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동굴 속 노인
댕-!
얼마나 지났을까. 심협은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어서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고, 천천히 열렸다.
여전히 어지러웠고 시야도 뚜렷하지 않았다.
심협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아 관자노리를 주무르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변에는 수백 명의 사람이 빽빽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모두 똑같은 하얀 장포를 입은 채, 하나같이 경건한 표정으로 저 앞에 놓인 3척 높이의 축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축대 위에는 연꽃 포단(蒲團)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머리와 수염이 새하얗게 센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긴 머리는 풀어진 채였고, 뺨까지 드리운 긴 눈썹 아래로 드러난 표정은 자애로웠다. 큰 우의(*羽衣, 새의 깃으로 만든 옷)를 입은 그는 마치 경전 강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여기는 또 어디란 말인가?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심협은 주위의 광경에 당황했다. 이곳은 분명 지하 동굴도, 춘추관도 아니다.
그는 급히 일어나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이곳이 어디인지 물어보려 했다. 그런데 주변의 모든 사람은 마치 심협이 이 자리에 없는 것처럼,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심협은 가까이 있던 사람의 어깨를 두드리려 했다. 그런데 그의 손은 마치 허공을 가르는 것처럼 상대의 몸을 통과해버렸다.
“설마…… 또 꿈인가? 꿈속의 꿈?”
심협은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는 더 먼 곳까지 둘러봤고, 그제야 자신이 산속의 백석광장(白石廣場)에 서 있음을 알게 됐다. 주변의 산은 마치 비취 허리띠처럼 광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옥빛 폭포가 하늘을 날 듯 흘렀고, 연무가 아득하게 깔려 있었다. 그야말로 선산(仙山)의 절경이라 할만 했다.
수많은 산봉우리 위에는 푸른 나무들 사이로 화려한 누대와 누각이 보였다. 산봉우리 사이 계곡에는 허공에 밧줄 다리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산속에서는 원숭이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구름 속에서는 학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이곳은 설마…… 선경(仙境)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저 노인은 선인(仙人)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가?”
심협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가까이 가서 노인의 강의를 듣고자 했다. 그가 어떤 선법(仙法)을 전수하고 있는지 자세히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한 걸음 내딛자마자 사방의 풍경은 마치 환영처럼 산산이 흩어졌다.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느낌과 함께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변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심협의 시야가 다시 뚜렷해지고 나니 주변 광경이 모두 변해 있었다. 지금 그는 구름 위로 솟은 산봉우리 정상에 서 있었다. 앞에는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였고, 발밑으로는 온통 파도치는 바다 같은 구름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낮은 상이 몇 개 놓여 있고, 그 앞에 각자 한 사람씩 앉아 있었다.
상석에는 조금 전 보았던 노인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과는 복장도 많이 달랐다.
그들은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며 앉아서 도를 논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모두 오랜 벗인 듯했다.
심협은 거리가 멀지 않아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또렷이 들리지 않았다. 이에 심협이 조금 더 가까이 가려던 그때, 또다시 광경이 흐릿해지며 바뀌었다. 그리고 이내 심협은 자신이 붉은 전당 안에 있음을 알게 됐다. 그곳에서는 우의(羽衣)의 노인과 제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장소는 연달아 몇 번이나 바뀌었다. 이로써 심협은 우의(羽衣)의 노인이 평소에 설법을 강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저 묵묵히 볼 수만 있을 뿐, 그 상황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다.
심협은 자신이 끝나지 않는 가위에 눌린 것이라 여기고 반쯤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변화가 나타났다. 다시 백석 광장에 나타났고, 많은 사람이 앉아서 노인의 설법을 듣고 있었다는 점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하늘이 돌연 어두워지며 밤이 되더니 거대한 그림자에 휩싸였다. 그러자 하늘 전체가 마치 불이 붙은 듯 붉게 타올랐다.
고개를 들어 보니 거대한 붉은 운석들이 붉은 꼬리를 끌며 하늘을 갈랐고, 검은 화염에 휩싸인 채 쏟아졌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광장을 향해 날아왔다.
심협은 화들짝 놀랐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안색을 굳혔다. 예전에 잡기에서 천화(天火)가 세상에 내린다는 글을 본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화산이 폭발하여 생긴 것이었고,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주먹만 했던 것이 점점 커져서 집채만 해지더니, 이내 산봉우리보다도 커져 있었다. 경악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강론을 듣던 사람들은 혼돈에 휩싸여 뿔뿔이 흩어졌다.
심협 역시 놀라고 두려웠지만, 어차피 꿈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건 자신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음을 알기에 그 광경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우의의 노인만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가볍게 한 손을 들자 사방의 대지가 크게 울렁이기 시작했다.
콰르릉! 쾅!
거대한 굉음이 울리더니 광장 너머로 푸른 산봉우리들이 점점 솟아나 마치 긴 창처럼 거대한 운석들을 찔러 들어갔다.
쿵!
이내 거대한 굉음이 퍼지면서 운석과 충돌한 산봉우리는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고, 하늘 가득 분진(*粉塵, 티와 먼지 등)이 휘날렸다.
분진 너머로 산 밑동에 걸쳐져 광장까지 떨어지지는 않은 운석이 보였다.
“이럴 수가! 세상에 마음대로 산을 옮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심협은 운석을 봤을 때보다도 경악했다. 그리고 그가 놀라움에서 헤어기도 전에, 흩날리는 먼지 사이에서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운석에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으로, 먼지 속에서는 괴이한 소리가 연신 울렸다.
자세히 보니 흉측한 괴물들이 운석 위에서 분분히 뛰어내렸는데, 하나같이 온몸에서 마염(魔焰), 즉 마(魔)의 화염이 이글거렸다. 이 수많은 괴물들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죽이며 어디론가 향했다.
