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춘풍득의(春風得意)
심협은 한참만에야 부적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재운 부르는 부적은 많이 봤소만, 이 부적은 보통의 초재부보다 한참 복잡하오. 이 부적은 잘 모르겠지만, 한번 최선을 다해보겠소.”
“괜찮습니다. 종이나 주사가 부족하다면 더 가지고 오겠습니다.”
주인장은 얼른 대답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적 쓸 준비를 마쳤다. 이어서 빠르게 주사와 개의 피를 섞고, 부적용 종이를 탁자에 펼치더니 붓을 적셨다. 그리고 부적을 쓰기 전, 눈을 감고 그 초재부의 문양을 속으로 자세히 되짚은 후, 확신이 들자 붓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붓이 움직일 때마다 누에가 실을 토해내 듯 사락사락 소리가 들렸고, 획 하나하나가 종이 위에 그려졌다.
지금의 심협은 정(精), 기(氣), 신(神)에 대한 깨달음이 심오해져 부적을 쓰는 것도 예전처럼 어리숙하지 않았다. 붓이 움직이며 정, 기, 신의 힘이 발휘되자 주사가 섞인 피의 원기(元氣)가 종이와 일체(一體)가 되어갔다.
주사 섞인 피의 원기가 신비한 부적 문양과 합쳐져 어떤 알 수 없는 힘을 부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안에는 분명 수많은 법칙이 얽혀 있을 것이다. 이쪽 세계의 어떤 비밀까지도…….
주인장 후씨는 한쪽에 서서 붉은 선들이 점점 복잡하고도 오묘한 부적 문양으로 완성되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점점 기대가 차올라 자신도 모르게 손을 비벼댔고, 얼굴에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무척 복잡한 부적이라 아직 7할 정도만 완성된 상태였지만, 주인장은 알 리가 없었다.
심협은 점점 피로한 기색을 보였고, 호흡도 조금씩 거칠어졌다.
부적을 쓰는 데는 정, 기, 신이 소모됐다. 소뢰부나 구귀부는 부적 문양이 덜 복잡하여 이 정도로 힘들지 않았다. 다행히 심협은 지금 연기기 수사(修士)가 되었기에 이 정도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향이 반개쯤 탈시간이 지났을 때, 심협이 손목을 틀어 매끄러운 활 모양을 그려냈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을 틀어 마지막 획을 완성했다.
심협은 그제야 붓을 떼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주인장은 기쁜 기색으로 다가오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심협이 눈을 감고 그대로 가부좌를 트는 것을 보고는 말을 삼키며 우뚝 멈춰 섰다.
지금 심협의 상태는 정말 좋지 않았다. 마치 온몸을 쥐어짠 듯한 느낌이었고, 머릿속은 공허해 정신력이 모두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연기기에 진입하면서 체내의 원기가 충만해져 예전처럼 단명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지만, 정신력은 그리 많이 향상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심협은 묵묵히 소화양공을 운공하여 양기로 정신력을 회복시켰다.
잠시 후, 심협의 얼굴에 붉은 빛이 일었고, 온몸에서 난로처럼 열기가 뿜어 나왔다.
옆에 서 있던 주인장은 이 열기에 마치 따뜻한 햇살을 쬐인 것처럼 피로감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선술(仙術)이구나! 심 공자는 역시 수선(修仙)하는 분이었어!”
주인장은 며칠 전 밤, 우연히 일어났다가 심협이 후원 앞길에서 부적을 시험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심협이 말로만 듣던 수사라고 추측하게 됐다. 하여 부적을 써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리고 역시 그 추측은 맞지 않았는가!
주인장은 탁자 위의 부적을 힐끗 보고는 당장이라고 가져가고 싶었지만, 심협의 허락 없이는 감히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옆에 서서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기다릴 뿐이었다.
1각(*刻, 약 15분) 정도가 지나자 요동치던 붉은 빛이 심협의 체내로 사라졌다.
심협은 천천히 눈을 떴다. 여전히 창백했지만, 한결 나아진 상태였다.
그는 탁자 위의 부적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 부적이 정말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연기기에 진입한 이후 처음으로 쓴 부적이자 지금껏 썼던 것 중 가장 완벽한 부적이었다.
