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86화 (86/1,214)
  • 86화. 백씨 집안의 가주

    백소천은 어디선가 작은 술잔 두 개를 꺼내 술을 따르더니 한 잔은 심협에게 건넸다. 둘은 술잔을 부딪치며 술을 마셨다.

    백소천은 거리의 주루와 음식점들을 꿰고 있어, 마차가 달리는 내내 심협이 물을 때마다 하나하나 평을 들려줬다. 그러다가 성을 가로지르는 강을 지나게 되었을 때, 백소천이 갑자기 창가로 다가와 밖을 내다보았다.

    그때까지 창밖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던 백소천이 밖을 내다보다 궁금해진 심협도 재빨리 따라붙었다. 창밖에는 강 양쪽으로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건물들은 모두 등(燈)과 화려한 천들을 걸고 있었고, 장식도 화려했다. 심지어 강에는 정교하고 운치 있는 놀잇배들이 떠 있었다.

    “여기가 어디요?”

    심협이 물었다.

    “이런 시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밤에 진회(秦淮)에 배를 정박하니 술집이 가깝구나’. 이곳이 바로 그 시의 진회하(秦淮河)라네. 기생이 나오는 술집이 모인 곳이지. 내 나중에 데리고 가 주겠네.”

    백소천은 심협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연지 냄새가 진동하더라니……. 허나 우리는 수련하는 사람들 아니오? 그러니 화류계는 멀리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심협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

    “자네가 뭘 몰라서 하는 말이네. 속세를 제대로 겪어봐야 반석과 같은 도심을 얻을 수 있다지 않나? 속세의 산전수전을 다 겪어보지도 않고 어찌 속세를 논할 수 있겠어?”

    백소천은 심협의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듯 그렇게 말하고는 웃었다.

    마차는 성을 가로질러 갔다. 성 남쪽으로 갈수록 길가에 사람은 줄어들었고, 대신 한적한 곳에 대저택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마차가 웅장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려 보니 옆에는 사람만 한 돌사자가 있었는데, 발밑에 누공(漏空)으로 조각한 공을 밟고 있는 모습이 꽤나 위엄이 넘쳤다.

    돌사자 뒤 1장 정도 너머로 3개의 계단이 있었고, 그 바로 위에는 높이가 2장에 이르는 웅장한 문루가 서 있었다. 중간의 정문은 열려 있고 양쪽의 협문은 닫힌 채였다. 문머리에는 거대한 편액이 걸려 있는데, 붉은 바탕에 금빛 글씨로 ‘백부(白府)’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심협은 붉은 칠을 한 대문에 사자가 새겨진 문고리와 함께 49개의 금빛 못이 상감되어 있는 것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랫사람이 미리 통보를 한 것인지 대문 밖에는 10여 명의 시종과 여종들이 하나같이 공손한 표정으로 심협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강풍과 백소천이 입구에 이르자 문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맞이했다. 심협도 백소천을 따라 백씨 집안 하인들에게 둘러싸여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일행이 앞뜰까지 이르자 화려한 복장의 백발 노부인이 여종의 부축을 받으며 이들을 맞았다. 노부인은 아직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백소천을 보더니 안타까운 기색으로 한바탕 책망을 했다.

    백소천의 소개를 받고서야 심협은 노부인이 백소천의 조모이자 현재 백씨 집안의 가주(家主) 백학성(白鶴城)의 생모임을 알게 되었다.

    노부인은 손자를 아끼는 만큼 그 친구인 심협도 반겼다. 그녀는 성대한 연회를 마련해 손님을 잘 대접할 것을 분부했다.

    심협은 과분한 대접에 황송하면서도 겸연쩍었다.

    그런데 그때, 집사인 듯한 중년 남자가 급히 다가오더니 노부인과 백강풍에게 예를 갖추고는 입을 열었다.

    “가주께서 후원 서재에서 기다리십니다. 도련님과 손님께서는 가보시지요.”

