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구혼마면(勾魂馬面)
말 머리 귀신은 오히려 경악한 표정으로, 대답은 하지 않고 계속 중얼거렸다.
“자네 정말 심협인가?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자네가 여기 어떻게 나타난 것인가? 어떻게 아직 살아 있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오!”
심협은 귀신의 뜬금없는 말에 당황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서…… 어서 나를 풀어주게. 내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
말 머리 귀신은 마치 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급히 외쳤다.
심협은 잠시 망설였으나, 말 머리 귀신에게서 위협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경맥을 따라 체내의 법력을 운공하여 단창에 주입시켰다.
텅!
짧은 소리와 함께 화염이 일었다. 심협은 그제야 단전에 법력이 충분함을, 지난번 꿈에서 이룬 무명공법 3층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심협은 한 걸음 다가가 말 머리 귀신을 묶고 있는 줄을 향해 단창을 휘둘렀다. 그러자 단창의 화염이 날카로운 칼끝처럼 검은 기운으로 된 줄을 그대로 끊어버렸다.
그러자 말 머리 귀신은 청동 기둥에서 떨어져 비틀거리며 무릎 하나를 꿇은 자세로 땅에 내려섰다. 그의 뒷머리에서는 하얀 갈기가 휘날렸다.
이어 귀신이 고개를 들자 심협은 단창 끝을 그 미간에 겨눈 채 매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라! 나를 어떻게 아는 것이냐?”
말 머리 귀신은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무언가 말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제단이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진동의 간격으로 미루어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옆에 있던 백골 경관의 녹색 빛들이 진동에 따라 요동쳤다.
심협은 제단의 진동에 따라 자신의 정신까지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돌연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연유도 모른 채 두려움이 일었다.
“흑산! 흑산!”
진동이 전해지는 방향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도 해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들으면 한 사람이 크게 소리치는 듯했고, 또 어떻게 들으면 여러 사람이 동시에 소리치는 것 같았다. 무어라 형용할 수없이 기이했다.
“큰일이다. 흑산노요(黑山老妖)가 오고 있어!”
말 머리 귀신은 하나 남은 팔을 휘두르며 일어나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심협은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봤다. 그러자 멀리 진동이 전해지는 방향에서 새까맣고 거대한 산이 떠오른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흑산노요가 어떤 요괴인지는 잘 모르지만, 지금 형세로 미루어 상대하기 어려운 요괴임은 분명했다. 이에 심협은 급히 바닥에 있던 단창을 모두 챙겨 등 뒤에 매고는 방향을 틀어 종종걸음으로 달리다가 제단에서 뛰어내렸다. 최대한 멀리 달아나려는 생각이었다.
“아이고, 심협! 나 좀 기다려주게!”
말 머리 귀신이 크게 외치며 제단에서 뛰어내려 급히 심협을 따라왔다.
심협은 말 머리 귀신을 상대하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렸다.
이렇게 사람 하나와 귀신 하나가 앞뒤로 달리며 흑산노요를 등진 채 미친 듯이 내달렸다.
하지만 멀리 도망치기도 전에 심협은 뒤에서 광풍(狂風)이 불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그는 기겁했다. 제단 위에 있던 황색 구름이 매우 빠르게 요동치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매우 거대하고 뒤틀린 귀신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귀신의 얼굴은 흐릿해 이목구비 윤곽만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입이 있는 곳이 돌연 크게 벌어지더니, 양 뺨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구멍이 났다. 그 안에서 황색 구름이 요동치며 엄청난 흡입력이 전해졌다.
곧이어 심협은 거대한 얼굴의 아래에 있던 제단이 격렬히 요동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제단은 그러다가 순식간에 땅에서 뽑혀 올라갔다. 귀신들의 처참한 비명과 함께, 10여 개의 백골 경관도 그대로 거대한 얼굴의 입으로 들어가 버렸다.
“낄낄낄! 도망칠 생각 마라!”
하늘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전해져 왔다. 이어서 그 거대한 얼굴이 갑자기 비스듬히 기울더니, 대지를 똑바로 굽어보는 듯한 모양새에서 앞을 곁눈으로 노려보는 모양새로 바뀌었다. 사방의 황색 구름은 돌연 칠흑처럼 검게 변해 광풍이 되어 심협과 말 머리 귀신을 쫓았다.
