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93화 (93/1,214)
  • 93화. 광표(狂豹)

    영락은 청우라는 마을 청년에게 마을을 잘 지켜줄 것을 부탁한 후, 이번에는 마 파파를 찾아가 무언가 당부한 후에야 출발했다.

    방촌산은 장수촌 바로 뒤에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거리가 꽤 있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사람이 왕래하지 않아서인지 산길은 무성한 잡초와 관목(灌木)들에 가려져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심협과 영락은 한 시진이나 걸려서야 겨우 산기슭에 이를 수 있었다. 그리고 산기슭에 이르러서야 심협은 왜 영락이 고집을 부렸는지 알게 됐다. 방촌산은 수백 장 높이의 산 벽만 보일 뿐 길은 전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락은 일전에 마을의 노인들이 이야기해준 지형의 특징들을 떠올려, 불쑥 튀어나온 거대한 산석(山石)을 찾아냈다. 그 아래에는 숨겨진 동굴이 있었는데, 내부는 비스듬히 위로 경사가 져 있었다.

    두 사람은 동굴을 통해 수백 장을 지나 방촌산 뒤쪽의 산 벽에 난 동굴 입구로 나왔다. 그리고 다시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따라 2, 3리를 더 걷자 조금 넓은 산길이 나타났다. 이 길이야말로 진정 산을 오르는 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낭자 말이 맞았소. 낭자가 길을 안내해 주지 않았더라면 내 온종일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맸을 게요.”

    심협은 사방에 빽빽한 늙은 나무들을 보며 웃었다.

    “마을에 방촌산의 신선에 대한 전설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중에는 길 안내하는 나비 이야기와 나무꾼 이야기도 있지요.”

    “길 안내하는 나비? 그건 무슨 이야기요?”

    “이야기를 해드리지요. 한 사람이 다른 대륙에서 바다를 건너와 방촌산 문하에서 수련을 하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산 아래에서 길을 잃고 입구를 찾지 못해 3년이나 헤맸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지요. 결국 이를 지켜보던 산 위의 신선께서 감동하시어 길 안내하는 나비를 보내 그 사람을 안내하게 했고, 그제야 그는 산을 올라 산문을 찾았다는 이야기지요.”

    영락은 웃으며 간략하게 이야기를 마쳤다.

    “혹시 3년간 헤매며 문을 찾지 못한 것은 신선께서 그를 시험한 게 아니오?”

    심협 또한 웃으며 물었다.

    “아버지께서 처음 이야기를 들려주셨을 때는 저도 그리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어렸을 때 곤란한 일이 생기면 신선께서 나를 시험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곤 했지요.”

    영락은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에서는 얼핏 슬픔이 느껴졌다.

    “그럼 나무꾼 이야기는 무엇이오?”

    심협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이 이야기는 더욱 기이하답니다. 옛날에…….”

    영락은 이야기를 시작했으나, 끝까지 이어가지는 못했다.

    그녀만이 아니라 심협 또한 잔뜩 긴장한 채 우뚝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수십 장 앞의 거대한 바위 위에 아무런 기척도 없이 황색 그림자가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엄한 요기(妖氣)가 앞에서 뻗어오면서 심협과 영락은 얼음굴에 들어간 것 같은 서늘함을 느꼈다. 요동치는 심장 소리만이 귓가에 울렸다.

    ‘엄청난 요기로구나!’

    심협은 바위 위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춘추관의 응혼기 사숙조에게서도 받지 못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몸길이가 2장에 이르는 표범이었다. 균형 잡힌 길쭉한 금황색 몸뚱이 위를 흑갈색 무늬가 가로질렀다. 맷돌만 한 머리에는 좁고 긴 금빛 눈알이 박혀 있었고, 몸 뒤로 거의 1장에 이르는 꼬리가 제멋대로 흔들렸다.

    심협보다 수련이 낮은 영락은 이 강대한 요기에 휩싸이자 가늘게 몸을 떨었고, 거의 숨도 쉬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굴복하지 않고 번득였고, 두 다리를 꼿꼿이 세워 몸을 곧게 펴고 섰다.

    “어린 인간 둘이 감히 이 광표(狂豹)의 구역에 들어오다니. 담도 크구나.”

    금색 표범은 마치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두 사람을 깔보며 인간의 언어로 말했다.

    “선배님, 저희는 고의로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이 낭자는 오랫동안 산 아래에 살았고, 저는 우연히 이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산 아래에서 나갈 길을 찾지 못하여 경솔하게 이곳에 들어왔으니 부디 선배님께서 양해해 주십시오.”

    심협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는 포권하며 말했다. 그의 말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심협이 침착하게 대응하니 함께 있던 영락도 조금은 편안해진 것 같았다. 그녀의 앳되고 고운 뺨이 약간 혈색을 되찾았다.

