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현실에서의 소환
춘추관 청석평. 정신이 들었을 때, 심협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뒤였다.
창을 통해 햇살이 비쳐오고 새가 지저귀는 것으로 보아 새벽인 듯했다.
심협은 몸을 일으켜 앉으려 했지만, 기운이 없어 쓰러지듯 다시 눕고 말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꿈속의 일들이 떠올라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는 온몸을 뒤져봤지만, 꿈속에서 얻었던 오파갑의 법기와 단약들, 삼안의 몸속에 있던 내단(內丹) 등은 어디에도 없었다.
“꿈속에서 얻은 것들은 현실로 가지고 올 수가 없는 모양이로군.”
심협은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무명공법을 운공해보았다. 그런데 단전의 법력을 운공하자마자 하마터면 어혈(瘀血)을 토할 뻔했다. 경맥이 막혀 있고, 가슴이 답답했던 것이다. 또한 무명공법 제3층을 운공하려 했을 때에는 단전의 법력이 너무도 부족했다. 심지어 그 법력마저도 임맥을 따라 오르다가 자궁혈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나아갈 수가 없었다.
“처음 무명공법 제2층을 수련하기 시작할 때로 돌아간 셈이로군.”
심협은 억지로 다시 몸을 일으켜 앉아 다시 한번 무명공법으로 단전의 법력을 운공해보려 했다. 그러나 같은 상황만 반복되었다. 그의 법력은 무명공법 제1층을 완성했을 때의 상태 그대로였다.
“하긴, 꿈속에서 이룬 경지를 어찌 현실로 가져올 수 있겠는가?”
심협은 쓰게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해도 꿈속에서 제2층을 완성하고 제3층까지 수련했던 경험은 기억이 생생했다. 특히 수련 중 겪었던 경험들과 깨달음은 눈에 선했다.
그때, 심협은 무언가 생각난 듯 재빨리 가슴의 옷섶을 풀어헤치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피부는 매끄러운 것이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다시 더 자세히 살펴봐도 그대로였다.
심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꿈속의 법기와 단약, 손가락뼈 등은 모두 수련의 경지와 마찬가지로 꿈속 세계에 속한 것이니 현실로 가지고 올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심협은 또다시 미칠 듯한 졸음이 몰려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춘추관과 얼마나 떨어져 있을지 모를 어떤 산. 새로운 사원이 이제 막 준공되었다. 대웅보전 앞 광장에는 다수의 승려와 신도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양손을 합장하고 눈을 감은 채 경건하게 기도했다.
전당 안에는 높이 6척의 조각상이 있었다. 조각상에는 붉은 천이 덮여 있었는데, 길시(吉時)가 되자 덕이 높은 주지 승려가 천을 치웠다. 이어서 금빛 부처상에 눈동자를 찍고 첫 공양을 받는 의식을 치렀다.
전당 밖의 거대한 청동 화로 앞에는 비단옷을 입은 비대한 원외(*員外, 벼슬 이름)가 서서 양손으로 굵기가 엄지손가락만 한 향 세 개를 든 채,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향을 올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문 안에는 위타보살상이 손에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성난 눈을 부릅뜬 채 세상의 악(惡)을 살피고 있었다. 그 뒤에는 미륵불이 손에 염주를 들고 웃는 얼굴로 사람을 맞이하니, 널리 천하의 좋은 인연을 맺는 것이었다.
산문 밖에는 진작부터 대나무 사다리 두 개가 세워져 있었다. 젊은 승려 네 명이 힘을 합쳐 널따란 편액을 문머리에 걸고 있었다. 편액은 단향목으로 만든 것으로, 바탕은 붉은 칠이 되어 있었다. 글자에는 금칠이 된 세 글자가 뚜렷하게 쓰여 있었다. 바로 ‘가람사(珈藍寺)’였다.
댕-!
길시가 되자 웅장한 종소리가 절에서 울리며 먼 곳까지 퍼졌다.
절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는 사냥꾼 두 명이 황량한 동굴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전날 설치해둔 덫에서 얼룩덜룩한 털의 거대한 여우를 꺼내는 중이었다. 여우의 몸에는 두 개의 화살이 꽂혀 있었고, 상처에서는 피가 흘렀다. 여우는 입에 큰 들쥐를 물고 있었는데, 죽으면서도 놓아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두 사냥꾼은 크게 기뻐하며 여우의 모피는 벗겨서 양식으로 바꾸고 고기는 집에 가져가 음식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하지만 이들은 몰랐다. 그 동굴 깊은 곳에 털이 노르스름한 어린 늑대가 단잠에 빠져 있다는 것을…….