심협은 속으로 욕을 내뱉으면서도 어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죽기 살기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심협, 소용없네. 흑산노요는 출규기의 귀왕(鬼王)이라 우리로서는 벗어날 수가 없어!”
뒤에서 말 머리 귀신이 외쳤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의 머리 위에 떠 있던 황색 구름이 돌연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이어서 구름이 요동치더니, 거대한 검은 손이 그 안에서 튀어나왔고, 다섯 손가락이 마치 산악처럼 밀어닥치며 내려왔다.
심협이 고개를 들어 보니 그 손은 하늘을 다 가릴 정도로 거대했다. 지금의 속도로는 그 손이 뒤덮은 범위를 벗어날 수 없을 테니 더는 도망쳐봐야 소용없을 터였다.
“죽으면 죽는 거지. 한번 붙어보자!”
생각을 바꾼 심협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단창을 하나 꺼내 법력을 주입했다. 단창의 표면에 붉은 화염이 일었고, 심협이 약간의 발을 구른 후 팔을 맹렬히 휘두르자 창은 거대한 검은 손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퍼펑!
화염 단창은 거대한 손에 적중된 순간,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다.
단창은 그대로 폭발했으나 그저 밤하늘에서 터진 작은 불꽃처럼 약간 번득이다가 바로 사라졌을 뿐이었다. 거대한 검은 손은 전혀 멈추지 않고 계속 아래를 향해 압박해오고 있었다.
“소용없네. 막을 수 없어.”
말 머리 귀신은 심협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심협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다시 단창 하나를 꺼내 법력을 주입해 빠르게 던졌다. 화염 단창이 된 창이 허공을 갈랐다.
심협은 연이어 단창을 꺼내 던졌고, 바람 가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법기와 비슷한 수준의 단창들을 보통의 병기 마냥 연이어 던져 버린 것이다.
심협이 법기를 제대로 다룰 수 없다고는 하나, 법력이 주입된 화염 단창의 위력은 보통의 부기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쾅! 쾅! 쾅!
폭발음이 이어졌다. 화염 단창이 폭발할 때마다 위력이 점점 가중되더니, 작은 불꽃들이 모여 거대한 불바다를 이루어갔다.
그러나 심협은 불바다에 신경 쓸 여유도 없이 소매를 뒤적여 길이가 1척 정도 되는, 놀랍도록 서늘한 한기를 발산하는 창을 꺼냈다. 이어서 그는 양손으로 한창을 꽉 쥔 채 체내의 무명공법을 빠르게 운공했다. 그러자 법력이 한 방울도 남지 않고 모조리 솟구쳐 한창에 주입되었다.
하얀 빛이 크게 일더니, 한창은 순식간에 1장에 이르는 얼음 창이 되었다.
“가라!”
심협은 전력을 다해 외치며, 다시 온 힘을 다해 얼음 창을 비스듬히 위로 던졌다.
얼음 창은 허공을 가르며 새하얀 흔적을 남기더니 금세 거대한 손에 부딪혔다. 하지만 화염창처럼 바로 폭발하지 않았고, 거대한 손의 방어막을 뚫고는 그 중앙을 찔러갔다.
쩌적!
허공에서 얼음 어는 소리가 들리더니, 얼음 창을 중심으로 하얀 한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검은 손은 순식간에 그 한기에 휩싸였으나 이내 푸른 화염이 일어나 손을 감쌌다. 그러자 한기는 모두 사라졌고, 검은 손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이 광경에 심협은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죽음을 면할 수 없을 터였다. 게다가 흑산노요의 실력이 실로 공포스러우니 부활한다 해도 도망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됐네, 됐어! 내 자네를 보내주겠네. 우리의 교분이 헛되지 않았음이야.”
옆에 있던 말 머리 귀신이 돌연 길게 탄식하더니 입을 벌려 무언가를 뱉었다. 그러자 혀 사이에서 붉은 빛이 번득이더니 선명한 붉은색 작은 꽃 두 송이가 나타났다. 말 머리 귀신은 그중 한 송이를 심협에게 던져 주었다.
“이게…… 지금 뭘 하려는 게요?”
반사적으로 붉은 꽃을 받은 심협은 뜨악해하며 물었다. 자신보다도 약한 저 말 머리 귀신에게 살아 나갈 방법이 있단 말인가?
