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92화 (92/1,214)
  • 92화. 길을 찾아 나서다

    심협은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돌이켜보며 그들의 절망과 무감각한 표정을 떠올렸다. 문득 눈앞의 이 소녀는 실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선의의 거짓말이라 할 수 있겠지. 허나 오래가지는 못할 거요.”

    심협이 안타까운 듯 탄식했다.

    “희망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 절망 속에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지요. 어쨌든 저의 거짓말을 들춰내지 않고 넘어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일은 괘념치 마시오. 그런데 내 궁금한 것이 있소. 이 마을에 낭자 외에는 수선자가 없는 것 같은데…… 어째서요?”

    심협의 물음에 영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는 한 명 더 있었지요. 그러나 단전에 부상을 입고 법력을 잃어 지금은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게 됐습니다.”

    “음…… 혹시 아이들을 데리고 있던 백발의 노부인이오?”

    심협이 잠시 생각해 보다가 다시 묻자 영락은 의아한 듯 눈을 동그렇게 떴다.

    “어찌 아셨습니까?”

    “내가 방촌산 수사라는 말에도 노부인의 눈빛만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소.”

    심협은 그 노파의 눈빛을 떠올리며 이리 말했다.

    “심 대형은 그 일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마 파파(馬 婆婆)는 성격이 조금 괴팍해 평소에도 그 아이들 외에 마을 사람들과는 거의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영락이 급히 말했다.

    “그 아이들은……?”

    심협은 무언가를 더 물으려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모두 마을의 고아들입니다. 부모가 모두 죽고 나서 줄곧 마 파파가 거두어 보살피고 있지요.”

    영락은 깊게 탄식했다.

    “그런데 장수촌에 방촌산의 제자가 꽤 있었다고 했는데, 아무리 시간이 흘렀고 그 제자들의 수명이 다했다고는 해도 마을에 전승된 게 있었을 것 아니오?”

    심협은 고아가 된 아이들 이야기에 영락의 표정이 슬픔에 잠기는 것을 보고는 화제를 돌렸다.

    “방촌산 제자들은 나가는 길을 찾으려다가 돌아가시거나 구조를 요청하러 산에 오르다가 돌아가시고 몇 분 남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남은 분들도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셨지요. 그분들이 제자를 거두긴 했지요. 그 제자들도 또 제자를 거두었고요. 하지만 이들의 수명은 더욱 짧아 심지어 방촌산 제자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기도 했어요. 그리고 몇 년 전 요괴들이 습격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남은 수선자라고는 저와 마 파파뿐이었습니다.”

    심협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수행의 어려움을 몸소 깨달은 바 있지 않은가. 춘추관과 같은 전승 체계가 있는 종파도 제자들이 모두 통법성을 이루리라 보장할 수 없으니 이리 빈곤하고 작은 산촌에서는 더욱 그러할 터. 그러니 수선자의 전승자들도 점점 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심협은 마을에 갇혀 어쩔 수 없이 생을 마친 수선자들과 점점 더 힘겨워져 갔을 마을의 상황을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그런데 그 요괴들이 예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몇 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단 말이오?”

    심협이 다시 물었다.

    “아마 4년 전부터였을 겁니다. 마을에 갑자기 역병이 돌아 많은 아이들이 감염되었지요. 마을 사람들 몇몇은 약초를 구하기 위해 제 조상님의 당부를 어기고 방촌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산 위에 있던 난폭한 짐승들이 영지가 깨인 것인지, 산에 오른 마을 사람들을 모두 잡아먹었습니다. 이후 짐승들이 더욱 흉포해져 마을까지 내려와 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지요.”

    영락의 말에 심협은 혀를 찼다.

    “애초에 요괴들은 피를 맛보기 전에는 그래도 본성이 남아 있지만, 한번 피 맛을 본 후로는 피를 찾아다니게 되고, 결국은 죽어야만 끝이 난다고 하오.”

    “그때 이후 저희는 수시로 습격해오는 요괴들에 맞서기 위해 마을에 울타리를 치고 방어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마을에 남은 부적과 부기는 다 떨어졌고, 마 파파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전사자도 점점 많아졌고요. 더구나 요괴들은 점점 자주 내려오고 있어요. 심 대형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 이번에야말로 저희는 버틸 수 없었을 겁니다.”

