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89화 (89/1,214)
  • 89화. 안개 속 구멍

    심협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패루의 중앙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리고 그는 이내 놀라 숨을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다. 패루의 편액에는 옛 전서체로 세 글자가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 바로 ‘귀문관(鬼門關)’이었다.

    “귀문관은…… 저승 가는 관문 아닌가? 내가 어찌 이곳에 왔단 말인가?”

    심협의 머릿속엔 귀문관에 관한 민간의 소문들이 떠올랐다. 이곳은 사람이 죽어야 올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구혼마면은 어떻게 자신을 알고 있고 또 어떻게 자신을 희생해가며 나를 이곳으로 보내주었던 말인가?

    심협은 다시 편액을 살펴봤지만, 편액에 쓰여 있는 것은 틀림없는 귀문관 세 글자였다. 게다가 그 세 글자의 아래에 피로 쓰인 검붉은 글자가 있었다. 그것은 세 개의 ‘한(恨)’ 자였다.

    한(恨), 한(恨), 한(恨).

    초서체로 날려 쓴 세 개의 글자는 한 획으로 이어져 있었다. 뒤로 갈수록 필법이 더욱 미친 듯이 날려 쓴 것이, 이 글자를 쓴 사람의 한(恨)이 점점 더 커진 듯했다. 글자 아래에는 피가 흘러 굽이치는 선을 이루고 있었으니, 보고 있으면 흉측함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방금 전에는 구혼마면, 지금은 또 귀문관에 이르렀으니, 그러면 이제 황천길이 나올 차례인가?”

    심협은 한숨을 내쉬며 패루 뒤쪽을 자세히 살펴봤다.

    패루 뒤에는 누런 모래가 깔린 길이 있었다. 길은 굽이치며 멀리까지 뻗다가 회백색 안개에 묻혔다. 길 양쪽에는 간간이 선명한 붉은색 꽃들이 피어 있었다. 이 꽃은 꽃받침 하나에 꽃이 하나씩이었다. 꽃대는 가지에서 여러 개 나와 있었고, 우산처럼 마디 끝에 꽃이 피어 있었다. 꽃잎은 마치 곧 떨어질 것처럼 등 쪽으로 구부러져 말려 있었고, 피처럼 붉었다. 자신이 들고 있는 것과 똑같은 꽃들이었다.

    “듣기로는 저승으로 향하는 황천길에 저승의 꽃이 피어 있는데, 피안화(彼岸花)라고 부른다지? 피안화는 대대로 잎을 보지 못하고…… 황천길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풍경이라고 했어. 여기는…… 정말 황천길인 거야!”

    심협은 눈빛이 변하더니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때, 머리 위 허공에서 돌연 묵직한 울림과 함께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허공에서 음풍(陰風)이 미친 듯이 회오리쳤다. 검은 구름이 빽빽이 퍼져 있었고, 그 가운데 햇빛이 살짝 비치는 동그란 구멍이 있었다. 주변으로는 짙은 안개가 회전하고 있었고, 그 안에 하얀 빛이 일었다. 마치 하늘 전체에 구멍이 하나 뚫려 있는 것만 같았다.

    심협은 뭔가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느끼고는 이곳에서 멀리 달아나고자 했다. 하지만 귀문관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심협은 자신의 몸을 뒤져 보았다. 지난번 꿈에서 얻었던 단약과 금빛 밧줄 등이 그대로였다. 그제야 그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몸을 돌려 사방을 훑어보던 중 눈에 들어오는 곳이 있었는데,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지만 모두 회백색 안개만 자욱한 곳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심협은 귀문관을 등진 채 뛰기 시작했다. 단숨에 100여 장을 달렸는데, 그러자 눈앞의 안개가 점점 더 짙어지고 주변의 음풍은 더욱 매서워졌다.

    심협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줄곧 구혼마면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의 일이라고 했지?’

    불안해진 심협은 아예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안개와 음풍은 점점 심해져 결국에는 한 치 앞의 사물도 분간할 수 없고 귓가에 바람 소리만 울리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갑자기 눈앞의 안개가 걷히고 바람 소리도 멈추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온몸에 힘이 풀려버려 잠시 후에야 몸을 가눌 수 있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고개를 들어 보니 그곳은 무너진 패루 앞이었다. 패루에는 ‘귀문관’이라는 세 글자가 쓰인 부서진 편액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로 검붉은 세 개의 ‘한(恨)’ 자가 보였다.

