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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49화 (49/1,214)
  • 49화. 어려운 부탁

    심협은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다시 강가로 향했다. 그런데 말을 묶어둔 나무 근처에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우람한 체구의 청년이 서 있었다.

    달빛이 밝게 비춰 청년의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끝이 치켜 올라간 눈썹은 귀밑머리까지 이어져 있었고, 눈동자는 별처럼 밝게 빛났다. 콧대는 마치 산처럼 높았고, 도톰한 입술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목이 둥근 원령장포를 입었고, 그 위로 오른쪽 어깨에서 사선으로 떨어져 옆구리까지 오는 반쪽짜리 어린갑(魚鱗甲)을 걸쳤다. 등 뒤로 검 한 자루를 멨는데, 길고 고풍스러운 장검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용맹한 기운을 발하는 자였다.

    “귀하께서는 약수문 어느 고수의 내문제자이시오?”

    그는 심협이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포권하며 물었다.

    “약수문이요? 어찌 그리 물으시는 건지요?”

    심협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이제 그는 2년 전 춘추관에 막 입관한 상인 집안의 자제가 아니었다. 세상에 수행하는 곳이 춘추관 한 곳뿐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문파에 대해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약수문도 알지 못했다.

    “그럼 아니란 말이오? 나는 등평군 경내에 약수문의 내문제자만이 이리 물 다루는 법술에 정통한 줄 알았소. 귀하가 한창 젊어 보여 그리 물은 것뿐이오.”

    청년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미심쩍은 듯 말했다.

    “귀하께서 오해하셨소. 나는 그저 아무렇게나 수행하는 자로, 어느 문파에서 전수받은 사람이 아니오.”

    심협은 별 생각 없이 답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사람과 필요 이상으로 엮이거나 말을 섞고 싶지 않았기에 얼른 말을 끌고 가버릴 생각이었다.

    “이왕 수행하는 사람끼리 만났으니 서로 도우(道友)로 청합시다. 나는 육화명(陸化鳴)이라 하오. 장안(長安) 사람이지요. 도우의 성함은 어찌 되는지요?”

    청년은 강가에 올라온 심협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향해 가는 것을 보고는 급히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심갑정(沈甲程)이라 하오. 이 지역 사람이지. 육 도우는 수도 사람인데 어찌 이리 외진 송번현까지 오신 게요?”

    심협은 갑자기 나타난 낯선 사람에게 경계심이 들어 정체를 속였다.

    “심 도우셨구려. 나는 등평성에 소식을 전하러 왔소.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도우가 수련하는 모습을 보고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인사한 것이오. 심 도우가 불쾌하지 않았기를 바라오.”

    육화명은 심협이 물에 흠뻑 젖은 것을 보며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니오. 내가 수련이 부족하여 그런 것이지. 도우께 못 볼 꼴을 보였소.”

    심협은 청년의 말투가 진지하고 눈빛에도 생기가 있는 것이 악인처럼 보이지 않자 조금 경계심을 풀고 웃으며 답했다.

    “물 다루는 신묘한 법술을 직접 보게 되다니, 내게는 큰 행운이오. 심 도우가 방금 시전한 것은 수법(水法) 중 물 위를 걷는다는 답수의 법술이 맞소?”

    육화명은 손을 내저으며 말하다가 또 질문했다.

    “육 도우도 이 법술을 연구 중이시오?”

    심협도 호기심이 생겼는지 육화명에게 되물었다.

    “연구랄 것도 없소. 그저 예전에 듣기로 이 법술이 법력의 소모가 극히 적으면서도 효과적이라 들었소. 이는 물속 요괴들과의 전투에서 매우 실용적일 테니 그저 부러울 따름이오. 허허.”

    육화명은 웃으며 고개를 젓더니 설명했다.

    “나는 그저 되는 대로 수행하는 자라 견식이 짧소. 요괴나 귀신이 있다고 듣기는 했으나 아직 직접 본 적은 없소. 도우께서 조금 알려줄 수 있겠소?”

    심협은 기이한 꿈속 동래현에 있었을 때 모습을 감출 수 있는 푸른 늑대와 흑랑왕이라는 요괴를 본 적이 있는데, 모두 강렬하게 기억이 남았다. 이에 실제로 요괴나 귀신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도 했다.

    “요괴나 귀신 따위는 사실 별로 이야기할 것도 없소. 그들도 우리 인간이 수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소. 천지의 영력(靈力)을 흡수하고, 음양오행의 변화에 적응하여 영적 지각을 깨우고 법력을 증가시킨 것이지.

