기다랗고 붉게 변해 있었는데, 어느덧 피가 응고되어 있었다.
하얀 물뱀은 몸을 움직이며 하얀 그림자로 변하더니 더없이 빠른 속도로 헤엄쳐 도망쳤다.
“어딜 도망치는 것이냐!”
심협은 버럭 외치며 피수결(避水訣)을 운공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속도가 치솟으면서 미인사를 놓치지 않고 쫓아갈 수 있었다.
추두는 쉴 새 없이 꼬리를 흔들며 미인사를 쫓았는데, 심협보다 빠르면 빨랐지 느리지는 않았다. 동해의 수족(水族)인 만큼 수영에 능한 것이다.
미인사는 그들이 뒤를 바짝 쫓아오자 경악했다. 그러다가 몸을 솟구쳐 물 밖으로 나가더니 뱀 꼬리를 좌우로 휘저어, 수면에 새하얀 물보라를 만들어내면서 미친 듯이 도망쳤다.
심협은 머리 위의 물보라가 이는 방향을 따라 추격하다가, 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물안개가 잔뜩 껴 있는 산비탈의 작은 호수였다.
미인사는 호수 위의 안개를 뚫고 지나가 호숫가의 푸른 석벽으로 향했는데, 그 아래에는 사람만 한 동굴이 칠흑처럼 검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심협의 눈이 가늘게 변하며 번득였다.
“요망한 것! 도망칠 생각은 마라!”
이어서 그가 손목을 돌리며 돌연 일장(一掌)을 뻗었다. 그러자 법력이 뿜어져 나오면서 어수지술(御水之術)의 극치를 내보였다.
순식간에 성난 파도가 일더니 높이가 10장에 이르는 파도가 맹렬하게 미인사를 뒤덮어갔다. 산이 무너지는 듯한, 가히 놀랄 만한 기세였다.
동시에 심협은 소뢰부 서너 장을 미리 꺼내 미리 준비해 두었다.
한편, 미인사는 이 놀라운 기세에 안색이 굳더니,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대신 꼬리로 수면에 물결을 일으키더니, 재빨리 방향을 틀어 다시 도망쳤다.
그런데 그때였다.
꽈르릉!
우렛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가느다란 세 줄기 하얀 번개가 찰나의 순간 번득이며 미인사에게 꽂혔다.
퍼펑!
“끼야악!”
폭발음과 비명에 이어 미인사의 몸에는 검게 탄 흔적이 세 군데나 생겨났다. 심한 부상은 아니었으나 일순 우뚝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우르릉! 쾅! 쾅!
요동치는 거대한 파도가 기습적으로 밀려와 미인사를 매섭게 두들겼다. 그러자 이 요괴는 마치 낙엽처럼 날아가 푸른 석벽에 거세게 부딪혀, 몸의 절반 이상이 처박혀버렸다.
방금 허물을 벗어 피부가 매우 연약해진 상태에서, 순식간에 여러 곳에 부상까지 입자 피가 치솟았다. 입가에도 핏줄기가 흘렀다. 이제 부상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미인사가 뭔가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은색 빛줄기가 번개처럼 다가오더니 이 요괴의 목을 따라 한 바퀴 휘감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거대한 뱀 머리가 굴러 떨어졌고, 잘린 목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거대한 몸뚱어리는 서서히 미끄러져 호수로 떨어졌고, 호수는 금세 피로 물들어갔다.
심협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답수결을 운공하였다. 그러자 몸이 서서히 떠올라 물 위에 서게 됐다.
사실 미인사의 경지는 심협보다 조금 더 높았다. 더구나 이제 막 벽곡기에 진입한 그의 수준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심협은 20개의 법맥을 응련해낸 상태였고, 반월환이라는 뛰어난 법기를 가지고 있었다.
심협의 옆에서 거대한 새우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물론 추두였다.
추두는 호수에 떠다니는 머리 없는 미인사의 시체와 심협을 몇 번이나 번갈아 보았는데, 어쩐지 눈빛이 복잡했다.
심협은 추두의 시선을 외면하며,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더니 푸른 석벽의 동굴로 걸음을 옮겼다.
동굴 입구에 다다른 그는 익숙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이에 그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진관보구나.”
심협은 나지막이 중얼거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동굴 입구로 다가가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보았다. 입구 근처에는 계단이 있었는데, 그 위에 쌓여 있는 백골들이 계속해서 물살에 휩쓸렸다.
“진관보, 안에 있느냐?”
