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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72화 (72/1,214)
  • 72화. 새로운 전승 수호인

    노인은 옥패를 살피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원진에게 무슨 일이 생겼느냐?”

    그는 심협이 이곳에 나타난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잠시 넋이 나가 있던 심협은 노인이 말하는 ‘원진’이 자신의 사부임을 깨닫고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사숙조께 아룁니다. 사부는…….”

    심협은 방금 나씨 도인의 거처에서 일어난 일들을 빠짐없이 설명했다.

    노인은 심협의 말을 듣다가, 변신한 고화령을 나씨 도인이 ‘요족’이라 했다는 대목에서 안색이 어두워졌다.

    “고화령…… 춘추관에 들어온 지 여러 해 되었는데 위장한 요족이었다니, 생각도 못 했구나. 요족들이 진작부터 우리 춘추관을 노리고 있었던 게로군.”

    노인은 탄식했다.

    “사숙조님, 사부님의 상황이 매우 위급합니다. 부디 구해주십시오.”

    심협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사숙조는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도포를 열어 보였다.

    그 도포 안을 본 심협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사숙조의 도포 안 우측 복부에는 주먹만 한 구멍이 나 있었다. 그 구멍에는 검은 결정체가 있었는데,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나 또한 원진과 마찬가지로 진즉 중독되었다. 방금 두 귀신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기까지 했으니 지금은 내 능력이 1할도 남아 있지 않다. 법력 또한 거의 남아 있지 않구나. 내 몸도 돌볼 수가 없는 상황이니라.”

    사숙조는 괴로워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선 이곳을 벗어나신 후 다시 방법을 생각해 보심은 어떠십니까?”

    심협이 심각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그러나 사숙조는 고개를 젓더니 돌연 물었다.

    “춘추관의 내문제자 셋은 내 모두 알고 있는데, 너는 누구냐?”

    “제자 심협, 방금 이곳으로 오기 직전에 사부가 내문제자로 거두셨습니다. 제자가 사숙조님을 모시고 이곳을 떠나게 해주십시오.”

    심협은 더욱 조급하게 말했다.

    “되었다. 너는 우리 춘추관의 내문제자이고, 법력도 가지고 있지 않느냐. 또한 원진이 너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너를 진정으로 신임한다는 뜻이다. 내 너에게 하나만 묻겠다. 우리 춘추관의 순양보전을 전수받아 소모산 춘추관의 명맥을 유지하겠느냐?”

    사숙조는 돌연 엄숙한 표정으로 심협을 근엄하게 바라보았다.

    “사숙조님, 제자는 물론 춘추관의 비전을 전수받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종파를 계승하는 문제는 실로 중요한 일이니 사숙조님께서는 우선 위기를 넘기신 이후에 다시 말씀하시지요.”

    심협은 사숙조의 말이 너무도 의외라 이해득실을 따져볼 틈도 없이 답했다.

    “이미 늦었느니라. 나의 부상은 매우 심각하다. 게다가 방금 그 귀신들이 법술로 내게 흔적을 심어놓아 이제 이 석실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 방금 녀석들을 죽였으니 아마 곧 더 강한 적이 찾아올 것이다. 쿨럭, 쿨럭!”

    말을 마친 사속조는 격렬하게 기침을 했는데, 그때마다 피가 새어 나왔다.

    “주저하지 말거라! 더 끌다가는 너와 나 모두 여기서 죽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춘추관의 계승도 끊어지게 되는 것이니라!”

    사숙조는 심협의 어깨를 잡으며 엄숙하게 말했다.

    “제자 받아들이겠습니다.”

    심협은 결심을 굳히고 맹렬히 고개를 들며 굳건하게 대답했다.

    “좋다. 심협, 지금부터 네가 춘추관 순양보전의 새로운 전승 수호인이다.”

    사숙조는 다소 풀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말을 마친 그는 심협의 손을 끌어다가 그 위에 증표 옥패를 올렸다.

    심협의 눈이 일견 평범해 보이는 둥근 옥패로 향했다.

    “사숙조님, 설마 이것이…… 순양보전입니까?”

    심협이 놀라 물었다.

    사숙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양손을 연달아 현묘하게 결인했다. 그리고는 심협의 손에 놓인 옥패를 계속해서 두들겼다. 그러자 옥패에서 하얀 빛이 번득이더니 광막이 나타났다. 광막에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커다란 문자들이 투사되었다. 순양보전의 공법 구결이었다.