    영락은 다시 한번 감격한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이것도 다 인연이 아니겠소? 내가 이곳에 온 것도 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모르오.”

    “심 대형, 우리 마을의 상황은 대략 이러합니다. 앞으로 대형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요?”

    영락은 조금 머뭇거리며 물었다.

    “내 오래 머무를 수는 없소. 나갈 길을 찾는다면 바로 떠날 것이오.”

    심협이 말했다.

    “이번에 그 짐승들을 물리친 것은 당장 급한 불을 끈 것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나갈 길을 찾지 못한다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겠지요. 심 대형께서 이곳에 들어오셨으니, 분명 나갈 길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감히 부탁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저희에게 여기서 나갈 갈을 찾아주십시오.”

    영락은 혹시라도 중간에 심협이 말을 자를까 우려하는 듯 급히 말했다.

    하지만 심협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심사숙고했다.

    장수촌의 상황에 동정심이 들기는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안개를 뚫고 나갈 수 없다면 자신 또한 이곳에 갇히게 되는 것 아닌가! 이전의 기이한 꿈들에서도 어떻게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 있었는지 파악하지 못했으니 어쩌면 영원히 갇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생겨난 것이다.

    “심 대형께서 혹시 어려우시다면…….”

    영락은 심협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에 그녀가 뭔가 오해를 했음을 눈치챈 심협이 재빨리 답했다.

    “내 시도는 해보겠소. 허나 가능할지는 확신하기가 어렵구려.”

    “심 대형께서 승낙해주신 것만으로도 우리 마을에 큰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영락은 심협에게 절을 했다.

    심협은 황급히 영락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렇게 합시다. 내 오늘 밤은 장수촌에서 쉬고 내일 아침에 나가 길을 찾아보겠소.”

    “심 대형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영락의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아, 그리고 마을에 부적용 종이가 있소?”

    심협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수십 년 전부터 장수촌에는 부적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적용 종이가 조금 있기는 할 텐데,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제가 가서 찾아볼 테니 잠시 기다려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영락은 급히 문을 나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먼지가 가득 쌓인 상자를 안고 돌아와 심협에게 건넸다.

    상자 안의 부적용 종이는 좀먹어 크게 망가진 상태였다. 아쉬운 대로 쓸 수 있는 것만 추려보니 10여 장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상자에 같이 들어 있던 주사 한 병은 나름 잘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심협은 부적을 쓰기 시작했다. 현실에서 부적을 쓸 때보다 훨씬 순조로웠다. 거의 모든 부적을 쓸 때 정, 기, 신이 충분했다.

    “부적을 어찌 사용하는지 알고 있소?”

    심협은 그중에 소뢰부 세 장을 영락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법력을 주입하면 되는 것이지요? 맞습니까?”

    영락은 심협이 부적을 쓸 줄 안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다가 말했다.

    “맞소.”

    심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새벽, 심협은 영락에게만 이야기하고 마을을 떠나 안개가 뒤덮인 곳으로 향했다. 일부러 산비탈을 피해 산간의 평지를 따라 다른 방향으로 길을 찾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몇 리를 더 가자 안개가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심협은 조심스레 안개로 들어갔다. 산간 평지의 푹 꺼진 곳에서부터 광활하고 평평한 곳까지 가는 동안 길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안개만이 점점 짙어져 마치 형태를 갖춘 사물처럼 보일 정도였다.

    다시 조금 더 가다 보니 몇 장 앞에 확연하게 짙은 안개가 모여 있었다. 그 안개는 거의 움직이지도 않는 것이 마치 짙은 안개가 모여 하얀 벽을 이룬 것 같았다.

    심협은 잠시 망설였으나, 결국 들어가 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 안개 안에 들어서니 숨을 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코와 목구멍이 불편할 정도였다. 꾹 참고 열 걸음을 좀 넘게 들어가자 더욱 숨이 막혔다.

    “고약한 안개로군.”

    어쩔 수 없이 그 짙은 안개 밖으로 나오자 다시 호흡이 편안해졌다.

    심협의 눈은 마치 벽을 이룬 듯한 그 안개를 따라갔다. 안개는 실제로 높은 벽처럼 쭉 펼쳐져 있었는데, 그 끝은 보이지도 않았다.

