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납치된 진관보
한편, 마을의 높은 곳에서는 마 파파가 마치 고목 같은 모습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심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에서는 예전과 같은 냉정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부드러운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심협은 미소 지으며 사람들에게 몇 마디 화답했으나, 내심 낯이 간지러웠다.
“여러분, 심 대형은 지금 피곤하실 겁니다. 그러니 더 피곤하게 하지 마시고 이 요괴들의 시체를 옮깁시다. 이리 많은 고기가 생겼으니 당분간 양식이 부족하지는 않겠어요.”
영락이 다가오며 심협을 구해주었다.
그제야 사람들의 눈은 주변에 쓰러져 있는 원숭이 시신들로 향했다. 사람들은 잔뜩 흥분해 네댓 명이 한 조가 되어 잿빛 털의 원숭이 시신들을 하나씩 마을 안으로 옮겼다.
물론 원숭이 왕의 시체도 내버려두지 않았다. 다만 그 시체는 너무도 크고 무거워 10여 명이 힘을 합친 후에야 겨우 들 수 있었다.
사람들이 흩어지자, 심협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심 대형, 고작 십여 일 지났을 뿐인데 어찌 이리 강해지셨습니까?”
영락이 다가오더니 웃으며 물었다.
“어쩌다 보니 그리 되었소. 요 며칠 사이 수련에 진전이 있었던 게지요.”
심협은 대충 얼버무렸다.
“그 금빛 밧줄은 법기인 것 같습니다. 법기를 조종하신 것을 보니 심 대형은 벽곡기에 진입하신 것이겠지요?”
영락은 심협의 오른팔에 감겨 있는 밧줄을 힐끔 보고는 물었다.
심협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영락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연신 축하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을로 향했다.
마을에서는 전투가 끝난 것을 눈치챈 아녀자들과 아이들도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들은 20여 마리의 원숭이 시체를 보자 잔뜩 흥분했다.
심협은 다시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고 싶지 않아, 재빨리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사람들이 모두 마을 입구에 모인 터라 마을 안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저 앞에서 구부정한 사람이 휘청거리며 다가왔다. 마 파파였다.
심협은 마 파파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요괴들을 처단해주어 감사하오. 이 노인네가 도우께 범한 무례를 부디 용서해주시구려.”
마 파파가 돌연 심협에게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며 말했다.
“이러실 것 없습니다. 저도 이제 장수촌의 일원이니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이지요.”
마 파파의 태도가 갑작스레 변하자, 심협은 당황해 걸음을 멈추고 예를 갖추어 화답했다.
“심 도우는 고작 보름 만에 벽곡기 진입의 난관을 극복했으니 실로 보기 드문 천부적 자질이외다.”
마 파파가 모처럼 미소 지으며 이야기했다.
“과찬이십니다. 제게 무슨 천부적 자질이 있겠습니까.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
심협은 공경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때…….
“마 파파, 심 대형!”
저 뒤에서 영락의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급히 다가온 영락이 심협을 한번 보더니 다소 긴장한 얼굴로 마 파파에게 인사를 건넸다.
“영락아, 걱정 말거라. 내 아직 노망이 들지는 않았단다. 심 도우에게는 마을을 구해주어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 것뿐이란다.”
마 파파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고, 그제야 영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누군가가 저 앞에서 세 사람을 불렀다.
“마 파파, 영 선사, 심 선사!”
세 사람이 고개를 돌려 보니 한 중년 부인이 마치 울 것 같은 얼굴로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난 아주머니, 무슨 일 생겼나요?”
영락이 급히 맞이하며 말했다.
“큰일 났어요. 영 선사, 심 선사. 어서 가보세요! 진관보가…… 요괴에게 잡혀갔어요!”
“진관보!”
심협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디서 온 무슨 요괴에게 잡혀갔다는 게냐?”
영락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묻기도 전에 옆에 있던 마 파파가 먼저 물었다.
“그게…… 심 선사의 거처에서…….”
난 아주머니는 심협을 한번 보더니 한숨을 내쉬고서야 말했다.
그 순간, 심협 또한 표정이 차게 굳더니 쏜살같이 달려 나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난 아주머니, 마 파파를 보살펴 주세요.”
영락은 중년 부인에게 분부하고는 바로 심협을 따라갔다.
심협은 매우 고강해진 추풍보를 시전해 금세 자신의 거처에 이르렀다.