그 어린 늑대가 절에서 퍼진 종소리에 앳된 두 눈을 천천히 떴다. 털이 복슬복슬한 뾰족한 귀를 쫑긋 세우더니 민첩하게 팔락였다.
* * *
심협은 하루 밤낮을 잠들었다가 다음 날 새벽에야 눈을 떴다. 푹 잔 덕에 정신은 거의 회복되어 있었다.
재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던 그는 전철생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꿈속에서는 몇 개월이 지났음에도 현실에서는 하룻밤밖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됐다. 생각해보면 앞선 두 차례 꿈 또한 모두 밤에 잠들었다가 다음 날 새벽에 깨지 않았던가.
심협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꿈속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건 현실에서는 하룻밤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식사를 마친 그는 곧바로 뒷산의 얕은 못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천천히 두 눈을 감고 무명공법 제2층을 다시 수련했다. 머릿속으로는 꿈속에서의 수련을 되짚어보았다. 당시 체내의 법력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하나하나 되새겼다.
그제야 심협은 깨달았다. 처음 수련할 때 줄곧 자궁혈을 뚫을 수 없었던 것은 법력이 적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법력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탓에 단전의 법력이 단숨에 자궁혈을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두 손을 결인하고 속으로 공법 구결을 외기 시작했다. 그리고 식해(識海) 안에서 단전의 법력이 화살촉처럼 날카롭게 변하는 상상을 했다. 이어서 자궁혈을 무조건 뚫겠다는 일념으로 전력을 다해 법력을 위로 솟구치게 했다. 그러자 임맥에 청량한 기운이 생긴 듯하더니 순식간에 치솟아 가슴의 옥당혈을 지나 그대로 자궁혈로 솟구쳤다.
이렇게 몇 차례를 반복했을 때…….
팍!
가벼운 파열음이 전해졌다.
“토, 통했어!”
자궁혈이 훤히 열리면서 위로 솟구치던 법력이 이를 차지한 것이다.
이에 심협은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꿈속에 속한 것들을 현실로 가지고 올 수는 없지만, 직접 경험하고 깨달은 것과 느낌만은 모두 그대로이니 앞으로 뚫어야 할 경혈들도 모두 순조롭게 통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심협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다시 무명공법 구결을 운공하여 법력이 화개혈(華蓋穴)로 솟도록 했다.
화개혈(華蓋穴)은 ‘대여화개(*大如華蓋, 화개와 같이 크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궁혈보다도 중요한 대혈(大穴)이다. 법력이 뚫고 들어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법력으로 화개혈을 가득 채워야 지나갈 수 있다. 법력이 다 차서 넘치게 되면 자연스럽게 화개혈을 통과하여 선기혈(璇璣穴)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심협은 체내에 모아둔 법력이 매우 적으니 화개혈을 뚫는 것은 미뤄두기로 했다. 대신 끊임없이 제1층 공법을 운공하여 단전에 법력을 채워갔다.
네 시진쯤 지났을 때, 심협은 가까스로 충분한 법력을 모을 수 있었다. 그제야 화개혈을 뚫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쉽게 열었다.
“휴우.”
심협은 잠시 수련을 멈추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심신(心神)이 많이 소모되어 과유불급(過猶不及)이 될 수 있으니 잠시 쉬기로 한 것이다. 하루에 두 개의 혈을 통과한 것만 해도 대단한 것 아닌가. 이 정도면 어지간히 자질이 뛰어난 사람조차 앞서는 속도다. 이 속도라면 2년, 어쩌면 1년 안에 제2층 공법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꿈속의 수련 속도에 비하면 굼벵이 수준이지만 말이다.
“꿈속에서의 나는 자질이 천부적인데…… 어찌 된 일일까?”
심협은 내심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손은 결인하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묵묵히 무명공법을 운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통령역요의 술법을 운공하는 것이었다. 꿈속에서 성공적으로 추두와 통령할 수 있었으니 현실에서도 시도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주위로 물의 영기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그의 의념은 점점 비워졌고, 살짝 감은 눈앞은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이어서 다양한 크기의 파란 불빛이 허공에서 번득이기 시작했다.
심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가장 큰 불빛은 내버려두고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작은 불빛을 향해 신식을 끌어갔다.
