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81화 (81/1,214)
  • 81화. 또 한 번의 소환

    백소천은 포대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10여 개의 은색 옥과 8개의 금색 깃발, 그리고 2개의 하얀 약병에 이어 8개의 원석이 나타났다.

    “백 사형, 이건 모두 법진을 펼치는 물건 아니오?”

    옥과 깃발들을 보고 있자니 꿈속에서 우혁 등의 선사들이 요괴들을 상대하던 광경이 떠올랐다.

    “역시 사제는 안목이 있군! 이건 진기(陣旗)와 진반(陣盤)이네.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어 아쉽군. 망을 좀 봐주게.”

    백소천이 새삼 감탄한 눈으로 심협을 보더니 말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손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지름이 반 장(丈) 정도 되는 원 형태로 옥과 깃발들을 바닥에 꽂았다.

    백소천은 다시 6개의 원석을 가져다가 원형 법진에 꽂고 일어나 손을 결인하더니 무어라 주문을 읊었다. 그러자 법진 안에 금색 빛이 솟구쳐 법진을 에워싸고 서서히 흐르기 시작했다. 법진 근처에는 순식간에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법진이 거의 완성되었군. 사제, 내 이제 법진 안에서 비술을 시전하려 하네.”

    백소천은 진을 자세히 살핀 후에 이상이 없자 심협에게 말했다.

    “안심하시오. 내 망을 잘 보겠소.”

    심협이 웃으며 대답했다.

    백소천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법진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양손을 수레바퀴 모양으로 빠르게 움직이자 순식간에 그의 몸에서 붉은 빛이 일기 시작했다. 법진 안의 금색 빛도 훨씬 밝아졌고, 움직임도 눈에 띄게 빨라졌다.

    심협은 시야가 확 트이는 곳에 찾아 앉더니 봇짐에서 석합을 꺼냈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고화령이 쫓아오려면 최소 반나절은 필요할 테니 그 틈에 부적을 몇 장 써두려는 것이었다.

    붓과 주사 등은 있었지만 검은 개의 피는 오래 보관할 수 없는 탓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심협에겐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작은 칼로 손가락을 그어 피를 내더니 주사에 섞어 부적 쓸 준비를 했다. 부적에 검은 개의 피를 사용하는 것은 그 안의 양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심협은 소화양공을 완성한 데다가 연기기 수사가 되었으니 그의 피에 담긴 양기는 개의 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심협은 금세 주사와 피를 섞고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후 붓을 들어 부적을 쓰기 시작했다.

    반 시진이 채 지나지 않아 부적용 종이가 다 떨어졌다. 대신 부적 세 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소뢰부 두 장과 구귀부 한 장이었다.

    “세 장 밖에 없지만 어쩔 수 없지.”

    심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더니 세 장의 부적을 소매 안에 챙겨 넣었다.

    백소천은 법진 안에서 눈을 감고 앉아 결인하고 있었는데,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었다.

    심협은 그를 방해하지 않고 사방을 둘러보며 어떻게 고화령을 상대해야 할지 계획을 짜고 있었다. 다행히 최근 며칠 동안 쫓고 쫓기면서 고화령의 실력에 대해서도 많이 파악할 수 있었다.

    “분명 벽곡기에는 이르렀겠지. 게다가 은밀하고 요사스러운 술법을 많이 알고 있고, 법기인 삼첨조자도 있지. 나나 백 사형보다 월등해. 그러니 부적 몇 장 더 써봐야 별 소용도 없을 게야.”

    그렇다고는 해도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가 지금 쓸 수 있는 술법은 답수결과 통령역요 술법뿐이로구나. 너무 적…… 응? 통령역요…… 술법?”

    심협은 속으로 탄식하다가 돌연 눈을 번쩍 떴다.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통령역요 술법을 다시 한번 시도해보자! 수족(水族) 요괴 한두 마리를 더 굴복시키면 조금이라도 승산이 커지겠지!”

    심협은 마음을 정하고는 호숫가에서 소귀를 불러냈다.

    소귀로 말할 것 같으면, 행동은 굼뜨고 위력은 평범하나, 맷집도 세고 회복 능력이 뛰어났다. 예전에 입었던 부상도 요 며칠 만에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다.

    심협은 소귀에게 사방을 잘 감시하라고 분부한 뒤 호수로 들어갔다. 그리고 수심이 무릎 위까지 올 정도가 된 곳에 이르자 가부좌를 틀고는 손을 결인한 채 통령역요의 술법을 운공했다.