심협이 다소 긴장한 듯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잠시 기다려도 어두컴컴한 동굴에서는 그의 목소리만 메아리쳤을 뿐,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심협은 잠시 망설이다가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미약한 빛에 의지한 채,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얼마 되지 않아 공간이 더욱 좁아지면서 심협은 허리를 숙인 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습하고 부패한 냄새는 갈수록 짙어져갔다. 그중에 섞인 진관보의 냄새가 점점 뚜렷해졌다.
동굴 곳곳에는 백골들이 있었는데, 인간의 것도, 짐승 요괴의 것도 있었다. 개중에는 상당히 오래된 듯 조금만 밟아도 부서져 버리는 것도 있었다.
더 깊이 들어가자 빛이 전혀 들지 않으면서 사방은 더욱 어두워졌다. 다행이라면 벽곡기에 진입하여 시력이 더욱 좋아진 상태였다.
그런데 어딘가를 주시하던 심협이 다소 놀란 듯하더니, 허리를 굽힌 채 빠른 걸음으로 50장 이상을 더 들어갔다. 그러자 눈앞에 지형이 탁 트였다. 또 하나의 동굴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매복해주시오.”
심협은 추두에게 그렇게 말한 후 사방을 살피며 새로 나타난 동굴로 들어섰다. 이 동굴은 두레가 10장이 채 되지 않았다. 벽에는 둘레가 1척 정도인 오목한 구멍들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인분(磷粉)이 잔뜩 묻어 있는 뼈들이 검푸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런 검푸른 빛이 비치는 가운데, 동굴 곳곳에 놓인 기이한 돌들의 모서리에서는 푸른 빛이 퍼졌다. 마치 저승의 귀신 굴처럼 오싹했다.
심협은 진관보의 행적은 발견할 수가 없자 의아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저 앞에 높이 쌓여 있는 풀 더미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있었다.
“진관보, 거기 있느냐?”
심협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자 풀 더미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더니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선 형?”
“그래, 형이다. 그러니 이제 두려워 말고 나와 보거라.”
심협은 안도하며 급히 말했다.
곧 풀 더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어린 소년의 두 손이 풀을 헤치고는 이내 자그마한 머리가 나타났다.
진관보는 여전히 준수했으나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심협은 곧장 달려가 진관보를 안고 나왔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몸을 살폈는데, 별다른 상처는 없었기에 다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진관보는 심협의 품에 안기자, 그간의 두려움과 긴장이 풀린 탓에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심협은 눈물과 콧물이 옷에 묻어나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저 아이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해 주었다.
“그래, 무서웠지? 이제 괜찮다. 울지 마.”
“형…… 저 요괴 앞에서는 울지 않았어요! 요괴가 나갈 때까지는…… 안 울었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다시는 영락 누나와 마 파파를 못 볼까 봐, 너무 무서웠어요. 흑흑.”
진관보는 흐느끼면서 두서없이 말했다.
“그래, 역시 용감하구나. 이제 집에 가자. 형이 데려다줄게.”
심협은 소매로 아이 얼굴의 눈물을 닦아주며 미소를 지었다.
진관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시울을 닦았다. 그러나 그때 심협 뒤로 동굴 입구에 서 있는 새우 머리 괴물을 발견하고는, 다시 심협의 품에 안겨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형, 저기…… 요…… 요괴예요. 또 요괴가……. 흑흑!”
“걱정 말거라. 저쪽은 나의 벗 추두란다. 함께 너를 구하러 온 거야.”
심협은 고개를 돌려 추두를 한번 보고는, 진관보의 등을 두드려 주며 말했다.
그 말에 진관보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리고 이내 조심스레 고개를 든 진관보는 다시 추두를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무서운지 다시 심협의 품에 안겼다. 그래도 더 이상 추두를 요괴라 부르거나 울지는 않았다.
“가자. 우선 여기를 벗어나자꾸나.”
심협은 진관보가 조금 진정되자 손을 끌며 말했다. 진관보는 심협 뒤에 숨어 따라나섰다.
그런데 그들이 동굴 입구에 이르렀을 때, 돌연 피비린내 나는 바람이 불어닥쳤다. 동시에 육안으로도 볼 수 있는 잿빛 기운이 동굴 밖에서부터 성난 파도처럼 들이쳤다.
“헉!”
우두커니 입구 앞에 서서, 심협과 진관보를 바라보고 있던 추두는 미처 방비할 틈도 없이, 그 기운에 쓸려 날아가더니 푸른 석벽에 매섭게 꽂혔다.
이를 본 심협은 반사적으로 잿빛 기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은 순식간에 배로 불어났고, 그의 몸에서 무형의 기운이 맹렬한 기세로 뿜어져 나와 잿빛 기운과 충돌했다.
퍼펑!
두 기운은 폭발하면서 각각 반대 방향으로 흩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