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내가 쫓겨났다고?
무지개는 점차 줄어들며 변하더니 본래의 검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육화명은 여전히 그 위에 서 있었고, 그의 옷은 밤바람에 펄럭였다. 지금의 육화명에게서는 검선(劍仙)의 협기(俠氣)가 느껴졌다.
이를 지켜보던 심협은 그 대단한 위용에 감탄했다.
“심 형제, 이렇게 알게 된 것도 인연이니 훗날 장안에 오게 된다면 정부(程府)에서 나를 찾으시오.”
육화명은 이 말을 남기고는 그대로 검과 함께 푸른 무지개로 화하여 멀리 날아가 버렸다.
심협은 점점 멀어져가는 푸른 무지개를 한참이나 넋을 놓고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정부(程府)에서 육화명을 찾으라? 그 넓은 장안성에는 얼마나 많은 정부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디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심협은 육화명의 마지막 말이 예의상 하는 말일뿐, 진담이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육화명의 실력에는 진정 감탄했다. 꿈속에서 만난, 우혁을 비롯한 선사들보다도 더 뛰어난 것 같았다.
심협은 시선을 거두고 머리를 쥐어박더니 곧장 큰 버드나무를 향해 달렸다. 그 귀중한 작살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었다니!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커다란 버드나무에는 밥그릇만 한 구멍이 나 있었다. 그 가장자리가 달빛을 받자 투명한 빛이 반사되어 왔다.
심협은 가까이 가서 살피다가 깜짝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구멍 가장자리에는 옅은 검은색 얼음이 생겨 있었던 것이다.
“이런 효과가 있단 말인가! 백 사형의 동전검보다도 대단한 것 같구나.”
심협은 속으로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무명법결 중에 있는 기초법술에 불과한 답수결, 그나마도 전부가 아닌 일부 구결만으로도 이토록 대단한 부기를 얻었다. 그렇다면 뒤에 담긴 더 심오한 법술의 가치는 얼마나 높을 것인가!
심협은 그런 생각을 하며 버드나무 파편들 사이에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작살을 찾아냈다.
작살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거웠고, 만져보니 감촉도 기이했다. 금속도 아니고 목재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석재도 아니었다.
심협은 작살에 붙어 있는 부적을 살폈다. 문양은 무척 낯설었고, 구귀부나 소뢰부에 비해 훨씬 복잡했다. 심지어 문양이 어디부터 시작되는지도, 운필법(運筆法,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붓을 움직이는 방법)도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심협은 우선 부기 작살을 시험해보기로 하고는 한 손을 납작하게 펴 작살을 장심에 두고 반대 손은 결인하여 공법을 운공했다. 그러자 한 줄기 법력이 단전에서 일어나 팔을 통해 장심에 이르더니 빠져나와 작살 손잡이의 부적으로 흘러들었다. 이어서 부적의 빛이 일렁이더니 백색광이 한 겹 비치면서 뻗어 나갔다. 이 백색광은 이내 작살 전체를 감쌌다.
심협은 자신과 작살 사이에 나타나 법력을 이끄는 특별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속으로 조금 움직이려고 생각하자 작살은 이에 반응하듯 미미하게 떨리며 움직여 그의 장심과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허공으로 이동했다.
심협의 눈이 번득였다. 하지만 정신이 흐트러지자 작살은 아래로 떨어져 다시 그의 장심으로 돌아왔다.
심협은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법력을 운공해 부적에 주입시켰다. 그리고 이번에는 작살의 효과를 발휘시키는 데에만 온 힘과 정신을 집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살은 통제를 벗어나 돌연 밤하늘로 솟구쳤다가 추락했다. 법력을 잘 제어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심협은 작살이 땅에 처박히기 전에 재빨리 붙잡았다.
이후 몇 차례 더 시도해봤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작살을 날리기는커녕 가뜩이나 부족한 법력만 왕창 소모하고 말았다. 게다가 정신적으로도 피로해져 잠시 쉬기로 했다. 일단 춘추관으로 돌아가 다시 연구할 참이었다.
“아차, 육 도우에게 이곳이 어디인지 물었어야 하는데…….”