일촌금(一寸金)이 대문 밖에 서 있었다. 조그만 얼굴은 창백했고, 쉴 새 없이 떨고 있었다. 옆에는 잿빛 옷을 입은 서른 살 전후의 아녀자가 있었는데, 일촌금은 그녀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잿빛 옷의 부인은 반쯤 쪼그린 채, 일촌금을 품에 안고 아이를 위로했다.
“심 선사!”
심협이 갑자기 나타나자 부인은 크게 놀랐다가 그를 제대로 보고 나서야 급히 예를 갖추었다.
“방금 진관보가 무엇에게 잡혀갔는지 보셨소?”
심협은 인사를 건넬 틈도 없이 다급하게 물었다.
“저도 방금 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난 아주머니가 진관보가 요괴에게 잡혀갔다고 하고는, 저더러 여기서 이 아이를 돌봐주라 하더니 마을 입구 방향으로 갔어요.”
잿빛 옷의 부인은 심협을 매우 경외하는지 고개를 숙인 채, 감히 눈도 맞추지 못하고 말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촌금을 잠시 바라봤다. 그러나 대문 안을 살피면서도 함부로 들어서지는 않았다.
대문 안은 모든 것이 평소와 다를 것 없었다. 집의 문과 창, 벽 등 어디에도 부서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촌금, 무서워하지 말고, 진관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 오라비에게 말해주겠느냐?”
심협은 일촌금에게 다가가 쪼그려 앉더니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촌금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잿빛 옷을 입은 부인의 품속에 머리를 파묻고는 고개를 들지도 않았고, 심협의 물음에도 답하지 않았다.
심협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손가락을 굽혀 일촌금의 등과 정수리를 몇 차례 점혈하고는 법력을 심맥(心脈)으로 주입하였다.
일촌금은 떨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눈빛을 보니 많이 안정된 듯했다.
“일촌금, 착하지? 방금 무엇을 보았는지 내게 말해주렴. 네가 말을 해주어야 진관보 오라버니를 구해줄 수 있단다.”
심협이 온화하게 말했다.
일촌금은 진관보를 구한다는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선사 오라버니가 가시고 나서 저희는 이 집에 숨어 있었어요. 조금 지나니까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어요. 착, 착 하는 소리였는데…… 점점 더 커지더니…… 그러고는…… 그러고는…… 갑자기 추워졌어요.”
여기까지 말한 일촌금은 다시 가볍게 떨며 손으로 양팔을 감쌌다.
“무서워하지 말거라. 내가 여기 있지 않느냐. 자, 그 후에 어찌 되었느냐?”
심협은 일촌금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다시 법력을 주입했다.
“너무 무서워요. 진관보 오라버니가 저더러 침상 아래에 숨어 있으라고 했어요. 저를 지켜주겠다고, 나가 보겠다고……. 오라버니가 밖으로 막 나가더니 갑자기 막 비명을 질렀는데…… 그러고서는 아무 소리도 안 들렸어요.”
일촌금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계속 말했다.
“그럼 너는 어떻게 나온 것이니?”
심협이 최대한 따스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제가 무서워서 막 크게 소리 질렀는데…… 그때 난 아주머니가 들어오셔서 저를 데리고 나왔어요.”
일촌금은 아직 두려운 눈으로 열려 있는 대문을 보고는 말했다.
“들어오지 말고 거기 계시오.”
심협이 일어나 옷깃을 털며 잿빛 옷의 부인에게 이야기했다.
그 부인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촌금을 데리고 더 멀리 물러났다.
심협은 대문 안으로 들어서며 암암리에 법력을 운공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했다. 이어서 자세히 주변을 살피던 그의 눈빛이 순간 굳어졌다.
밖에서는 잘 느끼지 못했는데, 대문을 들어서자 아주 옅은 요기(妖氣)와 비린내가 느껴졌다. 절대로 인간 수사의 냄새는 아니었다.
심협은 집안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지만, 요괴가 숨은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이미 이곳을 떠난 듯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비린내는 집 안에서만 희미하게 느껴질 뿐, 집 밖으로 나간 흔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상하구나. 설마 이 요괴가 진관보를 잡아 그대로 사라졌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치맛자락이 휘날리는 듯한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영락이 도착한 것이다.
“심 대형, 뭔가 발견하셨습니까?”
영락은 대문을 들어서며 다급히 물었다.
“아직 찾지 못했소. 이곳에 분명 요기가 남아 있는데, 요괴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모르겠소.”
심협은 고개를 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비둔술(飛遁術)로 떠난 건 아닐까요?”