“최선을 다했으나 초재부는 진(鎭) 부적의 일종이라 효과를 당장 확인하기는 어렵소. 그러니 제대로 쓴 것인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을 듯하오.”
심협은 부적을 주인장에게 건네며 말했다.
“공자께서 쓰신 부적이 어찌 영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오히려 주인장이 더 심협의 능력을 확신하는 듯 얼굴에 희색이 만연했다.
주인장은 품에서 정교한 자단목 목합을 꺼내더니 심협이 쓴 부적을 조심스레 담아 넣었다. 그러고는 목합 하나를 더 꺼내 탁자에 놓았다. 그 목합에는 큰 은괴가 두 덩어리 들어 있었다.
“최근 장사가 신통치 않아 더는 드리지 못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받아주십시오.”
주인장이 공수하며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소. 내 말한 대로, 이 부적은 나를 구해준 은혜에 보답한 것일 뿐이니 마음 쓰지 마시오.”
심협은 손을 내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심 공자는 우리 객잔의 손님이니 의원을 부르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하오니 지금 이리 많은 힘을 소모해가며 부적을 써주신 데 대해 마땅히 보답해야 합니다.”
주인장의 결연한 목소리에 심협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그 부적이 효과를 봐서 주인장이 정말로 돈을 잘 벌게 된다면, 그때 보답해주시오.”
심협이 굽히지 않자 주인장은 은괴를 다시 거둘 수밖에 없었다.
주인장은 심협이 할 일이 있음을 눈치채고는 예를 갖추어 감사를 표하고 방을 나섰다.
심협은 잠시 그대로 앉아 있다가 부적을 쓰기 시작했다. 첫 번째 부적은 소뢰부였다.
소뢰부를 쓰는 데는 이미 익숙해졌지만, 아직 성공률은 높지 않았다. 연기기에 진입했음에도 대여섯 장을 써야 한 장 정도 성공이었다.
잠시 후, 심협은 제대로 써낸 소뢰부를 살펴보다가 손에 쥐고는 묵묵히 체내의 법력을 운공했다. 이어서 법력을 손바닥으로 이끌어 부적에 주입했다.
곧바로 소뢰부 표면에 몽롱한 하얀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심협은 기뻐하면서도 급히 법력 운공을 중단했다. 소뢰부의 효과가 발휘된다면 방 안에 한바탕 번개가 칠 테니 말이다.
소뢰부의 빛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곧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법력이 생기고 나니 원석과 같은 외물을 쓰지 않아도 부적의 효과를 발휘시킬 수 있구나!”
이는 예상한 대로였다.
심협은 소뢰부를 잘 접어서 챙기고는 붓을 들어 집에 편지를 썼다. 이제 단명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음을 알리려는 것이다.
당연히 <무명천서>에 대해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다. 연기기 수사가 되었다는 말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춘추관에서 소화양공 연마에 성공하였고, 장문인에게서 좋은 약을 하사받아 수명이 연장되었다고만 해뒀을 뿐이다.
심협은 편지와 봇짐, 석합을 챙기고는 대청으로 나갔다.
때는 이미 점심시간을 지나 대청에는 손님이 없었다. 점소이 몇몇만이 따분한 듯 서 있거나 앉아 있었고, 소삼자는 탁에서 엎드려 졸고 있었다.
“심 공자, 떠나시는 겁니까?”
주인장은 주판을 튕기다가 짐을 가지고 나오는 심협을 보고는 급히 나왔다.
“며칠간 신세 많이 졌소.”
심협은 숙박료를 꺼내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아이고, 무슨 말씀입니까? 도움이야 제가 받았습죠. 그러니 제가 무슨 낯으로 공자께 숙박료를 받겠습니까?”
주인장은 다급히 은자를 챙겨 심협의 품에 억지로 찔러 넣었다.
심협은 주인장의 완강함에 결국 숙박료 내는 것을 포기했다.
주인장은 직접 심협의 말을 끌어 대문까지 배웅했다. 그러면서 또 기회가 있거든 꼭 다시 들러 달라고 연신 청하고서야 심협을 보내줬다.
심협은 송번현성 역참으로 가서 집에 편지를 부쳤고, 말을 타고 성을 나섰다.
이번 여정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동안 골머리를 앓던 문제도 해결했고, 연기기에 진입하여 새로운 방향도 찾게 되었으니 말이다. 심협은 지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후련했다.