    “다시 돌아왔잖아!”

    심협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생각해볼 틈도 없이 손에 들고 있던 피안화에서 돌연 붉은 빛의 점들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마치 타오르는 모닥불에서 불씨가 튀는 것 같았다.

    광점(光點)들이 흩날려 사라질수록 피안화의 붉은 빛이 점점 약해지고 색도 서서히 바래는 것이 곧 시들어 버릴 듯했다.

    ‘꽃이 지고 사람이 죽는 것은, 고작 차 한잔 마실 시간의 일…….’

    심협은 그제야 그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패루 너머 황천길로 향했다. 황천길에도 흐릿하게 안개가 끼어 있었다. 생각을 바꾼 심협은 그대로 귀문관을 향해 달렸다. 어쨌거나 다른 길은 갈 수도 없었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었다.

    “황천길이 아무리 위험하다 한들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어차피 죽을 거라면 여기 가만히 서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야 낫겠지.”

    심협은 패루 아래 넘어져 있는 검은 돌을 한 걸음에 넘었고, 몸을 솟구쳤다.

    그런데 그때, 또다시 이변이 일어났다. 귀문관 편액에 쓰여 있던 세 개의 한(恨) 자에서 돌연 빛이 크게 일더니 글자 하나하나가 극도로 두려운 기운을 발산한 것이다.

    글자에 가까이 다가간 심협은 무형의 거대한 힘에 부딪혀 뒤로 튕겨나갔다. 그리고 땅에 처박힌 그는 손으로 땅을 쥐고서야 겨우 몸을 가눌 수 있었다.

    가슴팍에서 기혈이 요동치더니 평소와 달리 잔인한 심성이 치솟았다. 무언가 난폭하고 사악한 행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심협은 급히 무명공법을 운공하여 법력을 머리로 보내 가까스로 그 사악한 생각을 몰아냈다.

    심협은 다시 손에 든 피안화를 살폈는데, 꽃잎은 이미 누렇게 말라갔고 꽃술만이 붉은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를 악문 심협은 다시 패루 안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그의 몸 주위로 얇은 파란 빛이 일었다. 그가 법력 전체를 운공하며 맹렬히 부딪혀 본 것이다.

    뒤이어 세 개의 한(恨) 자에서 다시 피처럼 붉은 빛이 크게 일더니 더욱 강력한 무형의 힘이 뿜어져 나와 그를 매섭게 두들겼다.

    쾅!

    “으음…….”

    낮은 신음과 함께 몸에 일었던 파란 빛이 떨리며 사라졌다. 동시에 심협의 몸도 튕겨나가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그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손에 들고 있던 피안화가 완전히 시들고 말았다.

    꽃은 가루가 되어 흩어져 사라졌고, 심협을 감싸고 있던 붉은 빛도 완전히 사라졌다. 사방의 안개와 음풍이 돌연 심협을 향해 모여들더니, 거대한 회백색 소용돌이를 이루었고, 그는 그 소용돌이 중앙에 갇히게 되었다.

    붉은 빛의 보호가 사라지고 안개가 옷자락을 스쳤다. 옷자락은 순식간에 회백색 재가 되어 음풍에 실려 날아갔다.

    이 광경에 심협은 크게 놀라 하늘의 그 거대한 구멍을 올려다봤다.

    “다시 해보자!”

    심협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땅에 떨어진 순간 전신의 법력을 모두 두 다리에 모아 맹렬히 몸을 솟구쳤다.

    펑!

    발아래에서 대기가 폭발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심협은 그대로 솟구쳐 하늘의 구멍 안으로 겨우 들어갔다.

    구멍에서는 운기(雲氣)가 감돌았고, 적지 않은 흡입력이 심협을 안으로 끌어들였다.

    심협은 순간 몸이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어느새 구멍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바닥에 내려서자 둥근 돌이 밟을 떠받쳤다. 심협이 중심을 잡으려고 잠시 비틀거리는 사이 가볍게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흠!”