    “천아, 가 보거라. 바깥일 이야기가 중요하지.”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온화한 목소리로 백소천에게 말했다.

    “네, 이 손자가 어서 아버지를 뵙고 다시 조모님을 모시겠습니다.”

    백소천이 웃으며 대답했다.

    심협과 백소천, 백강풍까지 세 사람은 여러 뜰과 두 곳의 화원을 거쳐 집안 깊은 곳 후원에 이르렀다.

    서재에 들어서자 백씨 집안 가주 백학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위세가 남다른 중년 남자일 것이라는 심협의 예상과 달리 백학성은 아들인 백소천 못지않게 외모가 준수한 30대 후반의 젊은 남자였다.

    세 사람이 들어오자 백학성은 수중의 책을 내려놓고 책상에서 일어났다. 이어서 백소천과 심협을 위아래로 살피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오는 길에 고생을 꽤나 한 모양이구나.”

    “다행히 위기 때 셋째 할아버지께서 요녀를 쫓아 주셨습니다. 아버지께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

    백소천은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곧이어 그는 심협을 아버지에게 소개했다. 이번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심협과 서로 도왔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둘이 잘 대응했구나. 실전 없는 3년의 수련보다도 훨씬 값진 경험이 될 것이다.”

    백학성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 이번에 실로 위험했네. 이 아이들을 추격한 자는 벽곡기의 요족 수사였지. 그때까지 이 아이들이 버틴 것만 해도 놀라울 정도라네.”

    백강풍은 앞으로 나서며 자신이 백소천을 구하러 나타났을 때 보았던 광경을 알려주었다.

    “소천이가 이번에 살아 돌아온 것은 셋째 숙부님 덕분입니다.”

    백학성은 백강풍이 말을 마치자 공손히 절을 했다.

    “가주, 이리 예의 차릴 것 없네. 소천이는 훗날 우리 집안을 이끌어가야 할 동량(*棟梁, 대들보, 집안이나 나라를 떠받치는 중대한 일을 맡을 만한 인재)이니 집안 어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야.”

    백강풍은 급히 백학성의 절을 사양하며 말했다.

    “소천아, 이번 춘추관의 변고는 어찌 된 일이냐? 전후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 보거라.”

    백학성은 백소천을 보며 물었다.

    백소천은 이번에도 백강풍에게 말했던 것처럼 <순양보전>에 관한 이야기는 뺀 채 춘추관의 일들을 빠짐없이 설명했다. 백소천이 모르거나 놓친 상황은 심협이 덧붙였다. 다만 그도 <순양보전>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춘추관의 큰 어르신도 이미 화를 당하셨다니…… 심 세질(世侄), 당분간 우리 백부에서 지내게. 내 다른 수선(修仙) 종파와 연합해 이 일을 철저히 조사해 배후의 원흉을 찾아내겠네.”

    설명을 끝까지 들은 백학성은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백부(伯父)님, 저는 이번 변고에 큰 역할을 한 자가 둘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은 사문을 배반한 왕청송이고, 다른 하나는 몰래 잠입해 있었던 요족 고화령입니다. 그들 중 하나라도 잡을 수 있다면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심협의 말에 백학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심 세질의 말대로 그 두 사람이 분명 춘추관 변고의 화근이네.”

    “이 후배, 부디 백부님께서 배후의 원흉을 찾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심협, 춘추관의 원혼들을 대신해 백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심협은 감사를 표하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큰 절을 올렸다.

    “심 세질, 일어나게. 오는 길이 험난했으니 원기가 크게 상했을 것이네. 소천아, 네가 심 세질을 데리고 가서 편히 쉬도록 해 주거라.”

    백학성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두 사람이 물러가자 백학성이 백강풍을 돌아보며 물었다.

    “셋째 숙부님, 심협에게서 이상한 점 발견하시지 못하셨습니까?”

