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90화 (90/1,214)
  • 90화. 장수촌(長壽村)

    마을 문 위에 서 있던 사람 중 하나가 원숭이들을 막으려고 몸을 내밀더니 긴 창을 들어 찌르려 했다. 하지만 그는 머리를 내밀자마자 날아온 돌에 맞아 그대로 머리가 쪼개지더니 담장에서 떨어져 버렸다.

    그러자 문 앞에 모여 있던 원숭이들이 문 두드리던 것도 멈추고는 서로 시체를 뺏느라 열을 올렸다. 여기저기서 원숭이들이 잡아당긴 탓에 시체는 갈기갈기 찢겨나갈 판이었다.

    그런데 그때, 자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여자가 거친 갑옷을 입은 채 나무 울타리 위에 나타났다. 그녀는 양손을 빠르게 결인하더니 맹렬히 아래를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돌연 바람 소리가 울리고, 사람 머리통만 한 붉은 불덩이가 하늘에서부터 원숭이들을 향해 떨어졌다.

    “우끼끼!”

    “캬야악!”

    그 불덩이의 위력을 아는 것인지, 원숭이들은 시체를 내던지고 한쪽으로 피했다. 그러자 불덩이가 시신을 삼켜버렸다.

    “캬아아아!”

    원숭이들은 ‘고기’가 사라지자 화가 난 듯 더욱 포악하게 나무 문을 두들겼다. 그 여인을 향해 맹렬히 돌을 던지는 원숭이들도 있었다.

    “수선자가 있었구나.”

    심협은 그 여자를 자세히 살폈다. 아직 앳된 소녀인 듯했다. 그녀가 입은 다 떨어진 갑옷 사이사이로 드러난 팔과 다리에는 하얀 천을 동여매고 있었는데, 천마다 말라 검게 변한 핏자국이 얼핏 내비쳤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날짐승의 울음소리가 울려왔다.

    “캬오오오!”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에는 심협이 보았던 새와 똑같이 생긴 거대한 새 서너 마리가 선회하며 날고 있었다. 새들은 마을 위 상공을 한 바퀴 날아 돌더니 갑자기 낮게 하강했다. 그리고 그대로 나무 울타리를 넘어 마을을 덮쳐갔다.

    나무 울타리 위의 청년들은 분분히 새들에게 화살을 쐈다. 허나 제법 빠르고 위력적인 그 화살들도 세 마리 중 뒤에 있던 새가 날갯짓으로 일으킨 광풍에 휩쓸려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비껴 나갔다.

    거대한 새들은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초가집들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부리로 쪼고 발톱으로 긁으며 집안에 숨어 있던 노인과 어린아이들을 찾아내기도 했다.

    “꺄아악!”

    “사, 살려줘!”

    순식간에 놀란 외침과 처참한 비명이 퍼졌다.

    마을 안의 길 옆에는 옷으로 몸을 다 가리지도 못한 깡마른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무너진 집 담장 옆에 멍하니 앉아 피하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움푹 꺼진 눈동자는 흐릿해 조금의 생기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산송장과도 같은 사람들이었다.

    한 노파는 비틀거리며 걸었는데, 발걸음에는 힘이 거의 없어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쓰러져버렸고, 기운이 없는지 일어나지도, 발버둥치지도 않았다. 심지어 두 눈에는 이미 눈물마저 말라버린 듯했다.

    거대한 새들은 그렇게 힘없는 노인과 아녀자, 어린아이를 물고 나무 울타리 밖으로 나와 땅에 내팽개쳤다. 바닥에 떨어진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깨지고 팔다리가 부러졌으며 피를 철철 흘렸다.

    쓰러진 사람들을 발견한 원숭이들이 분분히 달려와 금세 그 사람들을 찢어발겨 먹어치웠다. 사람 맛을 본 원숭이들은 더욱 흥분해 마을을 공격했고, 거대한 새들도 다시 날갯짓을 하며 마을을 덮쳤다.

    새들 중 한 마리가 마을 중앙 쪽으로 날아갔는데, 날갯짓 한 번에 광풍이 일어 한 초가집의 지붕이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그러자 그 안에는 10살도 채 되지 않은 열서너 명의 아이들이 한구석에 모여 벌벌 떨며 울고 있었다. 아이들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이 광경에 새는 흥분한 듯 울음을 내지르더니 아이들을 향해 하강했다.

    그때, 얼굴이 주름으로 가득한 노파가 돌연 나무 빗자루를 들고 튀어나와 마치 새끼들을 보호하는 어미 닭처럼 아이들 앞을 막아섰다.