    다만 요괴나 귀신 따위는 모두 각자 타고난 신통력이 있으니, 그 자체로 인간보다 조금 더 강하다 할 수 있소. 물론 수사라면 부적 같은 외물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귀신에게 질 거라고는 할 수 없겠지.”

    육화명은 여기서 말을 끊었다가 심협의 눈을 들여다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심 도우가 모르는 것이 있소. 지금 세상이 겉으로는 매우 평화로워 보일 것이오. 백성들이 무사평안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오. 그러나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위험한 힘이 사방에 숨어 있소. 귀신과 요괴들이 출몰하여 재앙을 일으키고 다니니, 각지의 관아에서도 대응하느라 정신이 없소. 반년 전에는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거금을 걸고 기이한 능력을 가진 자들을 모으고 있지.”

    육화명은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정말 그런 일이 있단 말이오?”

    심협은 경악한 듯 외쳤다.

    “어차피 이 일은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소. 지금은 요괴와 귀신들이 우리 대당에서만 재앙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오. 모든 동승신주(東勝神洲)의 다른 지역들도 태평하지 못하지. 듣기로는, 머지않아 천지를 뒤흔들 대재앙이 내릴 것이라 하더이다.”

    육화명은 잠시 망설이더니 다시 탄식했다.

    “천지를 뒤흔들 만한 재앙이라 하셨소? 자세히 듣고 싶군요.”

    심협은 속으로 놀라 급히 물었다. 그는 꿈속에서 우혁 부자가 언급한 마겁일(魔劫日)을 떠올렸다.

    “세상에는 아직 이 일이 알려지지 않았소. 그러나 긴밀한 풍문이 진즉부터 있었지. 이 일을 믿는 이는 많지 않았으나, 세속에 간여하지 않던 수행 문파들이 나서기 시작했고, 어떤 문파는 직접 제자를 파견하기도 했다오. 단지 조사하기 위해서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풍문이 점점 걷잡을 수 없게 되어가는 것은 사실이오.”

    육화명은 턱을 매만지면서 머뭇거리며 말했다.

    심협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도우는 그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은 것이오? 보통 수사라면 그리 자세히 알 수는 없을 텐데 말이오.”

    육화명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하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허리춤에서 손바닥만 한 요패(腰牌)를 꺼냈다.

    “심 도우는 역시 안목이 뛰어나구려. 이왕 이리 된 거, 더 숨기지 않겠소.”

    심협은 달빛으로 요패를 살폈다. 요패는 꽤나 묵직한 것이 평범한 동철로 주조한 것 같지는 않았다. 요패에는 굳게 닫힌 대문 도안이 새겨져 있었고, 다른 면에는 ‘대당어제(大唐御制)’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제가 실례를 범했군요! 도우는 관부에서 나오신 분이셨구려.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일을 알고 계신 것도 당연하지요.”

    심협은 요패를 육화명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지금 조정에서 많은 수사를 필요로 하고 있소. 심 도우는 이리 젊은데도 물 다루는 법술에 능하고 문파의 구속도 받지 않으니 관부에 힘을 빌려주는 것은 어떻겠소? 도우만 원한다면 내 관부에 추천하겠소.”

    육화명은 요패를 다시 허리에 차며 말했다.

    “과찬이시오. 이 법술에도 갓 입문했을 뿐이니 어찌 그럴 자격이 있겠소?”

    심협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직 신비한 옥침(玉枕)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지금의 미약한 법력으로 어찌 요괴나 귀신과 붙겠는가. 더구나 그는 꿈속에서 요괴들의 위력을 겪어보기도 했다. 게다가 현실에서는 목숨이 하나뿐이다.

    “심 도우, 그리 겸손하실 것 없소. 조정에 들어오면 좋은 점이 꽤 많소. 세속의 귀찮은 일들도 덜어낼 수 있고, 많은 지원도 받을 수 있지. 게다가 대당 백성들을 지키는 데 힘을 보태는 일이니 일석다조(一石多鳥) 아니겠소?”

    육화명은 웃으며 계속 권했다.

    “육 도우께서 이리 좋게 봐주시니, 제 법력이 더 정진되면 진지하게 고려해보겠소.”

    심협이 완곡하게 거절하자 육화명도 더는 권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그렇다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십시다. 대신 조금 어려운 부탁을 하려는데 들어줄 수 있겠소?”

    “말씀하시지요.”