    “너는 외지에서 왔느냐?”

    심드렁하던 광표가 호기심이 어린 거대한 금빛 눈으로 심협을 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심협은 잠시 생각에 잠겼으나, 사실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은연중에 광표의 반응이 뭔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너는 안개를 뚫고 왔단 말이냐?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

    광표는 앞발을 한 걸음 내디뎠는데, 날카로운 발톱에 찍힌 돌들이 두부처럼 잘려나갔다.

    “실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남첨부주 사람입니다. 실수로 어느 은밀한 구역의 금제에 접촉했는데, 영문을 알 수 없게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심협은 거짓과 진실을 적당히 섞어 답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다.

    “남첨부주에서 단번에 서우하주까지 왔다고? 이놈! 거짓말도 적당히 하거라! 그따위 얕은 수로 나를 속이려 들다니. 그래놓고 네놈들을 보내달라고? 역시 인간들은 교활하군!”

    광표의 눈에 어린 호기심이 사라졌고 목소리는 더욱 냉정해졌다. 이어서 몸에서는 돌연 놀랄 만한 기세가 폭발하더니 높은 곳에서부터 내려와 심협과 영락을 뒤덮었다.

    영락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무릎을 꿇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저항하려 했다. 그러나 몸을 몇 차례 떨고는 눈을 뒤집으며 그대로 쓰러져 혼절했다.

    심협은 가슴팍을 무거운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한 느낌에 거의 피를 토할 뻔했다. 사지는 마치 천 근 바위에 짓눌린 것처럼 답답했고,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전신 뼈가 삐걱거렸고, 이대로 눌려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때, 체내에서 돌연 무명공법의 구결에 따라 저절로 운공이 되기 시작했고, 알 수 없는 기운이 솟아났다. 그러자 몸의 압력이 점점 줄어들면서 손발이 자유로워졌다.

    “엇!”

    광표는 뜻밖의 상황에 놀라 짧게 감탄사를 토해냈다. 감정이 동요한 탓인지 그가 발산하는 위압에도 틈이 생겼다.

    심협은 그 틈에 재빨리 영락을 왼팔에 안고는 번개처럼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도망쳤다.

    “재미있구나! 고작 연기기에 불과한 어린놈이 감히 내 앞에서 수작을 부리다니. 내 오늘 너를 유흥거리로 삼아주마!”

    광표는 심협의 도주를 저지하기는커녕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바위 위에서 뛰어내렸다. 이어서 다소 느긋해 보이는 동작으로 움직였는데,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일고여덟 장씩 나아가 너무도 쉽게 심협을 따라잡았다.

    광표는 열심히 도망치는 심협을 향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 같은 표정으로 입을 벌려 무언가를 뱉어냈다. 그러자 금색 빛줄기가 나타나 심협의 왼편 바닥을 두들겼다.

    펑!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고, 땅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 무수한 돌 파편이 흩날렸다. 그중 하나가 스치면서 심협의 뺨에는 긴 상처가 생겨났다. 그러나 심협은 피를 닦을 틈도 없이 방향을 조금 틀어 계속 달렸다.

    “하하하, 더 빨리 달려 보거라! 너무 느리지 않느냐!”

    광표는 신이 난 듯 웃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금색 빛줄기가 또 발사되어 이번에는 심협의 오른편 지면을 두들겼다. 심협은 어쩔 수 없이 또 방향을 트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솔직히 죽을 맛이었다. 저 광표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강하니 마음만 먹는다면 단번에 자신을 맞혀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광표는 분명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도마 위의 생선과 다를 바 없는 그로서는 화를 내기는커녕 반항할 여지도 없었다.

    거대한 폭발음이 연이어 울리고 땅이 진동하자 영락의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그녀는 자신이 심협의 팔에 안겨 있다는 것을 알고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가 곧장 상황을 파악하고는 몸부림치며 외쳤다.

    “심 대형, 저는 상관하지 말고 도망치세요!”

    하지만 심협은 팔에 더욱 힘을 주어 그녀를 붙잡았다.

    “움직이지 마시오!”

    이어서 그는 방향을 틀어 나무가 빽빽한 숲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광표는 여전히 재미있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따라갔다. 그러면서 틈틈이 금색 빛줄기를 뱉어냈다.

