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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91화 (91/1,214)

91화. 황량한 마을

소녀는 부상 부위를 간단히 동여맨 상태였다. 안색은 창백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밝게 빛나는 것이 마을의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도우 덕에 그 짐승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짐승들이 언제 다시 습격해올지 몰라요. 청우(靑牛) 대형, 사람들과 마을 문을 수리해주세요. 그리고…… 밖의 시신들도 수습해주시고요. 옥수 아주머니, 우리도 오랫동안 고기 구경을 못했으니 나씨 아주머니와 함께 저 새들로 요리를 해주세요. 남는 고기는 소금에 절여 두시고요.”

소녀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알겠네.”

방금 심협에게 질문했던 피부가 검은 사내가 대답했다.

“영락(英洛)아, 안심하거라. 우리에게 맡기렴.”

삼사십 대의 두 부인이 눈물을 훔치며 급히 대답했다.

영락이라 불린 소녀는 부상이 가볍지 않은 상황에서도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것도 억지 미소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온 미소였다.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동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절로 기운이 나는 미소이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영락의 말에 따라 울음을 그치고 각자 흩어져 엉망이 된 마을을 수습했다.

“도우께서는 저를 따라오시지요.”

영락은 고개를 돌려 심협을 보며 말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따라 걸었다.

“정말 방촌산(方寸山)의 신선이십니까?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왜 내 남편과 아들이 다 죽고 나서야 오신 거죠?”

영락과 심협이 가까이 오자 마을 문에 기대어 있던 초췌한 안색의 중년 부인이 돌연 질책하듯이 외쳤다.

우뚝 멈춰 선 심협은 자신은 방촌산 수사가 아니라고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영락이 몰래 눈짓하는 것을 보고는 그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 도우는 물론 방촌산에서 오신 분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위기의 순간에 우리를 구해줄 수 있었겠어요?”

영락이 중년 부인에게 말했다.

“정말 방촌산의 신선이었어!”

영락의 말을 들은 누군가가 바로 크게 외쳤다.

“정말 잘됐어! 정말 방촌산의 신선이셨어!”

“우리는 이제 살았어!”

다른 사람들도 기뻐하며 외쳤다.

심협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의아한 일 투성이였다. 자신이 방촌산의 수사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단 말인가? 뭐가 달라지는 것인가?

그때, 돌연 냉랭한 시선이 느껴졌다. 마을 문 안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아까 목숨을 걸고 아이들을 지키려던 백발 노파가 냉랭한 눈으로 심협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녀는 조금도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노파 곁에는 채 여덟에서 아홉 살쯤 된 아이들 10여 명이 모여 있었는데, 모두 두려운 듯이 머리만 내밀고 심협을 살폈다.

눈이 움푹 꺼진데다가 눈빛이 흐릿한 노파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불편했다.

영락도 심협의 시선을 따라 갔다. 심협은 노파의 시선이 영락에서 잠시 머문 것을 눈치챘다. 그 둘은 마치 눈빛을 교환하는 듯했다. 이어서 노파는 말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심협은 그제야 영락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눈앞의 광경은 황량함 그 자체였다. 집들은 무질서하고 빽빽하게 서 있었는데, 그나마도 마을 문에서 가까운 집들은 대부분 무너진 상태였다. 무너진 흙벽에는 검푸른 이끼들이 피어 있었고, 창살은 대부분 부서진 상태였다.

가볍게 바람이 불자 흙먼지가 휩쓸렸다. 초가집 지붕에 얼마 남지 않은 풀들도 바람에 같이 흩날려 허공으로 날아갔다.

심협은 손을 휘둘러 흙먼지를 헤치며 조심스레 영락을 따라갔다.

영락은 줄곧 아무 말도 없었다. 자연히 심협도 무슨 말을 하기가 힘들어 그저 마을을 힐끔거리며 살필 뿐이었다.

지나온 길가에 선 나무들 중 푸른빛을 간직한 것은 드물었다. 대부분은 이미 말라죽은 느릅나무였는데, 껍질은 다 벗겨져서 매끈한 나무 기둥만 남아 있었다. 그마저도 비틀려서 앙상한 나뭇가지들만 서 있는 모양새였다.

아까까지 비명과 울음으로 가득했던 마을은 어느덧 고요해졌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나지막한 바람 소리와 어디선가 간간이 들려오는 흐느낌뿐이었다. 듣고 있노라면 침울해지는 소리였다.