    급히 발아래를 살펴보니 사람의 두개골이 보였다. 방금 밟은 것은 둥근 돌이 아니라 바로 사람의 두개골이었던 것이다. 두개골의 주인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된 것인지 무심히 한번 밟은 것만으로도 쉽게 가루가 되어 버렸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심협은 사과하며 급히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런데 또다시 그 가벼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그의 발아래로 사람의 목뼈가 밟혀 부러져 있었다. 이에 심협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사방을 둘러봤고, 순간 머리가 쭈뼛 섰다. 사방에 어렴풋이 운무가 껴 있어 그가 볼 수 있는 거리는 수십 장에 불과했는데, 시야가 닿는 곳마다 지면은 온통 백골로 빽빽했던 것이다.

    백골은 사람의 것과 들짐승의 것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중 극히 일부만이 원래의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안개에 가려진 곳에도 이처럼 백골들이 널려 있을 것 같았다.

    심협은 몸을 돌려 그리 멀지 않은 곳을 바라봤는데, 그가 들어온 구멍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크기는 많이 작아져 이제 10장 정도에 불과했다.

    심협은 방금 귀문관 앞에서의 상황을 떠올렸다. 아직도 생각하면 두려워서 그 구멍에 다시 가까이 가 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지?”

    사방에 안개가 자욱해 더더욱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그렇게 망설이고 있을 때, 음풍이 불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는 마치 여자의 나지막한 흐느낌 같았고, 발밑에서는 방금 밟아 바스러진 백골 가루가 바람에 흩날려 흩어져 갔다.

    심협은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가 음풍이 불어 가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는 드넓은 광야에서 최대한 조심하며 걸었지만, 그럼에도 수시로 그의 발밑에서 백골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걸었을까? 돌연 심협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저 앞의 안개가 점점 옅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약간 기운을 차리고 조금 더 다가가 보았다. 그러자 안개가 점점 사라지면서 시야가 갑자기 탁 트였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산비탈에 서 있음을 알게 됐다. 맞은편에는 산간의 평지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구름 위까지 높이 솟은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었다.

    고개를 돌려 살펴보던 심협은 산비탈 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반쯤 내려왔을 때, 돌연 하늘에서 날짐승의 울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심협이 급히 고개를 들어보니 거대한 새가 하늘을 선회하고 있었다. 양 날개를 펼치자 너비가 3, 4장은 족히 되어 보였고, 온몸의 깃털은 검게 빛났다. 몸에서 옅은 검은 운무를 발하고 있는 것이, 아마도 요괴인 것 같았다.

    그런데 심협이 자세히 살피기도 전에 그 새는 양 날개를 펼치더니, 산간의 평평한 곳으로 빠르게 스쳐 가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심협은 기이하다는 생각에 재빨리 새가 떠난 방향으로 따라가 보았다.

    100여 보를 걸었을 때, 저 앞에서 들짐승 우는 소리와 사람의 애처로운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사람이 있다!’

    속으로 외친 심협은 몸을 솟구쳐 빠르게 내달렸다. 비명과 짐승 우는 듯한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산 중턱에 이른 심협은 산간 평지에서 거대한 산봉우리를 등지고 세워진 마을을 발견했다.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은 주위에 마치 방어 공사라도 한 듯한 모양새였다. 끝을 뾰족하게 깎은 굵은 나무들이 나란히 세워져 견고한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다.

    나무 울타리가 에워싼 담장은 높이가 족히 2장은 됐는데, 안에 담벼락과 바로 붙은 높은 대(臺)가 지어져 있었다. 대 위에는 몇 걸음 간격으로 거친 베옷을 입은 청년들이 서 있었는데, 화살과 긴 창을 들고 밖을 향해 공격하고 있었다.

    한편, 나무 울타리 밖에는 키가 보통 사람과 비슷하지만 기골은 훨씬 건장한 회색 털의 원숭이가 10여 마리 모여 있었다. 녀석들은 손에 돌을 들고 나무 울타리를 향해 맹렬히 던져댔다. 돌이 울타리에 부딪힐 때마다 거대한 소리가 울렸다. 혀를 내두를 만한 힘이었다.

    또한 다른 한쪽의 나무 울타리에는 얇은 철판으로 감싼 육중한 나무 문이 있었고, 그 앞에도 원숭이 몇 마리가 모여 있었다. 원숭이들이 굵은 돌 방망이를 양손으로 들고 계속 문을 내리쳤고, 문은 곧 부서질 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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