    심협이 그 문자들을 자세히 보려고 할 때, 옥패의 하얀 빛이 돌연 번득이며 광막이 거두어졌다. 이에 변화하던 문자들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심협, 보전을 계승하려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사숙조가 진지하게 말했다.

    “사숙조님, 말씀하십시오.”

    심협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양심과 삼청(*三淸, 도교에서 숭상하는 세 최고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거라. 앞으로 너 스스로든 아니면 다른 사람을 찾든, 반드시 춘추관을 전승해야 한다. 또한 순양보전의 공법과 법술은 절대로 소모산 계파 외의 사람에게 전수해서는 안 된다.”

    수척한 사숙조의 눈빛에는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살기가 담겨 있었다.

    심협은 두려워졌다. 만일 응하지 않을 경우, 사숙조는 자신을 죽이고 순양보전을 없애는 한이 있더라도 순양보전이 세상에 흘러나가도록 하지 않을 기세였다.

    “맹세하기 싫은 것이냐?”

    사숙조는 대답이 없자 엄하게 되물었다.

    “제자 심협, 엄숙히 맹세하겠습니다.”

    심협은 정중히 대답했다.

    그제야 사숙조는 표정을 풀고 한결 부드러워진 눈으로 심협을 보았다.

    심협은 양심과 삼청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했다. 약속을 어길 경우 죽어서 시신이 뼛가루와 재가 되어 날릴 것이라는 엄숙하고 독한 맹세였다.

    사숙조는 심협의 맹세를 듣고서야 표정이 완전히 풀어졌다.

    “이것이 옥패를 여는 구결과 법결이다. 잘 기억해야 한다.”

    사숙조는 말을 마치자마자 구결을 두 차례 외었고, 옥패 여는 방법을 두 번 시범을 보였다.

    심협은 똑똑히 기억한 후 옥패와 자신의 작살을 챙겼다.

    “이제 됐구나. 더는 지체할 수 없으니 얼른 가거라.”

    사숙조는 굳건한 눈으로 심협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사숙조께 작별 인사 올립니다!”

    심협은 무거운 표정으로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사숙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양손을 결인하였다. 그러자 붉은 도목검이 맹렬히 솟구치더니 석실 지붕을 향해 날아갔다. 지붕은 두부처럼 갈라져 구멍이 생겨났다. 그 틈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가거라!”

    사숙조는 한 손을 결인하고 소매를 떨치더니 활짝 펼친 손바닥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심협의 발밑에 따뜻한 파도가 일렁였다. 심협이 얼른 내려다보니 발아래로 붉은 노을이 빛나며 마치 구름처럼 그를 점점 위로 떠올렸다.

    바람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심협은 지붕의 구멍을 향해 솟아올랐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익숙한 광경이 펼쳐졌다. 자세히 보니 그가 있는 곳은 뒷산의 하늘이었다. 방금 있었던 석실은 뒷산 중턱 아래에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때,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쉭!

    심협이 재빨리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보니, 멀리서부터 검은 기운이 다가와 발밑의 붉은 노을을 찔렀다. 그러자 붉은 노을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헛!”

    지탱할 것이 사라지자 심협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빽빽하게 자란 노송나무 가지들에 부딪힌 덕에 떨어지는 속도는 한층 느려졌다.

    쿵!

    “으으…….”

    바닥에 처박힌 심협은 고통에 신음하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위를 올려다보니 칠흑처럼 검은 그림자가 괴상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곧장 석실로 들어가 버렸다.

    콰쾅!

    뒤이어 거대한 굉음과 함께 뒷산이 진동했다.

    “이런! 어서 가야 한다!”

    심협은 돌연 안색이 변해, 다친 곳을 살필 틈도 없이 달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석실 쪽에서는 계속해서 굉음이 울렸다. 사숙조가 적과 싸우는 소리일 것이다. 다행히 그 검은 그림자는 그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기에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심협은 그렇게 몇 리를 쉬지 않고 달린 후에야 조금 마음을 놓고 멈춰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이내 또다시 굳어졌다.

    춘추관이 자리 잡은 청화산이 잿빛 광막에 뒤덮여 있었다. 그 광막에는 잿빛 구름이 요동쳤고, 무수히 많은 잿빛 부적 문양이 그 안에서 요동쳤으며, 음풍(陰風)이 잿빛 구름에서 나와 춘추관 안에서 회오리쳤다. 공기 중에는 음한(陰寒)의 기운이 가득했고, 나뭇잎에는 회백색 서리가 서려 있었다.

