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뒷산에서의 우연한 조우
“무슨 일이오?”
계단 저 위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에 심협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놓았다. 그러자 정원은 볼썽사납게 휘청거리다가 다른 제자의 부축을 받고서야 가까스로 엉덩방아를 찧는 불상사만은 면할 수 있었다.
곧 심협 옆에 하얀 그림자가 스치더니 한 사람이 허공에서 내려왔다.
심협은 이미 목소리로 그가 백소천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 보니 백소천이 춘추관의 제자 의복이 아닌 하얀 장포를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보아하니 점점 더 자유분방해지는 것 같았다.
“배, 백 사제였군. 그럼 천천히…… 이야기들 나누게. 난 이만…… 가보겠네.”
정원은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조물거리며 땀을 뻘뻘 흘렸다. 그러더니 다른 제자들과 함께 급히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흥! 약자는 괴롭히고 강자 앞에서는 벌벌 떠는 잡것들.”
백소천은 급히 자리를 뜨는 정원 등의 뒷모습을 보며 욕했다.
“백 공자, 오늘 왜 이리 열이 오르셨소?”
심협은 빙글빙글 웃으며 백소천을 돌아보았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백소천은 심협을 위아래로 살피더니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왜? 내가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소? 아니면 돌아오지 않길 바란 거요?”
심협은 웃으며 물었다.
“이놈! 공법이 역효과를 일으킨 것을 내게 알리지도 않다니! 나를 사형으로 여기기는 하는 것이냐?”
백소천은 짐짓 화를 내는 척했다.
“내 떠나기 전에 말하려 했소. 다만 너무 급히 떠나느라 사형을 만나지 못하고 길을 나서게 된 것뿐이지. 이렇게 돌아오지 않았소? 술과 거위 구이도 사 왔으니 이따가 전 사형도 불러서 회포를 풉시다.”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 좋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지금 하산해야 하네.”
백소천이 아쉬운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대꾸하자 심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럼 사형이 돌아오고 나서 다시 이야기합시다.”
“좋아. 그럼 나는 이제 가보겠네.”
백소천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산문을 향해 쏜살같이 나아갔다.
심협은 멀어지는 백소천을 보다가 무언가가 생각나 급히 물었다.
“백 사형, 언제 돌아오는 게요?”
“집에 다녀와야 하니 아마도 보름 정도 걸릴 걸세. 내 술은 남겨두게나!”
백소천은 이미 구불구불한 산길 사이로 모습을 감춘 뒤였지만,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왔다.
백소천이 멀어지자 심협은 청석평의 정실로 향했다. 자신의 거처에 들러 짐을 정리하고는 사부를 찾아갔다. 비록 사부는 만나지 못했지만, 대신 돌아오는 길에 전철생을 만났다.
전철생은 심협을 격하게 반겼다. 두 사람은 같이 거위 구이 한 마리를 깨끗이 먹어치우고, 술은 백소천을 위해 남겨두었다.
전철생이 말하길, 나씨 도인은 이틀 전 누군가의 요청으로 하산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사제, 몸은 좀 어때? 더 악화된 건 아니지?”
전철생의 걱정스런 목소리에 심협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려면 <무명천서>와 옥침, 기이한 꿈 이야기까지 해야 하는데, 이는 말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음을 이미 확인하지 않았던가.
결국 심협은 풍양진인이 하사한 보원단을 복용한 덕에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고 전철생을 안심시켰다. 다행히도 전철생은 그 말을 그대로 믿는 것 같았다.
밤이 깊어서야 처소로 돌아온 심협은 침상 앞에 앉아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여전히 어수선한 방을 둘러보노라니 감개무량해졌다. 고작 7, 8일 정도 비웠을 뿐인데도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느껴졌다.
“하긴, 그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일들은 그 기이한 꿈들에서 겪었던 것들 못지않게 우여곡절도 많고 기이했지. 떠나기 전만 해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지금은 통법성을 이룬 수사가 되어 있지 않은가?”
심협은 잠시 앉아 있다가 곧 침상 밑에 숨겨두었던 옥침을 꺼냈다.
