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요풍(妖風)
심협은 백소천을 따라 거처로 돌아왔다.
문에 들어서자 열서너 살쯤 된, 계집종 차림의 영리해 보이는 소녀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도련님’을 외치며 맞이했다.
“녹수(綠袖)! 이 계집애가 왜 아까 대문에서 나를 맞이하지 않은 것이냐?”
백소천이 활짝 웃으며 소녀의 통통한 볼을 꼬집듯 잡았다.
“아야야! 소녀 도련님께서 손님을 모시고 돌아 오신다기에 급히 객방을 정리하느라 바빠서 깜빡했습니다. 생각이 났을 땐 도련님께서 가주께 가 계셨고요. 그래서 이리 돌아와서 기다리고 있지 않았습니까?”
소녀는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 깜찍한 계집애는 녹수라고 하네. 여섯 살 때부터 나를 모셨지. 내 줄곧 이 아이를 여동생으로 여기고 있다네. 하하!”
백소천은 말을 마치자마자 심협을 소개해줬는데, 실제로 도련님 행세를 한다기보다는 귀여운 여동생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심 공자님을 뵈옵니다.”
녹수는 심협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냥 심 대형이라 부르게.”
심협은 손을 내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도련님, 심 대형. 두 분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시지요? 방 안에 목욕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어서 몸을 담그고 피로를 푸시지요.”
녹수는 두 사람을 방 앞으로 안내했다.
“네가 말하기 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더니 네 말을 듣고 나니 정말 온몸이 뻐근하구나. 이렇게 하자. 녹수 너는 우선 심 아우를 데리고 들어가 목욕 시중을 들어라. 나는 오늘 다른 사람이 시중을 들면 된다.”
백소천이 진짜로 어깨가 뻐근한 듯 팔을 돌리더니 웃으며 말했다.
“소녀 명 받들겠습니다.”
녹수는 급히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백소천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고, 심협은 녹수의 안내를 받아 객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객방에 들어서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객방이라고는 하나 그가 집에서 쓰던 방보다 훨씬 좋았고, 명문가의 품격이 느껴졌다. 바로 침상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탁자와 의자, 다기가 놓인 객실이 보였다. 더 들어가서 또 문을 지나야 침실이었다.
앞에서 안내하던 녹수가 안쪽 문을 열자 진한 약초 냄새와 신선한 꽃향기가 뒤섞인 짙은 향내가 풍겨왔다.
“향기로우면서도 질리지 않고 따스하면서도 건조하지 않으니,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향이구려. 보아하니 목욕물에 홍화(紅花)와 당귀(當歸)를 비롯해 혈액과 경맥의 순환을 돕는 약물이 들어 있나 보오. 신경 안정 작용이 있는 약초도 들어갔지요?”
심협은 문 앞에 서서 슬쩍 향기를 맡더니 바로 물었다.
“심 대형께서 이리도 약리(藥理)에 정통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심 대형 말씀이 모두 맞습니다.”
녹수는 가볍게 입을 가리고는 맑은 눈동자로 눈웃음을 지었다.
“그저 약간의 지식이 있을 뿐이오. 녹수 낭자에게 민망한 꼴을 보였구려.”
심협은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우리 도련님이 진정 친구로 여기는 분은 얼마 안 됩니다. 그러니 심 대형도 분명 대단한 분이실 겁니다.”
녹수는 동그란 얼굴로 환하게 미소 지으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심협은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 왼편 벽에는 꽃무늬가 새겨진 상아 침상이, 오른손 닿을 곳 근처에는 병풍이 하나 놓여 있었다. 병풍 뒤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심 대형, 계집종들을 불러 심 대형의 목욕 시중을 시키겠습니다.”
녹수가 다가와 심협이 겉옷 벗는 것을 도우며 말했다.
심협은 정중히 녹수의 시중을 사양했다.
“녹수 낭자, 수고할 필요 없소. 내가 직접 하면 되오.”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도련님께서 분부하셨으니 필히 심 대형을 잘 모셔야 합니다.”
녹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급히 말했다.
“괜찮소. 내 이미 혼자 목욕하는 데 익숙해 누가 옆에 있으면 오히려 불편하다오. 혹시 백 형이 책망할까 우려된다면, 밖에서 나와 한담이나 나눠주시오.”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 이 말은 진담이 아니었다. 심협은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누군가의 시중을 받는 게 익숙한데 어찌 목욕 시중드는 것이 불편하겠는가? 사실 그의 품에 석합이 있고 그 안에 옥침, <무명천서>, <순양보전> 등이 들어 있어 누군가에게 보이기 싫었던 것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밖에서 심 대형과 한담을 나누겠습니다. 심 대형께서 제가 말재주가 없다고 싫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녹수는 입을 삐죽이며 이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곧 계집종 두 명이 어디선가 둥근 의자를 들고 왔고, 녹수는 밖에서 그 의자에 앉았다.
