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출구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랄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겠지?”
오파갑은 심협을 등진 채 삼안의 시신을 살피다가 불쑥 물었다.
심협은 그가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기에 상대의 화를 돋울까 두려워 감히 무어라 대답하지 못했다.
“자네도 수행하는 자이니 내 충고 한마디 하지. 요괴와 마물을 없앨 때는 절대로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되네.”
오파갑은 한기가 감도는 투명한 창을 뽑으며 말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심협은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억지로 대답했다.
그때, 사방에서 빛이 비쳤다. 동굴은 마치 연기처럼 사라졌고, 다시 대전이 나타났다.
그제야 심협은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처참한 호통이 울렸다.
“오파갑! 감히 내 수행을 망치다니! 내 너를 황천길 동무로 삼겠다!”
그와 함께 굳게 감겨 있던 삼안의 세 눈이 동시에 빛나더니 몸이 순식간에 팽창했다. 이어서 펑 소리와 함께 폭발하기 시작했다.
오파갑은 워낙 가까운 거리에 있던 터라 제대로 방비도 하지 못한 채 폭발에 휘말려 튕겨나갔다. 그는 대전의 신상에 등을 세게 부딪쳤다.
“쿨럭!”
오파갑은 중상을 입은 듯 피를 한 사발이나 토했다.
심지어 제법 거리가 있었던 심협마저 폭발에 날려 대전의 문기둥에 충돌했다. 문기둥은 그대로 갈라졌다. 뿐만 아니라 부적 붙은 단도의 부서진 조각이 목을 스치며 가는 바람에 심협은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심협은 가슴이 답답하고 등도 아려왔지만, 목구멍의 피비린내를 참아가며 겨우 일어났다. 삼안과 검은 얼굴의 청년이 변한 거인의 시신이 너덜너덜해진 가운데 담황색 여우의 혼령이 시신 더미에서 나와 기이한 신상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내 기이한 신상이 돌연 두 눈을 떴다. 게다가 신상 전체가 흐릿한 황색 빛에 휩싸이는가 싶더니 얼굴이 삼안 요괴의 모양으로 바뀌었다.
“신상에…… 요괴의 혼이 깃들다니…….”
오파갑은 안색이 급변하더니 몸을 굴려 대전 입구로 향했다. 이어서 그가 손목을 비틀자 다시 소매 안에서 나타난 투명한 소창이 그대로 신상의 미간을 공격해갔다.
하지만 소창이 닿기도 전에 신상의 손 3개가 거대한 황색 여우꼬리로 변해 바닥을 매섭게 내리쳤다. 그러자 폭풍 같은 바람이 일었다.
심협은 덮쳐오는 바람을 느끼며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르릉!
거대한 굉음이 울리더니 대전 바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커먼 동굴이 드러났는데, 그 커다란 동굴 안에서 가공할 만한 흡입력이 생겨났다. 이에 대전 바닥에 있던 모든 것이 동굴로 끌려갔다.
“으윽! 이게 무슨……?”
심협은 문기둥을 꼭 붙들고 버텨내려 했으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파갑마저 거스를 수 없을 정도의 흡입력을 심협이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손가락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문기둥을 붙들고 버텼으나 이내 동굴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설마…… 나는 또 죽는 것인가?”
심협은 기이한 힘이 사방에서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이어서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곧 완전히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심협은 천천히 깨어났다.
눈을 떠보니 주변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아주 가늘고 미약한 백광만이 옆에서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짙은 흙 비린내도 풍겨왔다.
심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몸은 반쯤 돌과 흙에 파묻혀 있었고, 곳곳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래도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다.
심협은 몸부림치며 일어나서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지하였고, 주변에는 유백색(乳白色) 석순들이 부드러운 백광을 발하고 있었다. 석순의 빛으로 주변을 겨우 살필 수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삼안과 오파갑은 어디 있는 걸까?”
심협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심협은 삼안과 오파갑이 보이지 않음에 안심하며 주변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비록 어두웠지만, 심협에게는 이 정도 빛이면 충분했다. 그의 눈은 빠르게 주변 환경에 적응했다.
이곳은 지하 동굴이었고, 십여 장 너머 동굴 윗부분의 기다란 틈에서 하얀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마 저곳이 바닥인 듯했다. 동굴 앞쪽은 지하를 향해 쭉 뻗어 있었는데, 안이 어두워 얼마나 깊은지 알 수가 없었다.
심협은 조금 전의 일들을 돌이켜봤다. 삼안의 혼이 신상에 깃들어 꼬리로 바닥을 쳤고, 그러자 바닥이 무너져 동굴이 나타났다. 그리고 동굴에서 나온 흡입력에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갔다. 그러니 이곳은 그 동굴의 깊은 곳일 듯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삼안과 오파갑도 이곳에 있다는 것이겠지.”
심협은 냄새를 맡아보았다. 삼안과 오파갑의 냄새가 느껴졌는데, 동굴 깊은 곳을 따라 퍼져 있었다.
하지만 동굴의 흙 비린내가 이상하리만치 짙어 다른 냄새들을 거의 덮어버린 탓에 제대로 분별하기는 어려웠다.
심협은 동굴 깊은 곳을 바라보다가 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삼안과 오파갑은 모두 위험해.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겠어. 이 기이한 동굴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
심협은 고개를 들어 동굴 위쪽을 살피다가 나갈 길이 있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동굴 위쪽은 바닥에서 십여 장 높이에 있는 데다가 사방의 동굴 벽이 모두 매끄러워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올라갈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심협은 이제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심협의 시선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동굴 벽으로 향했다. 이어서 몸을 훌쩍 날리자 발에 붉은 빛이 번득였다. 그는 그대로 3장 높이까지 올라 튀어나온 바위를 두 손으로 잡고 매달렸다. 이어서 몸을 흔들며 양손을 힘차게 당겼다. 그러자 1장 정도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심협은 곧 두 발을 이용해 원숭이처럼 빠르게 가파른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고, 금방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막 기뻐하며 속도를 올리려 할 때쯤, 저 앞쪽 공기에서 진동이 울리더니 금색 빛들이 근처 석벽에서 발사되기 시작했다. 금색 빛은 서로 교차되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팔괘광진(八卦光陣)을 이루어 서서히 회전했다.