    심협은 잠시 망설이다가 큰 나무 위로 올라가 더 멀리까지 살폈다. 그러나 더 자세히 살필수록 안색은 더 어두워졌다.

    광막은 사방이 막힌 채로 춘추관을 완전히 뒤덮은 상태였다.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음기가 짙고 무수한 부적 문양이 요동치고 있어 자신의 실력으로는 이 광막을 깨고 도망치는 것조차 불가능할 터였다.

    마음이 무거워진 심협은 곧장 나무에서 내려왔다.

    춘추관에 침입한 것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수법이 악랄하고도 주도면밀했다. 이렇게 거대한 금제(禁制)를 펼쳐 놓았으니 그가 어찌 순양보전을 가지고 떠날 수 있겠는가?

    심협은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춘추관의 청석평으로 빠르게 이동해갔다. 더 이상 실력을 숨길 필요가 없었기에 마치 민첩한 원숭이처럼 빠르게 내달렸다. 덕분에 금방 청석평 앞산 부근에 이르렀지만, 거기서 걸음을 멈춰야 했다.

    저 앞에서 죽고 죽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중에는 흥분된 외침과 피를 원하는 포효도 섞여 있었다. 도대체 저런 소리를 내는 존재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사람의 소리는 아니었다.

    심협은 두려움과 긴장, 흥분, 분노로 가볍게 떨다가 작살 부기를 들고 다시 앞으로 향했다. 그러자 곧 앞산에 도착했는데, 놀라운 광경에 정신을 차리기도 힘들 정도였다.

    “마…… 맙소사.”

    춘추관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정갈했던 문파 곳곳에는 선혈이 낭자했고, 수많은 제자들의 시신이 피바다 안에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적지 않은 요괴와 괴물이 피바람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그중에는 강시도 있었고, 몸은 문드러졌지만 눈에서 붉은 빛이 이글거리는 시랑(*尸狼, 늑대 시체가 화한 괴물)도 있었으며, 몸 전체에 검은 기운이 감도는 요견(妖犬)도 있었다.

    남은 춘추관 제자들은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지만, 괴물들은 너무도 강력했다. 게다가 괴물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 실력이 출중한 제자 몇몇만이 겨우 버티고 있을 뿐, 나머지 제자들은 적수가 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누군가가 죽음을 맞는 처참한 비명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강시와 요견 등의 수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춘추관 제자들은 진작 모두 살육 당했을 터였다.

    심협은 이미 멀리서부터 소리를 통해 예상하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본 상황에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춘추관 지리에 대한 익숙함과 놀라울 정도로 향상된 감각 기관을 이용해 사람이 많은 곳이나 요괴들을 피해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금세 청석평 근처까지 도착한 그는 제자들의 방 뒤쪽 작은 길을 통해 자신의 거처로 가려 했다. 그러나 몇 걸음 채 옮기기도 전에 정실 옆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사람의 절반만 한 요견(妖犬)이 튀어나온 것이다. 녀석은 시신 한 구를 물고 있었는데,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가 식사를 하려는 것 같았다.

    심협을 발견한 요견은 물고 있던 시신을 내려놓고 대뜸 달려들었다.

    “헛!”

    심협은 다급한 와중에도 재빨리 몸을 숙여 피한 후 시신으로 눈을 돌렸다. 각진 얼굴에 눈썹이 짙은 청년이었는데, 피와 살이 뒤섞여 끔찍한 모습이었다.

    “방평(方平)!”

    절규하는 심협의 목이 메어왔다. 농촌 집안 출신인 방평은 사람이 소박한 데다 방도 근처라 꽤나 가깝게 지내던 제자였다.

    “이 짐승 놈!”

    심협의 눈빛이 분노와 광기로 뒤덮였다. 그가 오른손을 뒤집자 회백색의 작살 부기가 나타나더니 하얀 빛줄기가 되어 발사되었다.

    요견은 기겁하며 다급히 피했다. 그러나 작살이 민첩하게 방향을 바꾸더니 순식간에 요견의 가슴과 배 사이를 공격했다.

    푹!

    둔탁한 소리가 울리더니 작살은 요견의 몸을 관통해 빠져나왔다. 요견은 커다랗게 뚫린 구멍 때문에 몸이 거의 반으로 나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피는 흐르지 않았다. 상처 부위에는 그저 검은 얼음이 얕게 뒤덮여 있었을 뿐이다.

    요견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몇 차례 경련하더니 그마저도 이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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