심협이 병풍 뒤로 가 보니 욕조 옆 탁자에 새 옷이 놓여 있었다. 심협은 품에서 석합을 꺼내 탁자에 두고 옷으로 덮었다. 그러고 나서야 며칠 동안이나 입었던 옷을 옆에 대충 벗어두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온도가 딱 알맞은 약액에 몸을 담그자 온몸의 모공이 열리는 것만 같았다. 줄곧 긴장되어 있던 몸과 마음도 점차 편안해져 갔다.
“심 대형, 이번에 대형과 도련님께서 돌아오시는 길에 요괴들의 추격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혹시 위험하지는 않으셨습니까?”
녹수는 밖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심협이 아무 말을 않자 먼저 입을 열었다.
“위험하기는 참 위험했소. 하지만 결국 모두 운 좋게 모면할 수 있었소.”
심협은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대충 얼버무렸다.
“사실 요즘 건업성 주변도 그리 태평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듣자 하니 성 밖 십리포(十里鋪) 쪽에 이미 여러 사람이 죽어나갔다고 하는데, 다들 요괴에게 현혹당한 것이라고들 합니다. 어떤 이는 스스로 강에 몸을 던졌고, 어떤 이는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 하지요. 제일 황망한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베었다고 합니다. 모두 놀랄 만한 일들이지요.”
녹수는 심협이 얼버무린 것을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모두 항간에 떠도는 소문일 뿐이니 녹수 낭자 그리 놀랄 것 없소. 게다가 낭자가 있는 곳은 이름난 퇴마세가인 백씨 집안이 아니오? 어느 요괴가 감히 이곳에서 설치겠소?”
심협이 위로하듯 말했다.
“그건 그렇습니다. 하하! 어쨌든 마물(魔物)이 아닌 보통의 요괴나 귀신이라면 가주님이나 장로님들 중 한 분만 나서셔도 충분히 멸하실 수 있겠지요.”
녹수의 말에 심협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떠보듯 물었다.
“녹수 낭자, 혹시 백씨 집안에서 마물을 물리쳤던 일을 알고 계시오?”
“그건 100년도 더 된 일입니다. 장로님들께서는 그 일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으셔요. 그러니 노인들이라면 모를까, 저는 알지 못하지요. 그런데 제가 최근 퇴마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게 있는데, 이야기에 참과 거짓이 얼마나 섞여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녹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화제를 돌리려 했다.
“어차피 한담을 나누는 중 아니오? 이야기해주겠소?”
심협은 호기심이 생긴 듯 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건업성 밖, 자운산(紫雲山) 근처에 도원촌(桃源村)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녹수도 마치 이야기보따리를 풀듯이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대로 번영한 도원촌이라는 마을에 옛날부터 거대한 감복숭아 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누구도 이 감복숭아 나무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몰랐다. 그저 이 나무의 수령이 천 년은 넘었다는 것만 알뿐이었다.
듣기로는 이 감복숭아나무는 매년 꽃이 피었는데, 수백 년간 열매를 맺은 적은 없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때문에 고민했지만, 이 나무를 길하게 여겨 잘 돌봤다.
그런데 어느 해, 이 나무에 꽃이 가장 만발했을 때, 하늘에서 돌연 요풍(妖風)이 내려오더니 짙은 검은 안개가 나무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나무에 다가설 수가 없었고, 나무의 잎과 가지들이 빠르게 시들어 분분히 떨어져 내렸다.
당시 촌정(*村正, 마을의 우두머리) 진수안(秦守安)이 나무를 지키기 위해 횃불과 땔나무 베는 칼을 휘두르며 요풍을 쫓으려 했지만, 오히려 자신도 요풍에 휩싸였다.
후에 요풍이 더욱 기승을 부려 진수안과 각종 들짐승들을 조종해 마을 사람들을 공격하게 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돈을 모아 외부에서 선사(仙師)를 모셔 요풍을 물리치고자 했는데, 선사 서너 명이 연달아 소식이 두절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결국 촌정 진수안의 딸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도움을 청하고자 온갖 고생을 해가며 건업성으로 향했다. 그런데 도중에 우연히 벽곡기의 대협을 만났다. 그녀의 효심에 감동한 대협은 도원촌으로 가서 요풍을 물리쳤다. 그런데 그 요풍이 수련 단계가 높은 마물이라도 되는 것인지, 진수안과 들짐승들은 모두 마화(魔化)되어 매우 잔인하게 변해 있었다.