무너진 가옥을 돌아 계속 걷던 심협이 돌연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마르고 왜소한 그림자가 급히 한쪽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 보였다.

“진관보(陳關保)!”

누군가 따라오는 것을 눈치챈 영락이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곧 남루한 푸른 베옷을 입은 남자아이가 경계하는 표정으로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준수한 남자아이의 모습이 어쩐지 눈에 익다 싶었더니 아까 노파 옆에 서 있었던 아이였다.

“영락 누나.”

아이는 두 손을 몸 뒤로 숨긴 채 영락에게 다가갔다.

“진관보, 왜 따라왔니?”

영락이 나지막이 묻자 진관보는 고개를 들어 심협을 힐끔거렸다. 그러더니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용기를 내 말했다.

“신선 형, 저에게 법술을 가르쳐주세요! 저도 영락 누나처럼 요괴를 물리치고 마을을 지키고 싶어요!”

그 말에 약간 감동을 받은 심협은 진관보의 얼굴을 살폈다. 마르고 허약해 보였지만, 마을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눈빛이 굳세고 형형했다.

허나 쉽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곳에 머무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락은 심협이 머뭇거리자 진관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누나도 우리 관보가 용감하다는 거 잘 알아. 하지만 지금은 너무 어려서 법술을 배울 수가 없단다. 관보가 조금 더 크면 이야기하자꾸나.”

“영락 누나, 나 어리지 않아요! 저번에 요괴놈들이 쳐들어왔을 때도 내가 다른 아이들을 보호했다고요!”

진관보는 가슴을 펴고 큰소리를 쳤다.

“그래, 그래. 우리 관보 다 컸지. 그런데 누나가 신선 형이랑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지금은 돌아가렴. 네가 없어진 걸 알면 마 파파가 분명 화낼 거야.”

영락이 웃으며 슬쩍 노파의 이야기를 꺼내자 진관보는 바로 목을 움츠리고는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곧 다시 몸을 돌려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주름진 야생 과실을 건넸다.

이 모습을 본 심협은 의아했다. 진관보가 야생 과실을 건넨 상대는 영락이 아니라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나 주는 거니?”

심협이 물었다.

“신선 형, 영락 누나와 우리를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진관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심협이 과실을 받아들자 활짝 웃더니 뛰어갔다.

심협은 진관보의 작고 허약한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져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이 광경을 유심히 살피던 영락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길을 재촉했다.

심협은 과실을 품속에 넣고 영락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영락과 심협은 대나무로 된 집에 도착했다.

“도우는 대체 누구요? 어째서 갑자기 우리 장수촌에 나타난 것이오?”

집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은 영락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까 낭자 입으로 나를 방촌산의 수사라 하지 않았소?”

다소 불쾌해진 심협은 퉁명스레 답했다.

“도우께서 베푼 은혜를 생각하면 이리 무례를 범해서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특수하니 도우께서는 부디 숨기지 말아주십시오.”

영락은 무겁고 복잡한 표정으로 은연중 사과하듯 말했다.

“사실대로 이야기하자면, 나도 내가 어쩌다 여기에 오게 됐는지 모르겠소. 조금 전에 어쩌다가 짙은 안개 속으로 들어섰는데, 다시 나와 보니 이곳이었소.”

심협은 영락의 진중한 모습에 표정을 누그러뜨리고는 잠시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 안개를 통해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다는 건가요?”

영락은 눈빛을 빛내며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소. 영락 낭자, 먼저 여기가 어디인지 알려주겠소?”

심협은 점점 혼란스러워져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곳은 보상국(寶象國) 북교군(北橋郡) 경내의 장수촌입니다.”

영락이 대답했다.

“보상국이라면…… 서우하주(西牛賀洲)의 나라가 아닌가!”

심협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예전에 유람기에서 보상국에 대한 기록을 읽은 적이 있다. 남첨부주(南瞻部洲)에 위치한 대당과 거리가 매우 먼 곳이었다. 그러니 그가 놀라서 멍하니 중얼거리는 것도 당연했다. 이번 꿈에서는 다른 대륙으로 옮겨왔단 말인가?

“도우는 본국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요?”

영락이 놀라며 물었다.

“그렇소.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대당에서 왔소.”

심협은 정신을 차리고 영락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대당……. 어쩐지 도우의 복장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호칭을 어떻게 할까요? 그리고 이번에 장수촌을 환난에서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감사 인사를 받아주십시오.”