꿈속에서 추두와 계약을 맺기까지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현실에서의 자신은 꿈속의 자신보다 자질이 한참 떨어지니 너무 강한 요괴는 피할 생각이었다.
심협의 신식은 불빛에 이르자마자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어서 눈앞이 흐릿해지더니 다시 한 번 푸르른 공간으로 진입했다. 주변에는 맑고 깨끗한 파도가 요동쳤다.
심협은 이 공간이 꿈속에서 진입했던 곳보다 훨씬 작은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이곳에서 느껴지는 생령의 숨결들도 무척 약했다. 가장 강한 것도 수련이 연기초기에 불과해 보였다.
심협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통령 술법을 운공하여 그 요괴의 숨결을 향해 신식을 투사해갔다.
지금 심협의 수련은 연기기 4층에 가까웠다. 그러니 이 요괴가 통령 계약을 맺으려 하지 않는다면 통령역요의 강행수복으로 얽맬 생각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요괴는 반항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심협이 통령 표기를 만들어 내보내자마자 바로 그 요괴의 체내에 유입되었다. 이에 심협의 심신(心神)과 미묘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됐다.
심협은 곧장 그 푸르른 공간에서 빠져나와 두 눈을 뜨고는 얕은 못에 손을 넣고 나지막이 주문을 외었다. 이어서 물을 끌어다가 장심에 회오리치는 물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날아라!”
심협이 낮게 외치자 장심의 소용돌이가 공중에 떠올랐다. 소용돌이가 맷돌 정도로 커지더니 중앙에 검은 물 동굴이 나타났다.
심협은 자신과 통령 계약을 맺은 요괴가 어떤 존재인지 은근히 기대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반주향(*半炷香: 향이 절반 정도 탈 시간, 약 15분)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심협은 자신의 소환술이 잘못된 것인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앞은 뾰족하고 뒤는 둥글납작한 커다란 머리가 천천히 물 동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뒤로는 기다란 목이 이어져 있었는데, 그 위에는 불규칙적인 무늬가 있었다.
“이건…… 물뱀인가?”
심협은 미간을 찌푸리며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느릿한 동작으로 봐서는 민첩한 물뱀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심협이 무엇인지 알아내기도 전에 검푸른 지느러미가 천천히 물 동굴에서 나왔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길고 긴 머리 뒤로 거북이 등껍질이 드러났다. 이 요괴는 커다란 바다거북이었다.
잔뜩 기대했던 심협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저토록 느려터진 거북이라면 다급한 상황에서는 불러내기도 전에 자신이 목숨을 잃을 것 아닌가.
심협은 한숨을 내쉬며 재촉했다.
“얼른 나와!”
거북이는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지느러미 두 개를 맹렬히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돌연 앞으로 솟아 나와 허공을 가로지르더니 수면 위로 내려왔다.
심협은 급히 몸을 일으켜 물 위를 밟고 있다가, 뒤로 열 걸음을 물러섰다.
바다거북은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물에 떨어졌다. 수심이 깊지 않아 몸의 3할 정도만 물에 잠긴 채였다.
거북이는 배의 노처럼 다리들을 허우적거렸지만,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 모양새가 우스꽝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심협은 말없이 거북이에게 다가가 한 바퀴 빙 둘러봤다. 거북이의 몸통은 5척 정도였고, 등에는 마치 수레 덮개처럼 튀어나온 등껍질이 있었다. 등껍질에는 육각형 무늬들이 있었고, 그 표면에는 매끄러운 이끼가 붙어 있었다.
“너는 이름이 있느냐?”
심협은 거북이 앞으로 와 물었다. 그러나 거북이는 기다란 목을 뻗어 심협을 좌우로 살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거북이의 크고 둥근 두 눈에는 호박색 광택이 있었다. 하늘을 향한 콧구멍과 아래턱보다 위턱이 더 큰 세모꼴 입을 보고 있자니 백치미와 같은 귀여움이 느껴졌다.
“사람 말을 못 하는 것이냐? 영지(靈智)가 높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심협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꿈속에서는 목숨을 걸고 벽곡초기의 추두를 굴복시켰지만, 현실에서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실제로는 이리 멍청한 바다거북 정도나 통령하는 게 전부였다. 이 큰 차이에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바다거북도 심협을 슥 보더니, 자신의 성에 차지 않는지 느긋하게 머리를 집어넣고는 지느러미를 물속으로 넣어 몸을 조금 들었다. 그러더니 방향을 틀어 못가로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서…… 설마…… 영지가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
심협은 당황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