송번현성 인근은 지세가 평탄하고 큰길 주위로 잡초가 무성했다. 바람이 불면 잡초들이 파도치듯 넘실거려, 보고 있노라면 마음도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심협은 춘추관으로 말을 달렸다. 바람이 두 귀를 스칠 정도로 내달리니 주변 풍경이 빠르게 스쳐 갔다. 그 유명한 춘풍득의마제질(*春風得意馬蹄疾, 봄바람 속에 의기양양하게 말을 달리다)이란 이런 상황 아니겠는가.
* * *
송번현의 한 들판의 작은 길. 심협은 말을 탄 채 수시로 주변을 살폈다. 길을 찾는 듯한 모양새였다. 말을 달린 지 두 시진이 지났지만, 본래 송번현 지리에 어두운 데다가 흥이 올라 말을 달리다보니 결국 길을 잃고 만 것이다.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상하리만치 황량했다. 길을 따라 말을 타고 반 시진을 갔는데도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행인에게 길을 물을 수도 없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주위로는 온통 아득한 들판뿐, 등불 하나 보이지 않았다. 바람소리가 마치 귀신 울음소리 같아서 듣고 있으면 오싹할 정도였다. 만일 겁 많은 사람이라면 오줌을 지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연기기에 진입해 더욱 대담해진 심협에게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다시 7, 8리 정도를 가니 저 앞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이내 드넓은 강이 나타났다. 만수하 세 개를 합친 것만큼 넓었고, 강물에서 파도가 일고 암류가 솟구쳤다.
“무슨 강이지? 내가 길을 잘못 들었단 말인가?”
심협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전에 봤던 송번현 지도를 떠올려 봤지만, 눈앞의 강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다.
혼자라면 답수결을 이용해 더 넓은 강이라도 건너겠으나, 말까지 데리고 강을 건널 자신은 없었다. 그렇다고 말을 버리고 가자니 저 건너편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없지 않은가. 거기서 또 길을 잃는다면 황량한 들판을 계속 걸어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우선 근처에 다리라도 있는지 찾아봐야겠구나.”
심협은 중얼거리며 말에서 내렸다. 말을 근처 나무에 묶어두고는 강가를 따라 걸으며 사방을 살폈다.
휘영청 밝은 은색 달빛에 길은 밝았다. 게다가 심협의 시력 또한 크게 향상된 터라 그에게는 낮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강은 굴곡이 심했고, 양측으로 수목이 우거져 있어 그리 멀리까지는 보기 힘들었다.
심협은 잠시 생각한 끝에 답수결을 운공했다. 강 중간의 시야가 탁 트인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두 발에 푸른 빛이 일었고, 심협은 강 위를 걸었다. 두 개의 소용돌이가 그의 발아래를 받치고 있었다.
심협이 지난번 답수결을 시험한 곳은 잔잔한 계곡이었으나 이번에는 물살이 급한 큰 강이었다. 그래서인지 근처에 암류가 솟구쳤다. 아직 익숙지 않은 상황에서 외력의 방해를 받으니 운공이 쉽지 않았다. 이에 몸은 파도에 따라 사방으로 요동쳤고, 언제라도 강에 빠질 것만 같았다.
심협은 급히 법력을 운공하여 끊임없이 두 발에 주입했다. 그렇게 답수결을 유지하면서 두 팔을 들어 균형을 유지했다. 강의 유속에 점점 적응되자 점차 안정되어 갔다.
“답수결을 다양한 환경에서 부단히 연습해 둬야겠구나.”
심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정신을 가다듬고 강의 중심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서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으로 절묘한 법술이로구나!”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요동치는 파도 소리를 압도하여 마치 심협의 귓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답수결을 시전하는 데 모든 신경을 쏟고 있던 심협은 돌연 들려온 소리에 순간 집중이 흐트러졌다. 그러자 체내에서 운공되던 법력이 흐트러지는가 싶더니, 양발에 일었던 빛이 돌연 사라졌다.
풍덩!
심협은 그대로 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급히 양손으로 결인을 했다. 그러자 사방의 강물이 돌연 움직이더니 주변에 소용돌이가 몰아치며 발아래에 다시 부력이 생겨났다. 이에 심협은 다시 물 위로 떠올랐다.