영락은 놀란 와중에도 미소를 지으며 공수했다.

“영락 낭자, 그리 예의 차리실 것 없소. 나는 심협이라 하오. 아마 낭자와 몇 살 차이도 나지 않을 테니, 낭자만 괜찮다면 나를 대형이라고 불러주시오.”

심협이 급히 응답 인사를 하고 말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심 대형.”

영락은 바로 시원스레 웃으며 대답했다.

“영락 낭자, 저 밖의 안개에 대해 알려줄 수 있소?”

심협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심 대형은 안개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 것 같은데, 어찌 그 안에서 안전하게 나오실 수 있었습니까?”

영락은 심협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잘 모르겠으나, 정말 어찌하다 보니 여기 오게 된 게요. 절대 거짓이 아니오. 낭자께서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사실대로 이야기해주시오.”

영락은 심협의 표정이 거짓 같지 않자 다소 실망한 기색으로 천천히 말했다.

“사실 저도 그 안개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저 수백 년 전 천마(天魔)가 세상을 멸한 이후 이 일대가 그 안개에 뒤덮여, 우리 장수촌이 세상과 단절되기 시작했다는 것만 알뿐입니다.”

“그럼 사람이 안개에 들어가면 어찌 되오?”

심협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예전 꿈에서 들었던 ‘마(魔)가 하늘을 삼키고 하늘의 불이 세상에 떨어졌다’는 우혁 부자의 말이 떠올랐다. 그 일도 수백 년 전이라고 했다. 영락이 말한 천마가 세상을 멸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일까?

“듣기로는 사람이 안개 속에 들어가면 바로 방향을 잃고 갇혀 죽는다고 합니다. 처음 안개에 뒤덮이기 시작했을 때는 그 안에 들어간 마을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 이제 누구도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영락은 씁쓸한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장수촌 사람들은 안개 때문에 수백 년을 단절된 채 살았다는 것이오? 그건 불가능하오. 그렇게 오랫동안 단절되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거요.”

심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마을 밖의 그 작은 규모의 농경지로는 모두가 먹고살 수 없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처음 안개가 뒤덮기 시작했을 때까지만 해도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마을 밖에 농사지을 비옥한 땅도 있었고, 집집마다 가축도 길렀다고 하니까요. 그리고 방촌산의 외문제자들이 마을을 지켜주었습니다. 덕분에 고되기는 해도 그런대로 버틸 수 있었지요. 하지만 많은 일이 일어나 점점 상황이 안 좋아졌습니다.”

영락은 여기까지 이야기하더니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낭자는 수차례 방촌산을 언급했는데, 대체 방촌산이 무엇이오?”

“우리 마을이 등지고 있는 큰 산입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전에 그 산 위에 신선이 살았고 진정한 수선 종파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을도 그들의 비호로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죠. 마을의 많은 장정이 선발돼 방촌산의 수선 종파 문하에서 법술을 익혔습니다.”

영락은 동경하는 듯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그리 강대한 수선 종파가 있는데 왜 장수촌은 구조를 요청하지 않았소?”

심협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겁니다. 당시 마을의 방촌산 제자들이 특수한 방법으로 소식을 전했는데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했지요. 나중에는 제자 셋이 위험을 무릅쓰고 산에 올랐는데, 그중 저의 조상님 한 분만 가까스로 도망쳐 오셨습니다. 그분은 응혼 초기의 수사셨는데, 중상을 입은 상태로 ‘절대 산에 오르지 말라’는 말씀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영락은 무거운 얼굴로 탄식했다.

“낭자 말대로라면 방촌산 위에 무슨 변고가 발생했는지도 모르겠소.”

“산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천마가 세상을 멸한 후로 그곳의 신선들은 마치 모두 사라진 것처럼 다시는 나타나지 않으셨지요. 하지만 마을의 어르신들은 언젠가 신선들이 돌아올 거라 믿고 있습니다.”

영락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낭자가 마을 사람들에게 나를 방촌산 수사라고 한 것이구려.”

심협이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요괴들의 계속된 습격에 사람들은 지칠 대로 지쳤고, 절망하고 있습니다. 심 대형을 방촌산에서 내려온 신선이라 믿는다면 그들에게 마지막 한 줄기 희망이 생기는 것이지요. 그런 희망조차 없다면, 요괴들의 습격이 없어도 그들은 살아갈 수가 없을 테니까요.”

영락의 표정은 더없이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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