심협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머리를 광진에 부딪히고 말았다.
쾅!
묵직한 소리가 울리더니 팔괘광진 표면에 금색 빛이 미미하게 번득였다. 동시에 강하면서도 날카롭지는 않은 힘이 광진에서 솟구쳤다.
그런데 심협은 광진에 부딪힌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마치 부드러운 솜에 부딪힌 것만 같았다. 그러나 충돌의 충격은 고스란히 남아 곧장 추락하게 되었다.
“제기랄!”
심협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으며, 옆에 튀어나와 있는 바위를 잡았다. 하지만 워낙 빠르게 추락하고 있던 터라 워낙 오래된 바위는 쉽게 부러져 버렸다. 그래도 덕분에 추락 속도가 한결 느려진 덕에 또다시 벽에 튀어나온 곳을 두 손으로 잡아 추락을 멈출 수 있었다.
심협은 고개를 들어 광진을 바라보면서 다시 반 장 정도 거리까지 올라갔다. 이어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고는 장심에 소뢰부를 그려냈다.
“공격해!”
심협은 손을 들어 휘두르며 체내의 법력을 소뢰부를 향해 운공하기 시작했다.
꽈르릉!
벼락 소리가 묵직하게 울리면서 하얀 번개가 심협의 손에서 발사되어 팔괘광진을 공격했다.
하지만 번개의 만만치 않은 위력에도 불구하고 광진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고, 회전도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젠장!’
심협은 속으로 욕을 하고는, 어쩔 수 없이 올라왔던 길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동굴 깊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동굴 깊은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위로는 나갈 방법이 막혔으니 동굴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심협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삼안과 오파갑을 마주치는 것이 꺼려졌기에 매우 느리게 이동하며 계속 사방을 살폈다. 그러다가 돌연 걸음을 멈췄는데, 시선은 옆의 벽을 향해 있었다.
벽에는 불로 지진 것처럼 검은 흔적이 세 줄기 남아 있었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긁힌 듯한 흔적이었다.
‘이건…… 오파갑의 화염창 흔적이구나!’
심협은 속으로 흠칫 놀라며 무의식적으로 벽 그늘에 몸을 붙이고는 조심스레 앞을 살펴봤다. 그리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앞쪽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변 어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죽은 듯이 고요한 상태였다.
이에 심협은 긴장이 조금씩 풀리면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동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통로 양쪽에 불에 탄 듯한 흔적은 점점 많아졌다. 바닥과 동굴 벽에도 있었다. 구덩이도 보였는데, 가장 깊은 것은 1장 정도 되어 보였다. 간혹 피가 튄 흔적도 보였다. 삼안과 오파갑이 격전을 벌인 것이리라.
심협은 두려웠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래도 걸음을 더욱 늦췄다. 조금의 소리도 내지 않으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자 앞에 굽은 길이 나타났다.
심협은 잠시 멈췄다가 굽은 길 안쪽에 붙어 천천히 이동했다. 그러다가 얼굴을 반만 내밀고 안쪽을 봤다가 화들짝 놀라 다시 숨었다. 체내의 법력까지 순간 움찔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그는 다시 머리를 내밀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아예 굽은 길 안쪽으로 나왔다.
저 앞, 멀지 않은 곳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보아하니 오파갑 같았다.
오파갑은 온통 피칠갑을 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아 생사를 알 수 없었다.
심협은 의아한 얼굴로 한참이나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오파갑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하며 다가가 보았다.
하지만 심협은 오파갑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놀라 숨을 들이켰다. 오파갑의 얼굴은 오른쪽 절반은 본래의 모습이었지만, 왼쪽 절반은 노란 털이 잔뜩 자라 있었다. 눈은 가늘고 길며, 귀는 뾰족하고 긴 여우 요괴의 모습이었다.
뿐만 아니라 두 눈은 크게 뜬 채 조금 튀어나와 있었는데, 귀와 코, 입에서도 피가 흐른 듯했다. 아마 죽기 전에 극심한 고통을 겪은 모양이었다.
“설마 그 여우 요괴가 마지막에 오파갑의 몸에 들어가 격전을 치르다가 함께 죽은 것인가?”
심협은 그렇게 추측하고는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오파갑의 시신 주변에는 여러 물건이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 물론 7개의 화염단창과 투명한 소창도 있었다. 또한 검붉은 단도 세 자루와 길이가 1장에 이르는 황금색 밧줄도 보였다. 금사로 만든 듯한 밧줄은 보기에도 비범해 보였다.
심협은 망설임 없이 물건들을 모두 챙겨 근처에 앉아 자세히 살폈다.
회색 부적이 붙어 있는 단도 세 자루 외에는 부적이 붙은 물건은 없었으나, 하나하나가 법력의 파동을 발산하고 있었다.
“부적이 없음에도 이리 강한 법력 파동을 발산하다니. 이것들 모두 법기임이 분명하구나!”
심협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화염창을 들었다. 이어서 작살 부기를 조종할 때처럼 창에 법력을 주입해 봤다. 하지만 화염창은 그의 법력과 잘 맞지 않는 것인지 한참 후에야 창끝에서 피식 하는 소리와 함께 화염 같은 붉은 빛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