    시야가 금세 어두워졌고, 신식의 공간에 진입했다.

    심협은 꿈속에서 통령역요의 술법으로 추두를 굴복시킨 경험 덕에 현실에서 이 술법을 시전하는 것이 더욱 능숙하고 순조로워진 것을 느꼈다. 그래서 지금도 통령역요 술법을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수많은 파란 광점들이 나타나 주변을 떠다녔다.

    심협은 주위를 훑어보다가 근처에서 가장 큰 광점을 찾아 조심스레 신식을 이끌어갔다. 눈앞이 흐려지는 듯하더니 곧바로 탁 트인 푸른 공간이 나타났다. 꿈속에서 들어갔던 수역과 비교해도 결코 좁지 않은 곳이었다.

    물결 같은 푸른 빛이 사방에서 요동치더니 광활한 푸른 바다가 생겨났다. 그곳에는 막강한 요족들의 숨결이 숨겨져 있었는데, 꿈속에서 들어갔던 푸른 바다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이곳은…… 어쩌면 내가 꿈속에서 들어갔던 수역일지도……?”

    심협은 조심스레 신식을 뻗어 너무 강한 요족은 피하고 적당한 통령지수를 찾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목표를 정할 수 있었다. 수련 수준이 자신보다 조금 강한 것이 분명 연기 중기쯤 되어 보이는 요족이었다. 이 정도도 제법 위험이 따랐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시도해보기로 했다.

    그는 신식을 뻗어 상대와 접촉했다. 그러나 성난 포효만이 전해져올 뿐, 아무런 답도 들을 수 없었다. 소귀처럼 아직 영지가 깨이지 않은 요족인 듯했다. 그러니 말을 할 수는 없었으나, 통령지수가 되지 않겠다는 의사는 분명히 했다.

    하지만 심협은 개의치 않고 통령역요 술법 중 위협의 수단을 묵묵히 운공했다. 그러자 무수히 많은 검은 부적 문양이 퍼져갔다. 이 술법 또한 비록 꿈속에서 시전했던 것처럼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상당한 수준이었다.

    상대 요족은 연신 포효하며 전력으로 저항해왔다. 하지만 추두에 비하면 한참 부족해 힘 조절도 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조차 염두에 두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괴는 도망치려 했다. 아마 통령역요의 술법을 벗어나려는 것 같았다.

    심협은 내심 기뻤다. 이 통령역요의 술법은 꽤 정묘하여 수역 전체를 감지할 수 있는데 자신에게서 어찌 쉽게 도망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 요괴가 이리도 무모하게 도망치려 한다면 힘의 소모가 커질 것이니 더 빨리 굴복시킬 수 있을 터였다.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지나자, 요괴의 포효는 분노에서 애처로운 비명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조금 흐르자 결국 항복 의사를 표해왔다.

    심협은 급히 통령역요 술법을 운공해 통령 표기를 만들어 요괴의 체내에 주입하고서야 시전을 멈췄다. 그러자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다시 호수로 돌아왔다.

    심협은 법력이 절반밖에 소모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눈빛을 빛냈다. 지금 자신의 수준으로 이리도 쉽게 연기 중기의 요괴를 굴복시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물론 꿈속에서 무명공법의 제3층까지 수련하면서 얻은 깨달음 덕이었다. 게다가 꿈속에서 추두를 굴복시킨 경험도 큰 도움이 됐다.

    심협은 다시 또 기이한 꿈을 꾸게 된다면 무명공법이나 통령역요 술법들을 더 많이 수련하리라 마음먹었다. 현실에서의 자신은 수련 자질이 너무도 부족하니 정진이 쉽지 않았다. 그러니 기이한 꿈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했다.

    심협은 잡념을 떨쳐버리고 눈을 감은 채 휴식을 취했다. 그러다 법력이 거의 회복되었을 즈음 호수에 손을 넣어 묵묵히 소환술을 운공했다.

    호수가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심협의 손을 중심으로 물의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그 가운데에는 검은 물 동굴이 있었다.

    “나와라!”

    심협이 나지막이 외치자 소용돌이가 떠오르며 배로 커지더니 회백색 요기(妖氣)를 뿜어냈다. 이어서 길이가 5장에 이르는 회백색 물뱀이 물 동굴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물뱀의 머리는 납작했고 몸은 물통만큼이나 굵었다. 표피에는 밥그릇만 한 회백색 비늘이 있었는데, 어렴풋이 금속의 광택이 느껴지는 것이 퍽 견고해 보였다. 게다가 척추 부분에 몇 개의 지느러미가 튀어나와 있었다.