    * * *

    벌써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심협은 안개 벽을 따라 왼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한 시진을 넘게 걸어도 안개 벽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도중에 몇 번이나 안개 벽 안으로 들어가 보았지만, 매번 견디기 힘들 정도로 숨이 막혀 이내 다시 나와야만 했다.

    그런데 한참을 걷다 보니 지세가 점점 높아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산을 오르는 비탈길에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한 시진을 더 걸어도 여전히 안개 밖으로 나갈 길을 찾지 못하자 심협은 이제 그만 포기하고 장수촌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그때, 발에 무언가 밟혔고, 발밑에서 갑자기 칵 하는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숙여 보니 뼈만 남은 시신이 보였다. 화들짝 놀란 심협이 100여 걸음을 더 걷자 저 앞으로 안개가 많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너머로 펼쳐진 광경에 심협은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반경 수십 장의 바닥에는 사람과 짐승의 백골이 빽빽이 깔려 있었다.

    심협은 이 익숙한 장면에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망설이다가, 백골들 사이로 걷기 시작했다.

    한동안 걷다 보니 지름 10여 장의 구멍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안은 칠흑처럼 검었다. 바로 그가 도망쳐 들어온 하늘의 구멍이었다.

    “역시 이곳이었군. 다시 돌아왔어.”

    심협은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구멍의 가장자리로 가서 안을 잠시 들여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심협도 알고 있었다. 피안화의 보호 없이 다시 이곳으로 들어간다면 분명 몸이 가루가 될 것이다. 게다가 그곳에는 그 두려운 흑산노요가 있지 않은가!

    “여기로 다시 나가려면 수련이 응혼기에 이르러도 부족할 게야. 적어도 출규기는 되어야 가능하겠지.”

    나지막이 중얼거린 그는 다른 방향으로 길을 찾으러 갔다.

    * * *

    거의 정오가 되어서야 심협은 장수촌으로 돌아왔다. 결국 안개에서 나갈 길은 찾지 못한 채였다.

    영락은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있다가 심협이 무사히 돌아오자 매우 기뻐했다.

    심협은 영락에게 안개 속에서 보고 겪은 일들을 이야기했지만, 자신이 들어왔던 구멍에 대한 일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심 대형, 고생하셨습니다. 안개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면, 계속 요괴들과 맞설 계획을 세우면 됩니다.”

    영락은 다소 실망한 듯했지만, 그럼에도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개 속에는 나갈 길이 없는 듯하니 내 방촌산에 올라 길을 찾아보려 하오.”

    심협은 마을 뒤의 높은 산봉우리로 시선을 옮기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안 돼요! 그건 절대 안 돼요! 그곳은 너무 위험합니다!”

    영락은 고개를 마구 내저으며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낭자의 조상이 남겼다는 유언은 알고 있소. 허나 지금은 다른 길이 없지 않소? 어쩌면 저곳에는 살길이 있을지도 모르지. 저 아이들을 보시오. 낭자는 저 아이들이 계속 두려움에 떨며 갇혀 지내도 괜찮겠소?”

    심협은 이런 절망 속에서도 웃으며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영락도 아이들에게로 시선을 옮기더니 이내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좋습니다. 허나 정말 산에 오르시려거든 반드시 저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

    생각을 정리한 영락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나 혼자 가는 게 나을 게요. 낭자는 마을을 살펴야 하지 않소? 게다가 낭자의 부상도 아직 다 낫지 않았을 거고…….”

    심협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심 대형, 저는 감정적으로 결정한 게 아니에요. 제가 길을 안내하지 않는다면 대형은 산을 오르는 길을 찾기도 어려울 겁니다.”

    “길을 찾기도 어렵다니, 어째서요?”

    심협은 의아한 듯 물었다.

    “방촌산은 산세가 험하고, 산을 오르는 길은 대부분 숨겨져 있습니다. 제가 길을 안내하지 않는다면 대형은 산 입구를 찾는 데도 한참 고생하셔야 할걸요?”

    “하지만 낭자마저 없으면 마을은……?”

    심협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대형께서 어제 요괴들을 처참히 물리치셨으니 한동안은 요괴들도 습격하지 않을 겁니다. 제 부상도 그리 심하지 않고요.”

    영락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 좋소. 낭자가 그리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허나 더는 지체할 수 없으니 바로 출발합시다.”

    영락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심협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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