    “그자의 말씨나 행동거지로 보아 춘추관에 입관하기 전 분명 부잣집 자제였을 걸세. 소천이가 꽤 신임하더구나. 그 둘이 힘을 합쳤기에 내가 구하러 갈 때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게야. 그런데 그자의 공법이 소모산 계열은 아니니 아마도 따로 기연(機緣)을 만난 모양이네. 아마 소천이를 제외하면 그가 춘추관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제자일 게야.”

    백강풍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통이 아닌 자 같습니다. 어쩌면 춘추관의 비밀을 감추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심협의 출신 배경과 내력을 조사해 봐야겠습니다. 문제가 없다면 소천이를 시켜 우리 집안에 들어올 의향이 있는지 물어 거둬야겠습니다. 세상이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있어 수선 종파들이 춘추관처럼 멸문당하는 일이 우리 대당 경내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힘을 더 비축해야겠습니다.”

    백학성의 말에 백강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네만 우리 집안은 한동안 스스로를 지키고도 남을 게야. 갈수록 많은 종파가 천지 대겁(大劫)이 올 거라 믿고 있네. 수행계가 겉보기에는 평온해 보이지만, 진작부터 암암리에 불길한 기운이 요동쳤지. 내 보기엔 춘추관 변고의 배후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 같네. 우리 집안 내부도 조사해봐야 할 걸세.”

    백강풍의 건의에 백학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집안을 철저히 조사해 요족의 잠입을 막아야겠습니다. 일전에 어르신께서 천지 대겁을 언급하셨으니, 이 또한 부담이 적지가 않습니다.”

    뒤이어 백학성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 할 때, 노회한 목소리가 돌연 두 사람의 마음속에 직접 울려왔다.

    “강풍, 학성…….”

    “어르신.”

    백학성과 백강풍은 곧장 경건한 표정으로 예를 갖췄다.

    “춘추관의 일은 내 이미 알고 있다. 허나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그게 아니다.”

    백씨 집안 어르신이 말했다.

    백학성과 백강풍은 말없이 공손히 서서 어르신의 분부를 기다렸다.

    “춘추관이 이미 멸문을 당했는데 소천이는 아직 <순양보전>을 배우지 못했구나. 소천이를 또 다른 수선(修仙) 대종파로 보내야겠다. 소천이가 더 강력한 술법을 익혀 하루빨리 인재가 될 수 있을지 봐야겠구나.”

    “어디로 보낼지 어르신께서 알려주십시오.”

    백학성은 어르신이 정해둔 목적지가 있을 것임을 예상하고 공손히 말했다.

    “내 일찍이 화생사(化生寺)와 약간의 교류가 있었지. 사람을 보내 서신을 전달했으니 며칠 안에 회신이 올 것이네.”

    백씨 집안 어르신의 목소리가 이어졌고, 백학성은 자신도 모르게 기쁜 기색을 드러냈다.

    장안성 근처에 위치한 화생사는 대당 경내에서 1, 2위를 다투는 수선 대종파였다. 특히 그곳의 금강복마(金剛伏魔) 대법은 이름을 떨쳤다. 명성으로나 규모로나 춘추관보다 훨씬 위였다.

    “소천이가 화생사에서 수행할 수 있다면 이는 분명 우리 집안의 복입니다.”

    백강풍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벌써 그리 기뻐할 것 없다. 화생사와의 교분이 그리 두터운 것이 아니다. 소천이를 들어가게 한다 해도 당분간 외문제자로 지낼 수밖에 없을 터. 수준 높은 진정한 술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소천이가 스스로 쟁취해내야 할 걸세.”

    백씨 집안 어르신의 목소리가 다시 전해져왔다.

    “소천이의 자질은 매우 뛰어납니다. 다만 성격이 너무도 자유분방하여 수련에 영향을 줄 뿐입니다. 그래도 이번 경험으로 배운 것이 있을 테니 분명 앞으로는 더욱 분발하겠지요. 그러니 소천이도 어르신께서 공들여 키워주시려는 노고를 절대 헛되지 않도록 할 겁니다.”

    어르신은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고, 두 사람만 남은 백학성과 백강풍은 벌써부터 마음이 들뜨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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