이를 본 우의의 노인이 한 손을 결인하여 휘둘렀다. 그러자 산속 깊은 폭포들에서 돌연 물이 솟구치더니 길이가 수백 장에 이르는 투명한 수룡(水龍)들이 되었다. 수룡들은 사방에서 용트림하며 다가와 괴물들을 맹렬히 공격하자, 그 강력한 공격에 괴물들이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백의를 입은, 장로(長老)인 듯한 사람들이 수룡의 뒤를 따라 괴물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혼란에 휩싸여 도망치던 제자들도 정신을 차리고 집결해 전투에 가담했다.
순식간에 광장에서는 불길이 치솟았고, 죽고 죽이는 소리가 난무했다.
광장 전체가 크게 동요하는 가운데, 산을 지키는 상서롭고 거대한 동물들이 사방에서 나타나 달려왔다. 그중에는 화려한 무늬에 집채만 한 호랑이도 있었고, 온몸에 화염이 감도는 표범도 있었으며, 비늘 껍데기를 두른 천산갑(穿山甲) 비슷한 것들도 있었다.
이들이 등장하자 괴물들이 확연히 밀리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점점 더 많은 백의 제자들이 집결했고, 운석을 중심으로 괴물들을 포위하는 형국이 되어갔다.
심협은 인간 수사들이 우위를 차지하자 왠지 모르게 안도하게 됐다.
그런데 그때, 주변의 광경이 다시 한번 흐릿해지더니, 푸르고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던 곳이 보기 흉한 폐허로 변해버렸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무너진 담벼락과 맹렬히 솟구치는 불길뿐이었다.
곳곳에 산처럼 쌓인 시신이 있었고, 사방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특히 우의의 노인과 문하 제자들의 사상자가 넘쳐났다.
심협은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신을 집중해 살펴보니 우의의 노인은 온몸에 핏자국이 가득했다. 노인은 그 몸으로 허공에 떠올라 도망치려 했다. 그런데 고작 수백 장을 가기도 전에 머리 셋에 팔이 여섯 개 달린 흉측한 괴물이 노인을 뒤쫓았다.
노인과 괴물이 허공에서 각자 술법을 펼치면서 천지가 요동치고 우렛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렇게 그들은 싸움을 이어가며 점점 멀어져갔다.
심협은 그들을 따라가서 누가 이기는지 보고 싶었지만, 하늘을 날 수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 둘이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눈앞이 다시 흐릿해지더니 지하 동굴이 나타났다. 분명 그곳은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그 지하 동굴이었다.
“돌아온 것인가?”
심협은 다소 안도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동굴로 들어온 것이다. 머리는 산발이 된 채로 몸 곳곳에서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는 그는 바로 우의의 노인이었다.
심협은 재빨리 다가가 부축하려 했지만, 노인은 그대로 그를 통과해 지나갔다. 이어서 비틀거리며 동굴 깊은 곳으로 가서 석벽에 기대더니 미끄러져 내려앉았다.
심협이 급히 따라가 보니 노인의 흉부에는 세 개의 구멍이 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흐를 피도 없는지 출혈은 거의 멈춘 상태였다. 노인은 석벽에 기댄 채 계속해서 떨었고, 안색이 창백했으며, 눈빛은 절망적이었다. 이미 살아날 가망이 없음을 직감한 듯했다.
노인은 잠시 정좌해 기력을 조금 회복한 듯 일어서더니 손을 휘둘러 지하 동굴에 법진(法陣)을 쳤다. 화려한 빛이 노인의 손에서 동굴 입구를 향해 뻗어갔다. 하지만 그 빛 속에 무엇이 있는지 심협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빛은 암벽으로 스며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이어서 노인은 우의를 벗어 내던지더니 힘겹게 두 손을 결인하고 우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노인의 장심에서 현묘한 부적 문양이 떠오르더니 원형의 광막(光幕)이 허공에 생겨났다. 그 안에는 여러 줄기의 짙푸른 법력이 꿈틀거리며 우의를 향해 모여가고 있었다.
이미 너덜너덜했던 우의는 법력이 떨어지자 재가 되더니 파란 전술도(戰術圖) 같은 빛 무늬가 되어 지면에 펼쳐졌다. 우의에 묻어 있던 핏자국들은 사라지지 않은 채 법력의 힘으로 미미하게 요동쳤다.
법력을 사용함에 따라 노인의 생명력은 빠르게 사라져갔다. 핏자국에서는 점 같은 빛이 일더니 원래의 붉은색은 사라졌다. 이어서 지면에 짙푸른 액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액체는 점점 많아지더니 중심부에 물이 샘솟는 구멍처럼 물거품이 일다가 결국 영기(靈氣)가 충만한 짙푸른 연못이 되었다.
우의(羽衣)의 노인은 마지막 남은 법력까지 모두 소진한 듯 힘겹게 연못 중앙으로 걸어가더니 가부좌를 틀었다.
이를 지켜보던 심협은 크게 동요했다. 지금 눈앞에 생겨난 연못이 바로 이 동굴의 영기 가득한 연못이었다. 그리고 금색 해골은 바로 저 노인인 것이다!
심협은 복잡한 심정으로 연못가로 다가왔다. 노인은 처량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슬프고도 분한 표정이었다.
노인이 돌연 손목을 한번 떨치자 비도(飛刀) 하나가 위로 날아갔다. 비도는 동굴 지붕에 한 번 부딪치더니 방향을 틀어 노인의 정수리로 떨어져 내렸다. 노인은 부상으로 죽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안 돼!”
심협은 반사적으로 튀어나가 비도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모든 광경이 흩날리더니 신식 또한 흐릿해졌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