그제야 현실로 정신이 돌아온 심협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위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이니 오늘 밤은 꼼짝없이 이곳에서 노숙을 해야 할 판이었다.
* * *
사흘 뒤, 정오 무렵, 춘추관 산문.
우 사형은 하릴없이 계단에 앉아 무료하게 햇살을 쬐고 있었다. 한 손에는 찻잔을 들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양새에서 퍽 여유가 넘쳤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급히 일어나 눈을 가늘게 뜨고 살폈다. 그 인영은 푸른 장삼을 입었고, 어깨에는 회색 봇짐을 멨으며, 손에는 포대를 하나 들고 있었다. 그는 약간 앞으로 몸을 기울인 채, 빠르지는 않지만 안정된 걸음으로 다가왔다.
“어라? 저 녀석은……?”
우 사형은 인영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의아했다. 당연하게도, 인영은 송번현에서 돌아온 심협이었다.
심협은 아침 일찍 산 아래 토집현에 도착했고, 말을 팔아치운 후, 홍운루로 가 거위 구이와 술을 샀다. 그리고 주사와 부적용 종이까지 구입하고서야 춘추관으로 돌아온 참이다.
“산문은 중요한 곳이니 관련 없는 자는 들어갈 수 없네.”
심협이 막 산문에 도착하자 우 사형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 사형, 농담 마십시오. 저는 사부님의 허가를 받고 가족들과 만나고 오늘 돌아온 것뿐임을 아시지 않소?”
심협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하고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네 이놈! 사형에게 무슨 말버릇이냐? 그새 예의를 잊은 것이냐?”
우 사형은 버럭 외치며 돌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의 차가 심협의 머리로 뿌려졌다.
그러나 놀랍게도 심협은 몸을 슬쩍 기울이는 것만으로 너무도 수월하게 피했다.
“엇!”
우 사형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더니, 외려 기분이 상한 듯 곧장 심협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막 꾸짖으려던 그는 돌연 코를 킁킁거리더니, 심협의 봇짐을 힐끗 보고는 장난스레 웃었다.
“이 사형은 아량이 넓은 사람이니 더는 따지지 않겠네. 규칙은 알고 있을 테니 더는 긴 말을 할 필요 없겠지?”
“미안하지만, 이 거위 구이와 술은 백 사형과 전 사형에게 줄 선물이오.”
심협은 봇짐을 툭 치더니 우 사형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물론 우 사형은 그 대꾸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크게 노했다.
“말로 할 때 내놓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더니 우 사형은 한걸음에 심협 앞으로 다가와 봇짐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심협은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오히려 왼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그의 발이 차가 쏟아진 곳을 딛은 순간 체내에 무명법결을 운공하자 법력에 따라 찻물은 소용돌이치는 작은 물방울들로 화했다.
“어이쿠!”
우 사형은 그 물방울들을 밟고는 미끄러져 중심을 잃고 심협에게 부딪치고 말았다.
“사형, 조심하십시오.”
심협은 얼른 옆으로 피하며 우 사형을 부축해주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이 우 사형의 아랫배를 스치는 순간, 손의 양기를 위로 발출했다. 그러자 우 사형은 쓰러지던 힘까지 더해져 그대로 붕 뜨더니 산문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끄아아! 나, 나 죽는다. 아이고!”
산문 밖에서 우 사형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무려 예닐곱 계단을 굴렀으니 고통스러울 만도 했다.
심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던 길을 갔다. 그러나 잠시 후 멈칫 하더니 다시 돌아와 종이와 붓을 꺼내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사형, 미간이 거무스름하고 걸음이 안정되지 못하니 이는 신정(腎精)이 부족할 때 나타나는 증상이오. 거위 엉덩이로 이를 보할 수 있으니 받아두시오.’
심협은 붓을 거두고는 거위 구이를 꺼내 엉덩이 부분만 떼어내 방금 휘갈긴 종이와 함께 우 사형이 앉아 있던 돌계단에 올려뒀다. 그러고서야 손을 탁탁 털고는 천천히 산문 안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이곳은 그대로인데, 나는 그때의 심협이 아니구나.”