    새는 날카로운 송곳 같은 발톱으로 노파를 잡기 직전이었다.

    그때, 거대한 굉음이 울려왔다!

    꽝!

    이어서 붉은 불덩어리가 하늘에서 비스듬히 떨어져 거대한 새를 맞혔다.

    “캬오오오!”

    새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비스듬히 날아가 담장에 그대로 처박혀 파편에 파묻혀버렸다.

    나무 울타리 위에 선 자색 머리의 소녀가 창백한 얼굴로 서서히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방금 위기에서 벗어난 노파와 아이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노파와 아이들이 안심하기도 전에 날아든 돌덩이가 소녀의 등에 떨어졌고, 소녀는 비틀거리다가 땅으로 떨어져 피를 토했다.

    하지만 담장 위의 청년들은 그녀를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그들은 원숭이들이 던지는 돌 때문에 감히 머리도 내밀지 못하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 와중에 마을 문도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문이 열리면 마을은 그대로 쑥대밭이 되고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자색 머리의 소녀는 고통을 참으며 억지로 일어나더니 문으로 향했다. 부상이 가볍지 않아 걷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그런 상태이다 보니 담벼락에 파묻혀 있던 새가 다시 일어난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캬아악!”

    새는 양 날개를 떨더니 그대로 날아들어 부리 끝으로 소녀의 뒷머리를 찔러갔다.

    위기일발의 순간, 흐릿해진 소녀의 시야에 갑자기 낯선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높이 솟아올라 순식간에 나무 울타리를 넘더니 소녀를 향해 긴 창을 내던졌다.

    소녀는 반사적으로 피하려 했지만, 그러기에는 창이 날아오는 속도가 너무도 빨랐다.

    핑!

    창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소녀의 귀 끝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리고…….

    “키야악!”

    뒤에서 짧은 비명 소리가 울렸다. 소녀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을 때, 거대한 새 한 마리가 긴 창에 머리가 관통된 채 그대로 땅에 박혀 죽어 있었다.

    소녀는 눈에 들어간 피를 문질러 닦고서야 방금 나타난 사람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있었다. 상대는 준수한 용모의 청년이었다.

    청년은 당연히 심협이었다. 그는 소녀가 처참한 몰골로도 자신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려 애쓰는 것을 보자 울컥하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저 짐승들은 내게 맡기고 좀 쉬시오.”

    심협은 그 말만을 남긴 채, 방금 동료의 죽음을 보고 심히 난폭해져 돌진해오는 두 마리의 새를 향해 돌아섰다. 두 쌍의 발톱이 좌우에서 동시에 심협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심협은 공격을 피하지 않고 양손을 뻗어 단숨에 새들의 발을 움켜쥐었다. 이어서 법력을 운공해 맹렬히 몸을 뒤집자 새들의 발톱이 지면에 내리꽂혔다.

    팍!

    새들이 발버둥치기도 전에 둔탁한 소리가 울렸고, 어느새 몸을 솟구친 심협이 두 발로 매섭게 새들의 머리를 밟고 지나가자 새들은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심협은 이어서 체내의 법력을 운공하며 몸을 맹렬히 솟구쳐 담을 넘어 마을 밖으로 나갔다.

    원숭이들은 심협을 보자 우끼끼 하는 소리를 내며 흥분해 다가왔다. 아마도 새들이 던져준 먹이로 착각한 듯했다.

    그 무렵, 심협은 화염 단창과 한창을 모두 흑산노요를 공격하느라 써버렸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허리에 감겨 있는 금빛 밧줄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원숭이와 거대한 새들이 이제 막 영지(靈智)가 깨인 가장 낮은 급의 요괴임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이들은 심지어 지난번 꿈에서 만난 삼안의 부하 쥐 요괴보다도 못해 심협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심협은 속으로 청양수의 구결을 되뇌며 체내의 양기를 구결에 따라 운공해 두 손바닥으로 모았다. 가볍게 시도해봤을 뿐인데 양손에 푸른 빛이 일더니 손이 본래의 두 배로 커졌다.

    그때 가장 먼저 다가온 원숭이가 심협에게 달려들며 주먹을 휘두르자, 심협은 가볍게 옆으로 비켜서서 주먹을 피하고는 손바닥으로 원숭이의 머리를 내리쳤다.

    퍽!

    수박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원숭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머리가 함몰되어 큰 구덩이가 생기며 쓰러졌다.