“다시 한 번 시도해볼까?”
심협은 옥침을 앞에 두고 손으로 가볍게 쓸어보았다. 싸늘한 감촉에 멈칫했으나, 예전처럼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흥미가 생기기도 했다.
이 옥침이 아니었다면 어찌 꿈속에서 우혁을 만났을 것이며, 우혁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찌 <무명천서>를 찾아내 통법성까지 이룰 수 있었겠는가?
“옥침에 법력을 주입해본다면 생각지 못한 소득을 얻을 수 있지는 않을까?”
만일을 대비해 우선 부적을 써서 최소한의 보호 수단을 마련한 후에 시도해보기로 한 그는 곧장 탁자로 가 부적용 황지와 주사를 꺼냈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여 부적을 쓰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쓴 부적은 가장 익숙한 소뢰부였다.
황지를 절반가량 사용한 후에야 소뢰부 두 장을 성공적으로 써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성공률은 제법 오른 것이다.
심협은 소뢰부 두 장을 말리기 위해 옆에 놓아두고, 다시 붓을 들었다. 이번에 쓰는 것은 익숙한 또 다른 부적 구귀부였다. 또 절반 가까이 되는 황지를 사용하고서야, 그는 세 장의 부적을 성공적으로 써냈다.
심협은 붓을 내려놓고 의자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정신 회복에 집중했다. 몸 상태는 예전과 비할 수 없이 좋아졌지만, 부적 쓰는 일은 여전히 정신적 소모가 컸다.
반 시진 가까이 휴식을 취하고 나니 정신이 거의 회복됐다. 그러자 그는 곧장 다시 붓을 들어 여의부와 벽사부 등을 몇 장 더 써냈다.
이 부적들은 아직 시험해본 적이 없어 제대로 써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심협은 원래 작살에 붙어 있는 부적을 모사해보려 했으나, 이내 포기했다. 부적은 작살 손잡이에 둘러져 있는 상태라 전체를 제대로 볼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부적을 떼어냈다가는 작살이 망가질지도 모르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심협은 완성한 부적들을 옥침 옆에 두었다. 그러고 나서야 무명법결을 운공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체내의 법력을 오른팔에 관통시켰다. 그러자 손가락에서 푸른 빛으로 번득이는 법력이 마치 이끌리듯 흘러나와 옥침으로 향했다.
심협은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법력의 흐름을 제어하면서 한편으로는 집중하여 옥침의 변화를 살폈다.
한참이 지나 심협의 법력이 제법 많이 주입되었음에도 옥침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럼에도 심협은 계속해서 법력을 주입시켰다. 하지만 그의 법력이 바닥날 때까지도 옥침은 요지부동이었다.
“음, 내 생각이 틀린 모양이구나. 아니면 내 법력이 아직 부족한 걸까?”
심협은 쓰게 웃으며 손을 거뒀다. 그러나 내심 실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며칠간의 강행군에 법력 소모로 인한 피로가 더해지자 옥침과 부적을 정리해두고 일찍 잠들었다.
* * *
새벽.
심협은 세수와 양치를 한 후, 작살 부기와 부적을 가지고 뒷산으로 향했다.
이제 그는 <무명천서>의 공법을 수련하고 있으니 소화양공을 연마할 필요는 없었다. <무명천서>의 공법은 수련법이 특이해 연못이나 계곡을 찾아야 했다.
심협은 뒷산의 연못과 계곡도 한두 곳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 눈에 띄는 곳이었다. <무명천서>에 대해서는 비밀을 지켜야 했으니 은밀한 장소를 찾아야 했다. 한편으로는 작살 부기도 다시 연습해보고 싶었다.
한여름이 지나 가을에 가까워져 산의 새벽바람도 확실히 차가워졌다.
심협은 산꼭대기에서 어렴풋이 고개를 내미는 새벽 햇살을 바라보며 산길을 걸었다. 그의 눈에는 열정이 가득했다.
춘추관 뒷산의 지형은 제법 복잡했다. 깊은 산속의 수풀들 외에도 여기저기 우뚝 솟은 절벽들도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빗물이 모여 이루어진 깊은 못들도 있었다.