익숙한 춘추관의 초목들을 보고 있자니 감개무량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는 길에 마주친 제자들이 대부분 대충 고개만 끄덕여 인사를 건네고는 자리를 피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심협은 그런 의문을 느끼며 영관전 아래 산길에 도착했다. 저 위로 50, 60보 정도 떨어진 곳에서부터 뚱뚱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춘추관에서 가장 뚱뚱한 사람, 바로 정원이었다. 그의 뒤로는 서너 명의 제자가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계단을 오르던 심협을 보고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특히 가운데 있던 정원은 뚱뚱한 두 손으로 과장되게 눈을 비벼댔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지? 저놈 며칠간 안 보여서 쫓겨난 줄 알았더니 어째서 돌아온 게지?”
평소 정원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던 제자 중 한 명이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심협은 거리가 제법 멀었음에도 그 말을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그제야 심협은 제자들이 어째서 자신을 그렇게 쳐다보았는지 알게 됐다.
“심협, 한동안 보이지 않더니 어째 다시 돌아온 게냐?”
정원은 심협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한 손으로 앞을 막으며 물었다.
“집에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고 왔을 뿐이오. 그러니 어찌 돌아오지 않겠소?”
심협은 태연하게 답했다.
“네놈, 쫓겨난 게 맞구나! 그런데 어찌 낯짝도 두껍게 돌아올 생각을 한 게냐? 우리가 모를 줄 알았느냐? 약해빠진 네놈이 우리 춘추관에 와서 수명을 연장하려고 한 것을 말이다. 더 이상 더러운 재물 따위로 춘추관을 더럽히지 마라!”
정원은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심협에게 일갈했다. 그의 뒤에 선 제자들도 꾸짖는 듯한 눈으로 심협을 바라봤다.
“내가 춘추관에 와서 무엇을 하든 당신들이 무슨 상관이오?”
심협은 싸늘한 눈으로 정원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답했다.
정원 등은 이 돌변한 기세에 왠지 모르게 압박감을 느끼고는 시선을 피했다. 심지어 자신이 눈을 피했다는 사실조차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였다.
심협은 그들을 무시한 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정원은 순간적으로 멍하니 서 있다가, 자신의 졸개 같은 제자들과 눈이 마주치자 체면이 구겨졌다는 생각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쓸모없는 놈이 감히 사형에게 무슨 말버릇이냐? 혼쭐을 내주마!”
정원은 일갈하며 빠른 걸음으로 심협을 쫓아가며 오른손을 펼친 채 소화양공 3층의 힘을 운공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두 배나 커진 손으로 심협의 등을 내리쳤다.
“정 사형의 청양수는 실로 뛰어나구나!”
“저 멍청한 놈, 알아서 기었어야지!”
정원을 따르던 사람들은 다들 신이 난 듯 웅성거렸다.
그런데 그때, 심협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왼손으로 정원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붙잡았다. 그러더니 슬쩍 옆으로 잡아당겼다.
“어, 어흑! 아, 아프다! 아프단 말이다! 다, 당장 놔라! 놓으란 말이다!”
심협이 붙잡은 손가락을 잡아당기자 정원은 몸 전체가 그대로 굽어졌다. 그러자 고통을 참지 못한 정원은 눈물까지 흘리며 도살장의 돼지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정원을 따르던 제자들의 웅성거림도 뚝 끊겼다. 이제 막 소화양공에 입문했다는 심협이 놀라운 몸놀림으로 단숨에 정원의 급소를 공격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심협 네놈…… 하, 함부로 까불지 마라. 만약 나를 다치게 한다면 내 사…… 으악! 아이고!”
정원은 여전히 허리가 굽어진 상태에서도 위협하려 했으나, 심협이 손에 슬쩍 힘을 힘을 주자 자지러질 듯 비명만 질러댔다.
“정 사형의 청양수는 이리도 심오한데 어찌하여 이제 갓 소화양공에 입문한 사제를 협박하신단 말입니까?”
심협은 태연하게 뇌까리며 주위의 제자들을 훑어보았다. 그러면서도 정원의 손가락을 쥔 손을 이리저러 가볍게 흔들어댔고, 그때마다 정원은 고통에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더 이상 비명을 지를 기력조차 없어 보였다.
다른 제자들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고, 감히 심협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