영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그건 아닐 거요. 요괴의 비린내가 집 안에만 흩날리고 있소. 비둔술로 떠났다면 분명 흔적을 남겼을 게요.”
“비린내가 나나요? 어찌 아무 냄새도 안 나는 것 같은데…….”
영락은 사방을 둘러보며 코를 킁킁거리더니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내 오감이 좀 예민하오.”
비린내는 매우 옅었지만, 심협은 이미 벽곡기에 진입하여, 오감이 더욱 발달했기에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심협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요괴는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돌연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마 파파와 난 아주머니가 도착했다. 두 사람 뒤에서는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는데,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따라온 것이다.
마 파파는 난 아주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섰다. 마을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따라 들어오지는 않고 집 밖을 에워쌌다.
“두 사람, 요괴의 실마리를 찾았소?”
마 파파는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아직 못 찾았어요. 하지만 조급해하지 말아요, 마 파파. 꼭 찾아낼게요.”
영락은 마 파파에게 다가가 부축하며 위로하듯 말했다.
그리고 그 사이, 심협은 난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일촌금에게 듣기로는 진관보가 잡혀간 후에 바로 오셨다고 하던데, 그 요괴의 종적을 보셨습니까?”
“아니요. 요괴가 마을을 습격했을 때 도우려고 마을 입구로 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여기를 지나다가 아이 비명 소리를 듣고 들어왔습니다. 일촌금만 있었을 뿐, 진관보와 요괴는 전혀 보지 못했어요.”
난 아주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요괴가 둔갑술 같은 걸로 그대로 땅을 뚫고 떠날 수도 있을까요?”
영락이 무언가 떠오른 듯 물었다.
“그건 불가능하다. 그런 지둔(地遁) 술법은 땅에 흔적이 남는다.”
영락의 질문에 마 파파가 대답해주고 있을 때, 심협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알겠소!”
이어서 심협은 곧장 우물가로 다가가 허리를 숙이더니, 손가락으로 우물 옆 바닥을 쓸어보고는 냄새를 맡았다. 그러고는 다시 일어나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영락은 난 아주머니와 함께 마 파파를 부축해 심협을 따라갔다.
그들은 함께 우물 안을 들여다봤다. 깊은 우물은 다른 세계로 향하는 커다란 입처럼, 그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심 선사 생각은 그 요괴가 진관보를 잡아 이 우물로 도망쳤다는 게요?”
마 파파가 물었다.
난 아주머니는 마치 우물 안에서 요괴가 튀어나와 끌고 들어갈까 두려운 듯, 거의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야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을 수 있지요. 내 일찍이 서적에서 보기를, 어떤 요괴들은 어린아이를 이용해 수련에 도움을 받는다 들었소. 그러나 아이가 살아 있어야 한다 했으니, 그게 사실이라면 진관보는 당분간 안전할 게요.”
심협이 천천히 말했다.
“그런 이야기가 있기는 하지.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소? 정말로 그런 거라면 관보를 찾을 수가 없을 텐데……. 아이고, 우리 관보 불쌍해서 어쩌나.”
마 파파는 길게 탄식했다.
“맞아, 요괴가 우물 안에 숨었다면 찾을 수도 없겠지.”
“보아하니 진관보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겠어.”
“아이고, 관보 이 녀석…… 걸음마도 하기 전부터 자라는 것을 지켜봤는데…… 그 똘똘하고 의젓한 아이가 어쩌다가…….”
마을 사람들이 한 마디씩 쏟아냈다.
“내 내려가 보겠소.”
심협이 돌연 그렇게 말을 하자, 마 파파와 영락은 물론 모든 마을 사람들이 눈을 끔뻑였다. 그들이 심협을 보는 눈빛은 이전과 달라져 있었는데, 특히 마 파파는 아주 조금 남아 있던 냉랭한 기색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그 요괴가 얼마나 강력할지 모르니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낫겠죠.”
영락이 바로 말했으나, 심협이 곧장 고개를 저었다.
“영락 낭자는 피수(避水)의 법술을 시전하지 못하니 물속에서 오래 있지 못할 게요. 게다가 영락 낭자는 마을을 보살펴야 하지 않소? 어쩌면 다른 요괴들이 올지도 모를 일이니 이곳을 지키시오.”
“하지만 혼자 내려가시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영락이 급히 말했다.
“걱정 마시오. 내 내려가서 한번 살펴보고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올라올 게요. 게다가 내게는 스스로를 보호할 방법이 있소.”
심협의 흔들림 없는 목소리에 영락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