대협은 악전고투 끝에 결국 진수안을 구해냈다고 하는데, 그 종적은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럼 그 요풍은? 죽은 것이오?”
이야기가 끝나자 심협이 물었다.
“제가 들은 이야기에는 그 내용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도원촌에 그 이후 환난이 없었다는 걸로 보아 아마 죽은 것 같습니다.”
녹수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
하지만 심협은 그 요풍이 죽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자세한 것은 그 ‘대협’이라는 사람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마친 녹수는 또 다른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그러던 중 백소천이 찾아와 연회에 참석하라고 재촉하고서야 두 사람의 한담이 끝났다.
심협은 깨끗한 푸른 원령포로 갈아입고 석합을 다시 품에 챙긴 후, 백소천을 따라 연회에 갔다.
* * *
밤이 되자 심협은 옥패를 꺼내 <순양보전>의 공법을 살펴보려 했다. 하지만 방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졸음이 쏟아지더니,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문득 차가운 기운이 엄습해왔다. 몸을 한번 부르르 떤 심협은 무의식적으로 이불을 잡아 끌려고 했는데, 이불은 잡히지 않고 얼음장처럼 차갑고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슬그머니 짜증이 난 심협은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재빨리 몸을 일으켜 앉았는데, 곁에서 금속성이 들려왔다. 그의 몸을 덮었던 창 몇 개가 서로 부딪히며 땅으로 떨어진 것이다. 지난번 기이한 꿈을 꿨을 때 오통령에게서 얻은 화염 단창들이었다.
그는 자신이 또 기이한 꿈에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고…….”
“사, 살려주세요.”
어찌 된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뒤에서 처참한 비명들이 들려왔다.
몸을 돌려 보니, 몇 장 뒤에 일고여덟 개의 굵은 청동 기둥이 서 있었다. 기둥에는 녹이 잔뜩 슬어 있었고, 검은 기운이 응집되어 만들어진 줄이 감겨 있었다. 퍼런 얼굴에 입 밖으로 날카롭게 튀어나온 이빨을 가진 흉측한 귀신들이 꼼짝도 못 하게 청동 기둥에 줄로 묶여 있는 상태였다.
어째서인지 귀신들은 모두 맥없이 축 처져 있었다. 그중에는 팔이나 다리가 없는 귀신도 있었는데, 보고 있자니 처참한 느낌이 들었다.
심협은 무의식적으로 단창 두 자루를 잡고 대여섯 걸음을 물러섰다.
그런데 그의 발소리가 주의를 끈 것인지 귀신들이 분분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심협을 발견하자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퍼런 머리에 눈이 붉은 한 귀신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비명을 질러댔고, 배까지 길게 혀를 빼어 문 목매달아 죽은 귀신은 바짝 마른 손을 심협에게로 뻗었다. 옆에서는 머리 잘린 귀신이 자신의 머리를 손에 들고 심협을 향해 흔들었다.
심협은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가 겨우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서 있는 곳은 물론이고 청동 기둥들이 있는 곳까지 모두 꽤나 큰 원형의 제단(祭壇) 위임을 알 수 있었다.
제단 중앙에는 흙을 채워 다져 놓았다. 하지만 둘레에는 겹겹이, 그리고 빽빽이 사람의 두개골을 겹쳐서 만든 백골 경관(*京觀, 유해를 쌓아놓은 것)이 있었다. 모두 제단 안쪽을 향해 녹색 빛을 비추고 있어 심협은 등골이 오싹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하늘은 어두침침했다. 두터운 누런 구름 하나가 하늘을 낮게 짓누르고 있어 기괴하고도 중압적인 분위기였다.
제단 주변은 지세가 넓었는데, 살아 있는 생명체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쥐 죽은 듯이 고요한 황야 같았다.
“심협, 심협…….”
돌연 뒤에서 심협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협이 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말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붉은 귀신이 기다란 주둥이를 벌린 채 사람의 말로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또한 귀신은 하나 남은 팔을 격하게 흔들고 있었다.
심협은 크게 놀라면서도 저 귀신이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귀신의 복장은 다른 귀신들과 달리 아역(*衙役, 관아에서 부리던 하인)의 복장과 비슷했다.
“도대체 무슨 귀신이오? 어찌 내 이름을 알고 있소?”
심협은 조심스레 조금 다가가며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