    근처 호수 안에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소귀는 물뱀이 나타나자 두려운 기색으로 급히 머리와 지느러미들을 등껍질 안으로 밀어 넣었다.

    회백색 물뱀은 나오자마자 심협을 노려봤는데, 가늘고 긴 눈에 사나운 기운이 요동치는 것이 승복하지 못하겠다는 뜻이 엿보였다.

    심협은 코웃음을 치더니 바로 한 손을 결인하고 통령역요의 술법을 운공했다. 그러자 물뱀은 통령 표기에서 고통을 느낀 듯 눈빛이 고통으로 물들었고, 계속해서 몸을 꼬았다. 물뱀의 거대한 몸이 호수 안에서 요동치니 사방에 물보라가 일었고, 뱀 꼬리가 수면을 칠 때마다 우렛소리 같은 굉음이 울렸다.

    깜짝 놀란 심협이 돌아보니 백소천은 여전히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다행히 이 상황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이에 안심한 심협은 다시 통령역요의 술법을 운공했다.

    잠시 후, 물뱀의 눈빛에서 사나운 기운은 모두 사라지고 애원하는 듯한 기운만 남았다. 그제야 심협은 술법의 시전을 멈췄다.

    머릿속을 울리던 고통이 사라지자 물뱀은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심협의 눈치를 봤다.

    “이리 와라.”

    심협이 손짓하자 잠시 망설이던 물뱀은 그대로 헤엄쳐 다가와 온순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이름이 있느냐?”

    물뱀이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본 심협은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물었다.

    물뱀은 고개를 들어 심협을 보더니 혀를 몇 차례 날름거렸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심협은 할 말을 잃었다. 보아하니 이 물뱀은 소귀보다 수련 수준은 조금 높아도 영지는 더욱 낮은 것 같았다.

    심협은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뱀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물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물뱀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는 꼬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꼬리가 바로 앞으로 날 듯이 튀어 나가는데, 속도가 놀랍도록 빨랐다. 마치 하얀 선이 물 안을 누비는 것 같았다.

    심협의 눈이 살짝 빛났다.

    물뱀은 호수 안에서 한 바퀴 헤엄치고는 물속으로 맹렬히 내려가더니 맷돌만 한 돌을 감고 올라왔다. 그러고는 힘을 주자 돌은 그대로 산산조각 나버렸다.

    곧이어 물뱀은 호숫가로 빠르게 이동하더니 머리를 내밀고 입을 벌렸다. 그러자 노란 액체가 근처 돌 위에 뿜어졌다. 그러자 그 부분이 검게 변하더니 칙 소리를 내며 돌의 절반 정도가 순식간에 녹아버렸다.

    물뱀은 고개를 돌려 심협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심협은 내심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물뱀이 보여준 능력들은 괜찮기는 하지만 특별하다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고화령 같은 벽곡기 고수 앞에서는 기껏해야 시간을 조금 벌어줄 정도에 불과했다.

    잠시 망설이던 심협은 손을 휘둘러 물 동굴을 만들어 물뱀을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다시 통령역요의 술법을 시전했다.

    방금 굴복시킨 요괴가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자신감이 커진 심협은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더욱 강한 요괴를 굴복시켜 보기로 한 것이다.

    머지않아 심협의 신식이 다시 한번 거대한 푸른 수역에 나타났다. 방금 통령 표기를 심어둔 덕에 수많은 요괴의 숨결 중 물뱀의 것이 가장 두드러졌다. 마치 어두운 밤중에 등잔불을 보는 것과 같았다.

    심협은 무명공법에 기재된 석령(*釋靈, 영을 풀어줌) 법결을 운공하여 물뱀의 통령 표기를 지웠다. 그제야 신식이 다른 요괴를 탐지할 수 있었고, 곧 연기 후기 정도의 요괴를 찾아냈다.

    심협도 절대로 벽곡기 요괴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꿈속에서도 죽을힘을 다한 후에야 가까스로 추두를 굴복시킬 수 있었는데, 그 당시 자신의 수련이 연기 후기가 아니었던가.

    이번 목표물은 여러 가지를 종합해 고른 것이었다. 고화령은 기이한 신통력을 지닌 데다 뼈 날개로 날 수도 있으니, 소귀나 물뱀 같은 요괴 하나 더 굴복시켜 봐야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더 강한 요괴를 굴복시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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