말 머리 귀신은 들고 있던 꽃을 입에 털어 넣고는 그대로 삼켰다. 곧이어 하늘을 향해 길게 울부짖었고, 돌연 눈부신 붉은 빛이 폭발하듯 몸에서 발산되었다. 또한 그의 기운도 끝이 보이지 않는 하늘처럼 끝없이 불어났다. 그 바람에 옆에 있던 심협도 바로 10여 장을 밀려나 버렸다.
심협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 눈앞의 귀신은 더 이상 보잘것없는 무명 귀신이 아닌 거대한 괴수 같은 존재였다.
“어, 너는……?”
공중에서 기이한 목소리가 전해지더니, 내려오던 거대한 손이 공중에서 잠시 멈추었다.
말 머리 귀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갑자기 품속을 뒤지더니 길이가 1척 정도 되는 검은 붓을 꺼내 머리 위의 허공을 찍었다. 정제된 철로 주조한 것 같은 검은 붓에는 빼곡한 부적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말 머리 귀신이 붓으로 허공을 찍은 순간, 붓에서 눈부신 붉은 빛이 일더니 붉은 부적 문양이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심협이 머리 위를 보니 모든 부적 문양이 한곳에 모여 하나의 문장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문장의 글자들을 모두 다 알아보지는 못했다. 어렴풋이 핵귀(劾鬼), 주사(誅邪) 등의 글자만 알아볼 수 있었다.
문장을 이룬 부적 문양은 순식간에 거대한 붉은 빛이 되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우렛소리와 같은 굉음이 울려왔다.
꽝!
거대한 검은 손은 그 공격에 조금씩 후퇴하더니 그대로 구름 안으로 숨어 돌아갔다.
심협은 이 광경을 보고 있자니 어안이 벙벙해졌다.
“구혼필(勾魂筆), 핵귀시(劾鬼詩), 구혼사자(勾魂使者)…… 너구나, 구혼마면(勾魂馬面)?”
저 멀리 하늘에서 흑산노요의 놀라고도 분노한 목소리가 메아리쳐 왔다.
“구혼마면?”
이 말에 심협 역시 놀랐고 또 의아했다.
한편, 구혼마면은 흑산노요의 성난 외침에는 대꾸도 않은 채 검은 붓을 거두어 허공에서 맹렬히 그었다. 그러자 붓 끝에서 붉은 빛이 크게 방출되더니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폭 3척에 길이 1장에 이르는 틈을 만들어냈다. 그 안에서는 회백색 안개가 넘쳐 나오고 있었다.
심협이 어찌 된 일인지 파악도 하기 전에 구혼마면이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곧장 심협을 걷어찼다. 이에 심협은 비틀거리며 구혼마면이 만든 틈으로 빠져들었다.
구혼마면과 그의 손에 들린 검은 붓에 동시에 피처럼 붉은 빛이 일었고, 이 둘은 마치 고운 가루처럼 점점 사라져 갔다.
심협의 귓가로 구혼마면의 마지막 말이 전해져 왔다.
“꽃이 지고 사람이 죽는 것은 고작 차 한잔 마실 시간의 일…….”
곧이어 허공에 생겨났던 틈은 사라졌고, 우렛소리와 같은 흑산노요의 성난 포효만이 허공에 메아리쳤다. 그 소리도 점점 멀어지더니, 결국 사라져 버렸다.
천지가 빙빙 도는 것 같았고,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그리고 이내 붉은 꽃을 꼭 잡은 채 다른 곳에 나타난 심협은 붉은 꽃이 발하는 붉은 빛에 뒤덮여 있었다.
그는 옅은 회백색 안개가 감도는 낯선 곳에 서 있었는데, 근처에는 높이가 10 장은 족히 넘어 보이는 거대한 패루(*牌樓, 문짝이 없는 대문 모양의 건축물)가 서 있었다. 홍예문(*虹霓門,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은 전체가 칠흑처럼 검었고, 요사스러운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패루는 원래 3칸에 4개의 기둥, 7개의 누각으로 구성되어야 하는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좌측은 이미 절반은 붕괴되어 기둥 3개와 두 칸만이 그나마 온전히 남아 있었다. 그 지붕의 처마 끝에는 모두 사람 머리만 한 구리 방울이 달려 있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구리 방울들이 분명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데도 아무런 소리가 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