    곧이어 두 마리의 원숭이가 다가와 돌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심협이 내민 두 손바닥에 돌 방망이들은 그대로 부서졌고, 심협은 다시 양손에 각각 원숭이들의 머리를 잡아당겨 서로 충돌시켰다.

    퍽!

    짧은 굉음과 동시에 두 마리 원숭이의 머리가 한꺼번에 터져버렸다.

    비록 난폭하고 우매한 원숭이들이었으나 이 광경을 보고도 어찌 두려움을 느끼지 않겠는가! 녀석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재빨리 도망쳤다.

    허나 청양수를 직접 시험해볼 좋은 기회를 이대로 놓칠 수 없었던 심협은 홀로 쫓아가며 주먹과 장법만으로 순식간에 네댓 마리의 원숭이를 죽였다.

    담장 위에 있던 사람들은 원숭이들의 돌팔매질이 멈추자 슬쩍 머리를 내밀었다가 보게 된 충격적인 광경에 다들 입이 쩍 벌어졌다.

    “시…… 신선이다!”

    “산 위의 신선께서 돌아오셨다! 그분들이 돌아왔어!”

    “하늘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구나! 우리 장수촌을 버리지 않았어!”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르겠으나, 담장 위의 사람들은 모두 감격하여 소리치고 흐느끼기도 했다.

    심협은 잠시 더 원숭이들을 쫓다가 멈추었다. 살아남은 서너 마리의 원숭이는 황급히 도망쳤다.

    심협은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야 담장 밖을 살펴볼 수 있었다. 드문드문 서 있는 누렇게 마른 대나무들 사이로 척박한 밭이 조금씩 보였다. 하지만 모종들은 이미 반쯤 죽은 상태에서 원숭이들에게 짓밟히기까지 해 거의 망가져 있었다.

    심협이 마을 입구에 이르자 떨어지기 직전인 마을 문이 흔들거리며 열렸다. 안에서는 백여 명의 남녀노소가 줄지어 나왔는데, 하나같이 옷차림이 남루하고 피로한 표정이 마치 피난민 같았다.

    심협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데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기 시작하더니 이내 거의 대부분이 무릎을 꿇었다.

    “저희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사님!”

    “대자대비(大慈大悲) 하신 선사님!”

    감사를 표하는 목소리들 중에는 높고 낮은 울음소리도 섞여 있었다. 환난 중에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슬픔을 참지 못하고 다 같이 울음을 터트렸다.

    심협은 뜻밖의 상황에 멍해졌다. 수차례 기이한 꿈에서 별의 별 상황을 겪어봤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마치 미치광이의 중얼거림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어라, 울어. 다 같이 울어. 소용없네, 아무 소용없어…….”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니 상반신은 헐벗고 온몸에 더러운 때가 잔뜩 묻은 대머리 노인이 비틀거리며 사람들 뒤에서 나타났다. 그는 계속해서 ‘소용없다. 모두 죽을 것이다’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심협 앞까지 와서 그를 노려본 대머리 노인은 갑자기 헤헤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심협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도 죽을 것이야. 헤헤헤!”

    말을 마친 그는 심협을 위아래로 살펴보더니 또다시 소리 내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비틀거리며 마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꿇어앉은 사람들은 노인의 그런 행동에 이미 익숙한 듯 신경도 쓰지 않았고, 여전히 울면서 심협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심협을 보는 그들의 눈빛은 마치 구세주를 보는 그것과도 같았고 희망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그들 뒤에는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다들 안색이 창백하고 표정이 멍한 것이 마치 산송장 같았다.

    “다들 일어나십시오.”

    심협은 뒤통수를 긁으며 난감한 듯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일어나지도, 대답하지도 않자 심협은 점점 난감하고 혼란스러웠다.

    “다들 울음은 좀 그치시고, 마을과 당신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누가 말 좀 해주겠소?”

    심협은 법력을 운공해 제법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모든 소리를 뒤덮었고, 그제야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담장 위에서 마을을 지키던 검은 얼굴의 사내가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더니 다시 심협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선사님께 감히 여쭙겠습니다. 혹시 선사님 혼자 하산하신 겁니까?”

    청년의 긴장된 표정과 말에 심협은 여전히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그때 약간 피로감이 느껴지는 여자의 목소리가 마을 안에서 전해졌다.

    “다들 입구를 막고 있지 마시오. 우선 저 도우를 마을로 모십시다.”

    마을 사람들은 소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분분히 일어나 길을 열어주었다.

    사람들이 열어준 길을 따라 마을을 들여다보니 조금 전 그 자색 머리의 소녀가 긴 창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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