    강력한 생존 본능이 잠재력을 깨워낸 것일까? 심협은 그 짧은 시간에 추풍보(追風步, 바람을 따라잡는 듯한 빠른 걸음)를 밟았고, 그간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순식간에 깨달으면서 점점 빨라졌다. 그리고 어느덧 정말 바람을 따라잡는 것 같은 속도로 내달리면서 양옆의 나무들이 빠르게 지나쳐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돌연 시야가 탁 트였다. 일고여덟 장 앞으로 낭떠러지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 건너편으로 10여 장 앞에는 우뚝 솟은 산봉우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산봉우리에는 폭포가 깊은 계곡 아래로 떨어지면서 새하얀 물보라를 일으켰고, 우렛소리처럼 포효했다.

    “꼭 잡으시오!”

    심협은 영락에게 나지막이 말하더니, 낭떠러지 끝의 폭포 계곡으로 뛰어내렸다.

    이 갑작스런 상황에 영락은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애써 참고는 두 손으로 심협의 옷을 꼭 쥐었다.

    뒤에서는 광표의 득의양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매우 즐거운 듯했다.

    공중에 뜬 심협은 오른손을 뻗었다. 그러자 맞은편 폭포에서 물 한 줄기가 모여 기다란 물 밧줄이 되었다. 물 밧줄의 한쪽 끝은 폭포의 튀어나온 돌에 감겼고, 다른 한쪽은 심협에게로 다가왔다.

    심협은 물 밧줄을 잡고 힘을 주었다. 그러자 견고하지 못한 밧줄이 곧장 끊어져버렸다. 하지만 그 사이 두 사람은 맞은편 산봉우리 쪽으로 떨어져내렸다.

    뒤에서 쫓아오던 광표는 심협이 이런 수를 쓸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분노로 두 눈이 광복하게 번득였다. 그리고 네 발 아래에서 팍 하는 소리가 울리며 금빛 구름이 나타나 광표의 몸을 싣고 날았다. 동시에 입에서는 금색 빛이 번득였는데, 그전보다 훨씬 더 짙은 것이 이제 두 사람을 죽이려는 것 같았다.

    30여 장을 추락한 심협과 영락은 맞은편 폭포까지 3장도 채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심협은 광표가 심상치 않은 공격을 해오려는 것을 알아채고는 영락부터 폭포 안으로 던져놓고 자신도 후퇴하기로 했다. 위험하긴 해도, 둘 다 광표의 금색 빛에 맞아 죽는 것보다야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막 행동에 나서려는 순간!

    “꺄아아악!”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폭포 위에서 전해져 왔다!

    이어서 푸른 그림자가 맞은편 산봉우리에서 급강하해왔는데, 머리에 금빛 털이 거대한 푸른 매였다. 활짝 편 두 날개의 너비는 족히 몇 장에 달했고, 몸 아래에는 마치 낫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번득였다. 그 거대한 몸에서는 엄청난 위압감이 발산됐는데, 결코 광표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날개 아래로는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었다.

    거대한 매가 등장한 그 순간, 광표는 입안에서 요동치던 금색 빛을 거두고는 추격을 멈췄다.

    광표가 내뿜던 위압감은 줄어들었지만, 심협과 영락은 매의 날개에서 일어난 소용돌이에 날려갔다.

    심협은 급히 손을 다시 들어 초식을 펼쳤다. 그러자 맞은편 폭포에서 물 밧줄이 나타나 그의 몸을 감쌌다. 하지만 이번에도 물 밧줄은 끊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그 틈에 두 사람은 더 이상 소용돌이에서 밀려나지 않고 거의 폭포 가까운 곳으로 떨어졌다.

    풍덩!

    두 사람은 폭포에서 하얗게 일어난 물보라에 빠졌다.

    “광표! 감히 내 구역을 침입하다니! 어서 네 구역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거대한 매는 매섭고 차가운 눈빛으로 광표를 노려보았다.

    “창응(蒼鷹), 이 낭떠러지는 경계가 아니더냐? 게다가 나의 흥을 깨뜨리고 그렇게 예의 없이 말하다니, 이제 살기가 귀찮은 것이냐?”

    광표는 심협과 영락이 추락한 곳을 힐끗 훑어보더니 시선을 거두어 맞은편의 거대한 매를 노려보았다. 그의 금빛 눈동자에서는 금빛 화염이 일었는데, 매의 말에 격분한 것이 분명했다.

    “왜? 아니꼽냐? 그럼 다시 한 번 붙어보던가!”

    창응은 날카로운 소리로 울더니 돌연 모호한 푸른 그림자로 변해 순식간에 광표 앞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두 개의 푸른 발톱으로 광표를 잡아채려 했다.

    광표도 하늘을 향해 한차례 포효하더니 몸에 금색 빛을 일으켜 매의 공격을 받아냈다.

    우르릉! 쾅! 쾅!

    푸른 빛과 금색 빛이 강렬하게 부딪치며 대기가 요동쳤고, 광풍(狂風)이 일었다. 산봉우리들마저 조금 흔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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