심협은 평소에 다니던 길을 피해 관목이 밀집한 수풀을 지나, 가시 달린 잡초가 무성한 곳을 가로질러 작은 길을 만들어가며 우뚝 솟은 절벽 위에 도착했다.
절벽은 반들반들한 기암괴석이 널려 있고 시야가 탁 트인 곳이었다.
심협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수련할 만한 장소가 있는지 찾았다.
절벽 끄트머리에는 산 바깥쪽에서 솟은 거대한 바위가 있었다. 오랜 시간 비바람을 맞아서인지 표면에 매끄럽고 두터운 이끼가 자라 있어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심협은 조심스레 바위 끝에 서서 아래를 살피려 했다. 그런데 그때, 아래쪽에서 두 사람이 언쟁하는 듯한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몸을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수십 장 높이의 절벽 아래 노인과 청년이 마주 보고 있었다.
그때, 두 사람도 심협을 발견하고는 대화를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비록 거리가 꽤 멀었지만, 심협은 두 사람의 얼굴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청년은 춘추관 제자 의복 차림이었다. 다른 제자들과 달리 머리를 틀어 올리지 않고 그저 동그랗게 묶어서 나무 비녀를 아무렇게나 꽂은 채였다. 깡말랐지만 용모는 준수한, 내문제자 중 하나인 고화령이었다.
고화령과 마주 보고 선 사람은 체구가 크고 얼굴이 까만 노인이었다. 입가에는 회백색의 잘 정리된 짧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의상은 티끌 하나 없는 태극도포였고, 머리에는 풍양진인의 것과 같은 연화관을 쓰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위엄이 넘치는 이 노인 또한 심협이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고화령의 사부 왕청송(王靑松)이었다.
심협은 수련 시간에 삼청전 앞에서 몇 차례 왕청송을 본 적이 있다. 그의 수업은 꼼꼼하여, 나씨 도인이나 풍양진인의 수업보다 더 알아듣기 쉬웠다. 하지만 그는 성품이 완고하고 엄숙해 제자들은 그를 은근히 두려워했다.
‘설마 여기에서 수련 중이었던 건 아니겠지?’
심협은 놀란 마음을 다스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일 왕 사백이 고화령에게 법술을 가르치던 중이었다면 심협은 엿들으려 했다는 의심을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왕 사백은 심협을 힐끔 쳐다보더니 그 특수한 신분의 기명제자임을 알아보고는 차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더니 굳은 얼굴로 멀리 가버렸다.
고화령은 미소 띤 얼굴로 멀리 있는 심협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심협은 난감한 얼굴로 그저 손을 흔들어 화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고화령에게는 더 큰 호감을 느꼈다.
고화령도 인사를 마치자 바로 몸을 돌려 왕 사백을 따라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두 사람이 조금 멀어진 후, 심협은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수련할 장소를 물색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날카로운 청력에 들려온 두 사제(師弟)의 대화에 심협은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자가 들었을지도 모르는데 아예 보내버릴까요? 이곳은 인적이 드물어 사람 하나 묻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고화령의 목소리에 심협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령 수련 비법을 들었다 해도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시신을 은닉하겠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법력도 없는 외문제자가 그 먼 거리에서 어찌 우리 이야기를 들었겠느냐? 너무 예민하구나. 어쨌든 다음에는 더 은밀한 곳을 찾아보거라.”
왕 사백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조금의 화근도 남기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저자는 외문제자도 되지 못하는 놈이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고화령은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띤 채 그런 잔혹한 말을 내뱉었다.
“괜한 일 만들지 말거라. 저놈은 나씨 도인의 기명제자일 뿐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특별하다. 게다가 백소천과도 친분이 두터우니 조심해야 한다.”
왕 사백은 걸음을 멈추고 엄숙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괜한 일 만들지 않겠습니다.”
왕 사백의 말에 고화령은 고집을 꺾었으나, 못내 아쉬운 듯 말했다.
그 순간, 고화령이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심협이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협은 내심 긴장됐지만, 최대한 덤덤하게 포권을 했다. 공손하게 사형을 배웅하는 모양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