    심협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게 방금 그 답수 법술을 조금만 전수해줄 수 있겠소?”

    육화명은 잠시 주저하더니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건…….”

    심협은 무의식적으로 거절하려 했다. 그러자 육화명이 다급히 덧붙였다.

    “걱정 마시오. 모든 구결을 전수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물을 걷는 부분만 알려달라는 것이오. 그리 해준다면 내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하겠소.”

    심협은 의아하여 반문했다.

    “육 도우께서 수법(水法)은 그리 잘 알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어찌 답수의 법술에 그리 관심을 가지시는 게요?”

    “내 비록 수법은 잘 모르나 심 도우의 답수결이 정통한 것임은 알아볼 수 있소. 조금이라도 배워둔다면 각지의 수역을 다닐 때 분명 도움이 될 것 같아 그러오. 허허.”

    육화명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쩍은 듯 웃었다.

    “비록 문파의 구속을 받지는 않으나 법술을 외부인에게 전수하지 않는다는 규칙은 내게도 있소. 음…… 그러나 이 답수결은…….”

    심협이 주저하는 듯하자 육회명은 또다시 덧붙였다.

    “안심하시오. 부탁을 들어준다면 대신 이걸 드리겠소.”

    육화명은 품을 뒤지더니 노란 부적이 붙어 있는 작은 회백색 작살을 꺼냈다.

    1척 정도의, 흔히 볼 수 있는 물고기 잡는 작살 같았다. 그러나 보통 작살보다 훨씬 정교해 보였다. 노란 부적이 작살 손잡이를 한 바퀴 감은 형태로 붙어 있었으니, 이는 분명 부기(符器)일 터였다.

    “어떻소? 마음에 드시오?”

    육화명은 심협이 작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웃으며 물었다.

    “육 도우, 이리도 통이 크시니 내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는 심협이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하하! 역시 심 도우는 호쾌하구려.”

    육화명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쩌렁쩌렁 울리면서 주위의 나무들이 흔들리며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심협은 답수결의 요점을 육화명에게 세세히 알려줬다.

    “오, 역시 정묘 하구려! 하하! 자, 이 부기는 이제 심 형제 것이오.”

    육화명은 껄껄 웃으며 호칭까지 바꾸었다.

    “이 부기는 어찌 사용하는 것이오? 육 형이 알려주시겠소?”

    심협도 웃으며 육화명을 따라 호칭을 바꿨다.

    “부기는 부적이 힘으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니 사용할 때 법력으로 부적을 발휘시켜야 하오. 다만 보통 부적과는 사용법이 조금 다르오. 부담(符膽: 부적을 구성하는 부분.)만 태우는 것이 아니라 법력으로 계속 이끌어 부기의 공격성을 통제해야 하지.”

    육화명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으나 심협은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표정에 드러났는지 육화명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내 시범을 보여주겠소. 보면 이해가 될 것이오.”

    말을 마친 육화명은 곧장 한 손으로 결인을 했다. 그러자 장심에서 푸른 빛이 생겨나 물이 흐르듯 작살 손잡이의 부적으로 주입되었다. 부적은 빛으로 번득였고, 한 겹의 하얀 빛이 바로 퍼져 나가 작살 전체를 감쌌다.

    육화명은 그 상태로 작살을 집어 던졌다. 그러자 작살 표면에 회백색 빛이 크게 일렁이더니 허공에서 순식간에 서너 배로 커졌다. 작살이 밤하늘에서 빙빙 돌며 춤추듯 날면서 하얀 빛을 남기고는 돌연 한 줄기 백색광으로 화하였다. 그러고는 십여 장 밖의 굵은 버드나무를 향해 돌진했다.

    꽝!

    백색광이 순식간에 수풀 속으로 사라지는가 싶더니 굉음이 울렸고, 버드나무가 미친 듯이 떨렸다. 가지 전체가 요동치며 잎이 분분히 흩날렸다.

    이를 지켜보던 심협은 흥분을 감추기 힘들었다.

    육화명 또한 흥이 올라 돌연 한 손으로 결인을 하더니 하늘을 가리키며 일갈했다.

    “일어나라!”

    그러자 금속성과 함께 육화명 뒤에서 한 줄기 검광이 하늘을 향해 뻗었다. 이어서 마치 용이 솟아오르듯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검광은 1장 정도의 푸른 무지개로 변하더니 온 하늘을 춤추듯 날아다녔다.

    그때, 육화명이 뛰어올라 십여 장 높이를 그대로 솟구쳐 그 푸른 무지개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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